민중미술 너머 '형상미술'을 보라
[경향신문]
새로운 ‘형상’으로 시대정신 표현
20년간 흐름 잇고도 계보화 안 돼
26명 작품 모아 ‘미술사 다시보기’
얼굴이 바짝 말랐다. 주름진 피부가 메마른 땅을 떠올리게 한다. 송주섭은 지층의 표질을 인물의 표정이나 피부로 옮겼는데, ‘세대’(1982)도 그러한 작품이다. 푸석한 인물의 모습이 노동으로 거칠어진 피부, 삶의 무게로 해석된다. 군사독재 정권의 인권 탄압과 민주주의 말살을 음울하고 괴기스러운 인물 군상으로 표현한 것으로도 말해진다. 흔히 1980년대 ‘민중미술’의 틀에서 설명되는 작가 그리고 작품이다.
부산시립미술관의 ‘거대한 일상: 지층의 역전’에선 새로운 설명을 시도한다. 민중미술의 시기로 인식되는 1980년대 한국미술을 ‘형상미술’로 재고해야 한다는 도발적인 제안이다. 형상미술이 전혀 새로운 얘기는 아니다. 197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한국 미술계 전면에 등장한 흐름이다. 단색화로 대표되는 1970년대 추상적이고 관념화된 모더니즘에 대한 반발에서 출발해 현실에 대한 이야기를 새로운 ‘형상’으로 드러내고자 했다. 이 시기 작가들은 기존 추상회화나 구상미술과는 다른 강렬한 색감, 인체에 대한 새로운 묘사, 욕망의 표현, 일상에 대한 주목 등 이전과는 다른 ‘지금 여기, 우리의 이야기’를 작업으로 드러냈다.
전시는 1980년대 부산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한 작가 26명의 작품 120여점과 동시기 한국 미술계를 아우르는 아카이브로 구성했다. 주목하는 것은 ‘개인의 서사’다. 안창홍은 송주섭과 더불어 이번 전시에서 형상미술로 재맥락화하는 대표적 작가다. 안창홍은 1980년대 민중미술을 주도했던 ‘현실과 발언’ 활동 때문에 민중미술 작가로 분류되기도 했다. 하지만 안창홍은 시대 상황을 개인주의적 화법으로 그려냈다. 눈을 파내버린 인물들을 통해 황폐화된 인간성을 드러낸 ‘가족사진’이나 억눌린 개인의 심리를 자극적으로 표현한 ‘위험한 놀이’를 민중미술 틀로는 다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전시에선 기존에 민중미술로 설명하던 것을 형상으로도 담아낼 수 있다고 서술을 바꾼다. 민중미술의 ‘비판적 리얼리즘’ 역시 형상성을 공유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혼란한 시대 속 현실의 체험이 개개인의 자유로운 표현으로 나타나고, 인간의 현실을 주제로 한 알레고리가 발현됐다고. 세상에 대한 저항감 그리고 그 삶을 살아내야만 했던 개인의 애환들이 삶의 체취를 드러내는 다각적인 시선으로 표현됐다는 설명이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여성 작가들의 작품이다. 그로테스크, 욕망, 섹슈얼리티, 과장되고 뒤틀린 인물 묘사 등으로 시대를 진술했다. 형상미술 2세대로 분류되는 김은주는 틀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는 앙상한 인간의 형상을 종이에 콩테로 그려냈다. 너무 치열해서 잔상이 일렁이는 듯한 검은 선들이 강렬하다. 송주섭의 테라코타 작품과 함께 배열된 공간이 이번 전시에서 가장 눈에 띈다. 김춘자는 가정에 매여 작업할 수 없던 순간들, 가족을 위해 희생해야 했던 욕망을 거친 색채와 기괴한 생명체로 비유했다. 김난영은 상품화된 성, 여성의 주체성 등을 표현했다.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현재적 시선으로 지방에서의 여성주의적 작업들도 다시 주목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나올 법한 질문은 민중미술을 왜 굳이 형상미술로 포괄해야 하는지다. 아직 민중미술도 미학적·역사적 정립이 충분하다고 말할 수 없는 상황에서 말이다. 기혜경 부산시립미술관장은 지난 9일 기자간담회에서 “당시 형상미술 흐름이 이어지다가 1980년대 시대적 상황과 맞물려 민중미술로만 계보화가 이뤄졌고, 그러다보니 민중미술에 포함되지 못한 작가들은 미술사에서 누락된 것은 아닌가라는 문제의식이 있었다”면서 “개인과 시대가 별개가 아니라 시대로 읽을 맥락이 있지만, 거기서 시대만 읽으면 되겠냐는 얘기를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1980년대를 형상미술로 아우르면 이후 개인의 자율성과 다양성이 강조되는 포스트모더니즘과의 연결도 살펴볼 수 있다. 기 관장은 “이전 담론에 ‘짱돌’을 던지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오히려 미술사의 서사를 풍부하고 두껍게 하려는 시도”라며 “더 많은 논의를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배문규 기자 sobbell@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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