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본색2·천녀유혼 그린 왕년의 간판쟁이, 요즘은 벽화 그려요

서정원 2021. 4. 19.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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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극장 영화 전성기
간판그리던 이현수 씨 인터뷰
영웅본색2·천녀유혼 등 그려
사양길 접어들자 벽화로 바꿔
실제 같은 트릭아트 시장 개척
태국 등 해외미술관서 초청도
1980년대 영화간판을 그리던 이현수 씨가 지난해 평택 카페 `메인스트리트` 벽화 작업을 하면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영화 포스터가 요즘처럼 사진이 아니라 그림인 시절이 있었다. 인쇄술이 떨어지고, 수지타산이 맞지 않아 20년 전까지만 해도 '간판쟁이'가 그린 영화 홍보 간판들이 영화관을 장식했다. 영화의 특징을 기가 막히게 포착한 덕에 영화뿐 아니라 간판을 보는 재미로도 극장을 찾는 관객이 있었을 정도다. 풀컬러로 빳빳하게 인쇄된 영화 포스터가 나오는 시대, 그 옛날 간판을 그리던 사람들은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 1980년대부터 종로 단성사·영등포 명화극장 등에서 간판을 그리던 기술자 이현수 씨(60)를 최근 인터뷰했다.

"단성사에 있을 때 '터미네이터2' 간판을 그렸습니다. 또 'E.T' '사막의 라이온' 등 웬만큼 유명한 영화들도 한 번씩은 다 그려본 것 같네요."

이현수 씨가 그린 영화 `그 후로도 오랫동안`(1989) 간판.
서울미술고등학교를 졸업한 이씨는 1981년 광화문 국제극장에 들어가며 '간판쟁이' 커리어를 시작했다. 이후 단성사·국도극장·허리우드극장(현 실버영화관) 등을 거쳐 영등포 명화극장에서 미술부장까지 지냈다. 특히 '영웅본색2' '천녀유혼' 등이 절찬리에 상영되며 국내에서 홍콩 영화 바람이 불 때가 그의 전성기였다. 극장 일을 하니 영화도 맘껏 볼 수 있지 않았을까. 기자의 질문에 이씨는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리기 전에 스틸사진 등 영화 관련 자료가 미술부에 넘어옵니다. 그럼 저희들이 그걸 보고 포인트를 잡아서 그럴듯하게 작업하는 것이죠. 물론 보고 싶은 영화들이 있으면 간간이 보기도 했지요.(웃음)"

2000년대 초반 멀티플렉스가 들어서고 인쇄 포스터가 도입되며 영화간판 일은 사양길에 접어들었다. 이씨는 "여러모로 편리하고 합리적인 시대 흐름이었다"면서도 "일감이 없어져 많이 아쉬웠다"고 회고했다.

그를 비롯한 간판쟁이들은 이때부터 극장을 넘어 본격적으로 다른 곳에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아파트·공장·학교 등 건물 외벽을 장식해 도시 경관을 아름답게 만드는 '슈퍼그래픽' 분야로 많은 사람들이 진출했다. 이씨는 "영화 간판을 그린 게 많이 도움이 됐다"고 강조했다. 슈퍼그래픽은 그려야 하는 규모가 매우 큰데(super) 크게는 가로 20m·세로 5m 대형 간판을 동료들과 함께 작업한 경험 덕분에 적응하는 데 어렵지 않았다는 설명이다. 또 이씨는 "사실적으로 인물을 묘사하는 연습을 반복하며 기본을 닦을 수 있었다"고도 했다. 이씨는 그중에서도 트릭 아트(trick art)에 집중했다. 착시 현상 등을 활용해 입체적으로 보이거나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그림들을 통칭하는 장르로, 2010년대 초반 특히 각광받았다. 인도네시아·베트남·태국·라오스·호주 등 각국 미술관에서 초청하며 트릭아트 벽화를 의뢰한 통에 간판쟁이 때만큼이나 바쁜 하루를 보냈다고 한다. 국내에서는 여수 예술랜드·인천 사일로 슈퍼그래픽 등에 관여했다. 최근 문을 열어 벌써부터 사람들 입소문을 탄 평택의 카페 '메인스트리트' 외벽도 그의 작품이다. 미국 뉴욕의 거리 풍경을 대형 벽화로 그대로 옮겼다.

이씨에게 그림은 천직이다. 일하면서 힘들고 짜증 날 때도 있고, 벌이가 쏠쏠하지도 않지만 그래도 그림 작업 할 때가 가장 좋다고 한다. 언제까지 그림을 그리고 싶은지 물으니 그는 "우리 쪽에선 일흔 살 넘어서까지 현장에 계시는 분들도 있다"며 "힘이 닿는 데까지 하고 싶다"고 답하며 웃었다.

"돈도 돈이지만 사람이 일하는 즐거움이 있지 않습니까. 할 수 있을 때까지는 해보려고 합니다. '작품'이라고 하기엔 민망하지만 한두 점씩 제가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려볼까 합니다."

[서정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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