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이 추방, 쿠데타 체포.. 가열되는 동유럽 美-러 세력전
우크라·벨라루스서는 친미·친러 대리전
수감 러 野지도자 인권 놓고 직접 공방도
서구 국민은 러 백신 관광.. 뒤바뀐 東西
동유럽에서 벌어지는 미국과 러시아 간 세력 각축전이 날로 첨예해지고 있다. 올해 출범한 조 바이든 미 행정부가 권위주의 러시아 정권과의 이념 대립각을 날카롭게 세우면서다. 지금은 정권이 친미로 돌아선 옛소련 위성국들과 과거 주축국 러시아 사이에서는 스파이 줄추방ㆍ맞추방이, 독립한 예전 연방국 내에서는 친미ㆍ친러 대리전이 각각 주된 양상이다.
18일(현지시간) 외신에 따르면, 체코와 러시아는 전날과 이날 자국에 있는 상대국 외교관들을 무더기로 내쫓았다. 선공은 체코였다. 러시아 대외정보국(SRV)과 정찰총국(GRU) 소속 비밀요원들로 확인됐다며 자국 주재 러시아 외교관 18명을 축출했다. 체코가 러시아 외교관을 한꺼번에 10명 넘게 내보낸 것은 처음이라고 한다.
명분은 해당 외교관들이 7년 전 자국에서 일어난 폭발 사건에 연루된 간첩이라는 것이다. 러시아는 핑계로 여긴다. 실제 의도는 미국의 러시아 압박 동참이라는 게 러시아의 추측이다. “최근 미국의 대(對)러시아 제재 사태 와중에 체코 당국이 미국의 비위를 맞추려 대서양 너머 주인(미국)보다 한술을 더 떴다”고 비아냥대며 이날 체코 외교관 20명에게 19일이 지나기 전에 출국하라고 통보했다. 맞불을 놓은 것이다.
정황상 신호탄은 15일 이뤄진 미국의 러시아 외교관 10명 추방이었다. 러시아 기업과 정부 기관, 개인이 골고루 제재 명단에 추가됐는데 지난해 미 대선 개입, 대규모 해킹 등이 처벌 이유였다. 이튿날인 16일 노골적으로 미국과 연대한다며 폴란드가 자국 내 러시아 외교관 3명을 추방했고 같은 날 러시아는 미국과 같은 수의 자국 주재 미 외교관 추방으로 보복했다.
소비에트연방 시절 한 지붕 아래 살던 나라들에 드리운 러시아의 그림자는 더 짙다. 2014년 크림반도를 빼앗긴 우크라이나가 대표적이다. 이 나라 동부 돈바스 지역은 이후 7년 넘게 사실상 내전 중이다. 친러 성향 주민이 다수인 이 지역 반군이 크림반도가 러시아에 합병될 당시 친서방 정권에 맞서 분리ㆍ독립을 선언했기 때문이다. 이들의 뒷배가 러시아다.
이미 1만3,000명이 죽었지만 산발적이던 교전 분위기가 달라진 건 최근 들어서다.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 인근 국경으로 병력을 증강 배치하며 전면전 발발 우려가 커지고 있다. 16일 파리에서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과 회담한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이 우크라이나ㆍ러시아ㆍ독일ㆍ프랑스 4자 정상회의를 요청한 건 이런 배경에서다. 그러나 17일 러시아 연방보안국(FSB)이 기밀 입수 혐의로 우크라이나 영사를 추방하기로 결정하고, 우크라이나도 러시아 고위 외교관 추방으로 대응하며 오히려 긴장은 더 고조된 상태다.
벨라루스는 사정이 반대다. 이 나라와 러시아 보안당국이 공조해 친미 세력의 군사 쿠데타 모의 세력을 체포했다는 게 17일 러시아 타스통신 보도인데, 러시아와 자국 군부 등의 지원을 업고 30년 가까이 장기 집권 중인 이 나라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대통령은 체포된 이들이 미 정보기관과 연계된 듯하다고 주장했다.
이런 모략전과 달리 인권은 미ㆍ러가 직접 마찰하는 영역이다. 현재 교도소에 수감돼 있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최대 정적(政敵) 알렉세이 나발니가 당장 죽을지 모를 정도로 위독한 상태로 방치돼 있다는 소식에 제이크 설리번 미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이날 CNN방송 인터뷰에서 “나발니가 죽으면 대가가 있을 것”이라고 러시아를 상대로 근엄하게 경고한 건 미국이 선호하는 보편적 가치 관련 전선이어서다.
동유럽이 미국을 대신해 러시아와 맞서는 와중에 독일 등 서방 국민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백신 주사를 빨리 맞으려 러시아로 ‘백신 관광’을 떠나고 있다는 보도도 나온다. 냉전 당시 유럽의 동서 구도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풍경이다.
권경성 기자 ficcione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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