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법원 구내식당 '밥 앞의 불평등'
[경향신문]
전국 법원 19곳 중 18곳의 구내식당에서 판사와 직원이 식사하는 공간이 분리돼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판사 전용 주차장을 운영하고 있는 법원도 절반 가까이 됐다. 공공기관 대부분에서 고위직들이 별도로 밥을 먹는 이른바 간부식당을 폐지했는데 법원만 이러한 관행을 유지하는 것이다.
19일 경향신문 취재 결과 전국 법원 19곳(지원 수준의 소규모 법원과 가정법원 등 전문법원 제외) 중 춘천지법을 제외한 18곳은 판사나 4급 또는 5급 이상 직원이 이용하는 식당(법관 식당)과 그외 6급 이하 직원과 민원인이 이용하는 식당(직원 식당)이 분리돼 운영되고 있다. 대법원의 경우 대법관 식당(3층), 법관 식당(3층), 직원 식당(2층)의 세 종류 식당이 운영되고 있다. 전국 최대 규모 법원인 서울고법·서울중앙지법의 경우 법관 식당(1층), 직원 식당(지하 1층)이 나뉘어져 있다. 의정부지법 등 구내식당이 한 곳뿐인 법원들은 이동식 칸막이로 공간이 나뉘어져 있다.
메뉴는 대부분 법관 식당과 직원 식당이 같았다. 법관 식당 18곳 중 7곳은 직원 식당과 달리 종업원이 식사를 가져다 주고 반찬을 다 먹으면 다시 채워주는 차이점이 있었다. 직원 식당에서는 스테인리스 식판을 쓰지만 법관 식당은 그릇을 쓰는 법원도 있었다. 일부 법원에서는 서빙 비용 등이 포함된 까닭에 법관 식당 가격은 직원 식당보다 1000~2000원가량 더 비쌌다.
법관 전용 주차장을 운영하는 법원도 19곳 중 9곳이었다. 서울고법·서울중앙지법, 대전고법·대전지법 등의 지하주차장은 판사 또는 4·5급 이상 직원이 아니면 주차할 수 없다. 6급 이하 직원이나 민원인은 주로 지상주차장에 선착순으로 주차해야 한다.
법원행정처 관계자는 법관 전용 식당·주차장 운영에 대해 “행정처 지침은 없다. 각급 법원이 자율적으로 운영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각 법원 공보판사들은 민원인과 판사가 식사하는 공간을 분리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공통적으로 재판 당사자와 판사가 함께 식사하면 불미스러운 일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라는 취지의 답변을 했다. 다만 이들은 판사와 직원을 분리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모른다”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한 고위 법관은 “제가 처음 법원에 들어온 1980년대만 해도 법관과 직원이 분리해서 식사하는 게 자연스러운 문화였고, 아마 다른 국가기관에서도 간부식당을 운영했을 것”이라며 “법원은 선례를 따르는 문화다. 여지껏 누구도 문제제기를 안 한 까닭에 그 문화가 지금까지 이어진 것 같다”고 말했다.
공공기관 대부분이 권위주의 타파 차원에서 간부식당을 폐지한 것과 비교하면 법원만 권위주의적 관행을 고집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정부세종청사, 정부서울청사에는 간부 식당이 없다. 한 정부청사 관계자는 “장관님이든, 직원이든, 청소노동자든 모두 같은 곳에서 식사한다”고 말했다.
국회도 2017년까지 의원 식당, 직원 식당으로 구분돼 있었지만 지금은 각각 1식당과 2식당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국회 관계자는 “원래 의원·직원·일반인 구분 없이 모든 식당을 이용할 수 있었지만 ‘의원 식당’이라는 명칭이 권위적이라는 이유로 바뀌었다”고 말했다. 국방부도 장성급, 영관급 등 계급별 간부식당을 운영했지만 2018년 송영무 당시 장관 지시로 폐쇄됐다. 일선 검찰청도 검사와 직원을 분리해 구내식당을 운영하지 않는다. 다만 대검찰청에서는 검찰총장 전용 식당과 검찰연구관 이상 간부만이 이용한 식당이 운영됐는데 지난 14일 총장 직무 대행인 조남관 대검 차장검사는 모든 직원이 사용할 수 있도록 식당을 개방하라고 지시했다.
