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완규의 책읽기 세상읽기] (59) '곽재구의 포구기행' - 삶의 풍경

박완규 2021. 4. 19. 2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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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탓에 여행과 거리를 둔 지 오래다. 여기저기서 전하는 봄꽃 소식을 한 귀로 흘려듣는다. 하지만 주말이 다가올 때마다 설레임은 여전하다. 지도를 들여다보고 여행기를 읽는 것으로 달랜다. 이번에는 ‘곽재구의 포구기행’을 펼쳐 들었다.

시인 곽재구는 경북 포항시 구룡포에서 전남 해남군 송지면 어란포구에 이르기까지 각지의 포구마을을 찾아다니면서 그때그때 마음속에 이는 감성을 기록했다. 책에 ‘꿈꾸는 삶의 풍경이 열리는 곳’이라는 부제를 달았다.

시인에게는 외로움이 여행의 동력이다. “외로움이 깊어져서 숨도 쉬기 힘들어질 때 나는 구룡포를 찾는다”고 했다. 북적대는 선창 풍경과 갈매기, 바닷사내들…. “그 모든 풍경들이 한순간 여행자가 안고 온 외로움의 봇짐들을 파도 저 멀리 실어 보낸다”는 것이다.

“나는 인생이 아름다운 것은 우리들 삶의 골목골목에 예정도 없이 찾아오는 외로움이 있기 때문이라고 믿는 사람이다. 외로울 때가 더 좋은 것이다. … 외로움이 찾아올 때, 사실은 그 순간이 인생에 있어 사랑이 찾아올 때보다 더 귀한 시간이다. 쓴 외로움을 받아들이는 방식에 따라 한 인간의 삶의 깊이, 삶의 우아한 형상들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는 순천만에 모여든 철새들을 보고 이런 말을 한다.

“미래를 위한 시간, 미래를 위한 비행. 거기에는 일정 부분 짙은 꿈의 냄새가 배어있다. 오랜 세월 동안 새들은, 자신들의 생명과 맞바꿀 만한 가혹한 비행을 통해 스스로의 유전자 내부에 꿈에 대한 기록들을 저장하고, 그 추억들은 쌓이고 쌓여 설령 지금보다 가혹한 삶의 현실이 지상에 도달하더라도 그것을 극복해낼 힘을 갖추는 것이다.”
인간에게 하는 이야기다. 시인 이세기가 ‘흔들리는 생명의 땅, 섬’에서 “우리는 왜 새를 보는가? 이것은 곧 ‘우리는 왜 꿈을 꾸는가?’라고 묻는 것이다”라고 한 말을 떠올리게 한다. 

바다에서 노을빛이 스러지고 나면 곽재구는 갯마을의 불빛을 바라본다. 별빛보다 더 아름답다고 했다.

“불빛들은 갓 핀 다알리아 꽃송이처럼 싱싱하다. 세 칸 집 안에 사는 사람들의, 꿈과 노동과 상처와 고통의 시간들의 은유이기도 하다. 아름다움보다는 쓸쓸함이, 기쁨보다는 아쉬움의 시간들이 훨씬 많았을 텐데도 그들은 말없이 불을 켜고 지상의 시간들을 지킨다.”

화포에서 만난 아이들은 학교가 파한 뒤 보리피리를 불면서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시인은 아이들에게 보리피리 만드는 법을 물었다. 그가 어린 시절에 익힌 방법과 같았다. 

“몇십 년이, 혹은 그보다 훨씬 많은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들이 있다. 그것들이 어쩌면 우리들의 삶을 영속시키는 힘인지도 모른다. 보리피리를 불며 아이들은 돌아갈 그리움의 시간이 있다. 그 그리움이 쌓이고 쌓여 아이들은 새로운 세상을 만나고, 어떤 힘들고 추한 시간들과 부딪쳤을 때 스스로 그것들을 훌훌 털고 일어설 힘을 지니게도 될 것이다.”

순천만의 작은 갯마을 거차는 할머니들이 나무썰매를 타고 개펄에 나가 ‘맛’ 조개를 채취하는 곳이다. “시장할 텐디 저녁이나 드오”라는 한 할머니에게 이끌려 하룻밤 비럭잠을 잤다. 생의 온기를 느끼며 세상 속으로 나갈 용기를 얻었다고 했다.

“그 아침, 거차를 떠나며 나는 이상한 삶의 원기를 느꼈다. 밀려오는 파도의 물살마다 뜨겁게 새겨지는 햇살들. 불기둥처럼 내 가슴속으로 밀려오는 그 햇살들의 광휘 속에서 나는 다시 내가 써야 할 시의 체온을 느꼈고, 기꺼이 세상의 톱니바퀴 속으로 다시 맞물려 들어갈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시인은 많은 꿈을 꾸었지만 모두 이루어지기 힘든 것이었다. 이루어지지 않았으니 꿈인지도 모른다.
“꿈은 지니고 있는 데서 그 자체의 광휘가 빛난다. 개펄들이 그 무수한 오폐물들과 악취를 모아 그곳에 모든 바다 생물들의 낙원을 만들듯이. 세상살이에서 구토하고, 쓰러지고, 아파하고, 쓸쓸해한 모든 기록들이 기실은 우리가 꿈꾸고자 한 시간들의 한 집적이 되어가는 것을 지켜볼 수 있다면, 그 생명은 충분히 아름다운 것이다.”

거제도 14번 국도 곁에 늘어선 아름다운 포구들을 보면서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미련 없이 나는 내 마음을 이곳의 길과 바다에 주었다. 순결하고 아름다운 것들. 상처도 할큄도 없이 제자리에 서서 제 스스로의 모습이 빛나는지 어쩌는지도 모르고 우리 곁에 말없이 머무는 것들.”

해남 어란의 바닷가에서는 “핍진한 삶에 대한 그리움, 어머니의 알집에 대한 따뜻한 그리움 들이 갯바람 속에 스멀스멀 배어 나왔다”고 했다. 모래사장에 한 편의 시를 썼다. ‘어란진’의 한 대목이다.

“봄가뭄 속에 별 하나 뜨고/ 별 속에 바람 하나 불고/ 산수유 꽃망울 황토 언덕을 절며 적시느니.”

이제 완연한 봄이다. 시인은 “새로운 계절은 지나간 계절의 혹독함을 부드러운 숨결 속에 묻는다”고 했다. 지금 우리가 겪는 혹독함을 묻을 새로운 계절이 빨리 오기를 바란다.

박완규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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