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얀마의 밤, 매일 8시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미얀마 언론인들과의 대화는 오전 11시30분쯤 재개되었다. 현지 시각 새벽 1시부터 오전 9시까지 인터넷이 끊기기 때문이다. 인터넷이 연결되면 이들은 피와 연기가 뒤덮인 사진 수십 장을 보내며 “이 뉴스를 한국에 꼭 전해달라”고 말했다. 군부의 언론 통제로 미얀마에는 독립적으로 신문을 발행하는 곳이 모두 사라졌다(〈시사IN〉 제707호 “PRESS 쓰인 조끼 입으면 더 위험하다” 기사 참조).
〈시사IN〉은 미얀마 언론인들과 지속적으로 연대할 방법을 찾았다. 첫 번째로 현지 기자들이 보내온 기사와 사진을 차례로 연재한다. 미얀마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국제사회가 움직여야 하고, 국제사회가 움직이기 위해서는 미얀마의 참상이 계속 알려져야 하기 때문이다. 또 두 달째 수입 없이 버티는 기자들에게, 이 원고료가 취재 활동을 이어갈 수 있는 작은 동력이 되길 바랐다.
1993년 미얀마 기자들이 타이로 망명해 설립한 〈이라와디〉는 군부 탄압 현실을 보도해온 비영리 매체다. 이번 반쿠데타 시위 국면에서도 이 매체는 군부로부터 ‘가짜뉴스를 유포했다’는 혐의로 고소당했다. 〈이라와디(Irrawaddy Media)〉 사진기자인 조 조 씨는 이에 대해 “군부가 기자를 억압하는 이유는 진실이 국제사회에서 그들을 난처하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지난 두 달간 시위 현장에서 그가 경험한 미얀마 현실에 대해 미얀마어로 쓴 글을 보내왔다. ‘행동하는 미얀마 청년연대’ 활동가 웨 느웨 흐닌 소 씨가 번역했다.
지난 2월1일 새벽 4시쯤,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소식이었다. 2분 후 또다시 전화가 울렸다. 모든 일이 격변할 것이라는 사실을 그때는 몰랐다. 아침 6시, 모든 통신사 인터넷이 차단되었고 나는 상황을 알아보러 거리로 나섰다. 모두 심각한 표정이었다. 한 집에서 텔레비전 소리가 크게 나오자 사람들이 가던 길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국영방송 미야와디(MWD)에서 “2020년 선거가 부정선거이며 국가고문인 아웅산 수치와 주요 인사들을 구금했다”라는 뉴스가 나왔다. 군부는 1년간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미얀마에서 벌어진 네 번째 쿠데타다. 세 번째 쿠데타는 1988년 9월18일 국방장관 소 마웅이 일으켰다. 당시 대규모 반독재 시위였던 ‘8888 항쟁’을 무력으로 진압해 3000여 명이 희생되었다. 태풍이 오기 전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하는 동물처럼 나는 심각한 일이 벌어질 것을 예감했다.
2월1일 밤 8시, 내가 사는 만달레이 도시 전체에서 통을 두드리는 소리와 자동차 경적 소리가 계속 울렸다. 옛날부터 민가로 내려온 야생동물을 내쫓을 때 통을 두드리는 풍습이 있었는데 이제는 ‘악귀를 물리친다’는 의미로 쓰인다. 사실 이 시위는 만달레이에서만 일어난 일이 아니다. 미얀마 전역에서 군부 쿠데타에 반대하는 의미로 물통과 기름통, 냄비를 마구 두드렸다. 이튿날인 2월2일, 국립병원 의료진들이 파업을 시작했다. 노동자들도 국영 건설현장에서 작업을 하지 않겠다고, 교사들도 수업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미얀마 시민불복종운동(CDM)은 그렇게 시작됐다.
군부는 CDM을 통제하는 데 모든 수단과 방법을 사용했다. 야간 통금 시간을 제한하고 CDM에 참여하는 공무원을 체포했다. 그럼에도 시민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의지는 갈수록 강해져만 갔다. 매일 밤 8시가 되면 냄비를 두드리거나 집집마다 민중가요를 크게 틀었다. 시위에 참여하지 못하는 이들은 시위대가 먹을 음식을 날마다 제공해주었고 파업 중인 공무원들을 돕기 위한 생활비 모금이 진행되었다.
지난 두 달간 기자들의 일상도 완전히 뒤바뀌었다. 2월3일 가두시위를 시작한 후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주말도 빠지지 않고 취재가 이어졌다. 낮에는 시위대를 따라다녔고 밤에는 체포당한 이들의 정보를 수집했다. 불안감은 커졌다. 항쟁의 강도가 높아질 때 어떻게 안전을 확보할지, 인터넷이 끊길 때를 대비해 무엇을 준비해야 할지 기자들끼리 만나 논의했다. 군부의 본모습이 드러난 건 2월9일이었다. 행정도시 네피도에서 19세 여학생 카인이 머리에 총을 맞아 사망한 것이다.