일부 법원 관계자들은 법관 식당 운영이 차별은 아니라는 취지로 주장했다. A법원 공보판사는 “(6급 이하) 직원들도 원하시면 (법관 식당에서) 식사할 수 있다. 자율적으로 나눠서 먹는 것”이라고 했다. B법원 공보판사는 “직원분들은 (법관 식당의) 가격이 비싸서 안 오시는 경우가 많고, 오셔서 드시는 직원분들도 있다”고 말했다.
장소만 분리돼 있을 뿐 제공되는 서비스는 동등하기 때문에 차별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었다.C법원 공보판사는 “판사들만 구첩반상에 먹고 그런 건 전혀 아니고 메뉴는 같다. 판사들은 서빙을 받는 대신 1000원 정도를 더 지불한다”며 “장소로만 나뉘어 있는 것이지 차별이나 차이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고 말했다. D법원 공보판사는 “판사 식당에서만 커피를 따로 준다든지 별도의 서비스가 있는 것이 아니다. 공간적으로만 분리되어 있다”고 말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미국 사회에서 오랫동안 인종분리 정책을 유지시킨 19세기 말 ‘플레시 대 퍼거슨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 미 연방대법원은 1896년 식당, 화장실, 버스 등 공공시설에서 흑인과 백인이 쓰는 공간을 분리한 인종차별 조치를 일컫는 일명 ‘짐크로법’에 대해 “분리되더라도 동등한 수준의 시설이 제공되기만 하면 평등하다(separate but equal)”며 합헌 판결했다.
일부 판사들은 판사와 직원의 식사 공간이 분리될 필요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E법원 공보판사는 “직원도 법원 가족이긴 하지만 재판 당사자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F법원 공보판사는 “판사는 일반인의 공격 대상이 될 수도 있지만 직원은 직접적 공격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있다”며 “판사들은 점심을 먹으면서 공개되면 위법한, (재판부 내 판사들끼리의) 합의 내용 같은 민감한 얘기를 하는 경우도 많다”고 말했다.
이러한 설명에 일부 법원 직원들은 납득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20년 경력의 직원 G씨는 “판사도 재판 당사자가 될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18년 경력의 직원 H씨는 “그런 논리라면 판사들은 모든 식당에서 밥을 먹으면 안 된다. 모든 국민이 재판 당사자가 될 수 있지 않느냐”고 했다. 한 판사도 재판 합의 내용을 직원들이 들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판사와 직원 식당을 분리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법관 식당은 점심에만 운영하는 경우가 많아서 판사들이 야근을 할 때는 직원 식당을 간다. 이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이냐”며 “변명이 안 된다”고 했다. 반면 20년 경력의 직원 I씨는 “(그런 관행이) 익숙해져서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했다”고 했다. 17년 경력의 직원 J씨도 “몇천원 더 내고 (법관 식당에서) 먹을 수는 있지만 (같이 일하는 판사들이랑 같이 먹는 게) 불편해서 안 간다”고 했다.
일부 직원들은 법원에는 법관 식당 운영 외에도 ‘판사 선민주의’ 문화가 남아 있다고 지적했다. 직원 H씨는 “인사철에 총무과 직원, 재판부 실무관 등 일반 직원들이 판사들의 짐을 다 싸준다. 이런 건 우리 업무가 아니다”라며 “공과금 납부 같은 사적 업무를 직원에게 시키는 판사도 많다”고 주장했다. 재판 시작 10분 전 참여관이 판사 사무실 앞에 가서 법정까지 판사를 ‘에스코트’하는 문화도 남아 있다고 한다. 직원 H씨는 “재판 시작 전에 참여관이 법정에 앉아 있으면 되는 건데, 판사를 모시러 가야 한다”며 “70%의 법원에서는 이런 문화가 남아 있는 것 같다”고 주장했다. 직원 J씨는 “과거에는 50대 계장이 갓 임용된 20대 판사에게 무릎꿇고 술을 따르면서 ‘영감님’이라고 했었는데 지금은 많이 바뀌어 가고 있긴 하다”며 “나이가 많은 직원들이 입사했을 때의 습관을 못 버린 건데 젊은 직원들은 보기 불편할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국민 눈높이에서 어떤 재판이 좋은 재판인지를 생각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김명수 대법원장이 지난해 5월 전국법관대표회의에서 한 말이다. 법원노조 관계자는 말했다. “권위의식·엘리트의식이 팽배한 판사가 어떻게 국민들한테 신뢰받는 재판을 하겠어요? 일터에서 판사와 직원을 동등한 인격체로 대해야 국민 눈높이의 판결이 나올 수 있겠죠.”
유설희 기자 sorr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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