이는 기자들에게도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위험이 내 일상까지 따라왔다는 뜻이다. 당시 기자들은 ‘PRESS’가 쓰인 헬멧, 조끼, 기자증을 착용해야 했다. 어느 순간부터 군경은 온갖 욕설과 총으로 기자들을 위협했고 ‘PRESS’ 글자를 조준사격했다. 야간에 기자가 머무르는 집을 향해 총을 쏘고, 기자를 체포하는 것을 내 눈으로 보았다. 이제 거리에서 ‘PRESS’ 헬멧을 쓴 기자를 볼 수 없다. 동료 기자는 손에 총상을 입어 수술을 받았다. 나 역시 체포와 실탄을 피해 아슬아슬하게 도망쳐야 했다.
60일 동안 바뀌지 않는 장면, 시민들
3월11일 내가 일하는 〈이라와디〉가 기소되었다. 형법 제505조(a) ‘가짜뉴스로 국가 명예를 훼손했다’는 혐의였다. 군부가 CDM에 참여한 의사 70여 명을 잡아간 뒤 보석금으로 1300만 짯(약 1044만원)을 요구했다는 사실을 보도한 직후였다. 사람들의 반발이 거세지자 군부는 결국 의사들을 모두 풀어주었다. 하지만 군부는 쿠데타 이후 형법 제505조의 징역 형량을 2년에서 3년으로 늘리면서 기자들을 압박하고 있다.
자유로운 취재는 말할 것도 없고 밖에 나가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나의 일상은 아침부터 밤까지 위협당한다. 어디를 가든지 ‘누가 나를 감시하고 있지는 않나?’ ‘어젯밤에 우리 집에 누가 찾아오지는 않았나?’ 하는 생각 때문에 한곳에 오래 머물 수 없다. 숨어 있는 곳에서 빠져나와야 하는데 최근에는 군경이 지키고 있어 아예 못 나가는 날도 잦다. 주변인들에게도 내가 어디서 뭘 하는지 알리지 못했다.
미얀마 국영방송은 이런 현실을 보도하지 않는다. TV를 켜면 시위대가 돌을 던져 경찰이 다쳤다는 뉴스가 도배되거나 아웅산 수치가 뇌물을 챙겼다는 이야기만 수두룩하다. 군부는 나라가 다시 평화로워지기 시작했다는 둥, 미얀마 내에서 벌어지는 일이니 내정간섭하지 말라는 둥 과거 독재정권이 했던 방식을 답습한다. 국제사회의 제재를 지연시키기 위해 ‘그들만의 뉴스’로 진실을 덮고 있는 셈이다. 지금 미얀마는 매일같이 사람들이 실탄에 맞아 사망한다. 4월6일 현재 희생자는 500명이 넘었고 이 중 미성년자는 40명이 넘는다. 영정사진을 끌어안은 유가족의 눈물을 눈앞에서 겪고 있는 기자들의 삶은 지옥과 다름없다. 목 놓아 우는 소리가 환청처럼 들린다. 기자들은 심신이 지쳐가고 있다.
그럼에도 쿠데타 이후 60일 동안 바뀌지 않는 장면이 하나 있다. 바로 시민들이다. 지금 미얀마 시위는 지도자가 없다. 군경의 탄압을 피해 다 같이 모여 침묵하거나, 쓰레기를 버리고 또 길목을 막는 방식으로 저항운동을 이어간다. 지난 60일 동안 ‘통 두드리는 소리’는 하루도 빠짐없이 들렸다. 날아오는 총탄을 방어할 수 있는 무기는 없다. 시민들은 부엌에 있는 프라이팬을 뒤집어쓰거나 강화섬유로 된 물탱크를 잘라 방패를 만든다. 거리를 행진하며 목이 터져라 ‘반쿠데타’를 외친다.
자기 몸을 겨우 방어하면서도 쓰러져가는 사람을 구하려는 시민들을 본다. 총칼을 든 군경 앞에서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시민들을 본다. 미얀마에서는 지금, 수많은 시민들이 민주주의를 위해 인생을 내걸고 싸우고 있다. 너무 큰 희생이 따르고 있다. 이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전 세계에서 미얀마의 진실을 내보내주길 바란다. 미얀마는 그 어느 때보다 세계의 도움이 절실하다. 매일 이런 광경을 기록하고 있는 기자로서 이 말을 꼭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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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조 (<이라와디> 사진기자)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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