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득권 아닌 또래여성 치는 '이남자' 프레임..'원한의 정치' 올라탄 정치권
“102030 나의 동지들!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오늘을 잊지 않겠습니다.”(4월7일 하태경 의원 페이스북)
“4년간의 노력이...오늘 와이리좋노....” (이준석 전 최고위원 댓글)
4·7 보궐선거 지상파 3사 출구조사 결과가 나온 직후 국민의힘 하태경 의원과 이준석 전 최고위원은 20대 남성 추정 지지율 72.5%에 감격했다. 더이상 20대도, 청년도 아닌 두 정치인은 급진적 페미니즘으로 각종 역차별 피해에 시달려온 ‘이남자’(20대 남자)를 위해 헌신해왔다고 주장한다. 이들에게 이번 보궐선거 결과는 수년에 걸친 ‘이남자 피해호소 정치’가 마침내 맺게 된 결실인 셈이다.
정치권에선 이번 보궐선거에서 드러난 20대 남성 표심이 왜 국민의힘을 향했는지를 두고 각종 분석이 난무한다. 하지만 정작 이들의 ‘이남자 정치’가 실체가 있는 것인지에 대한 분석은 드물다. 학계와 여성계에서는 이들의 정치가 페미니즘에 반감을 가진 일부 20대 남성의 역차별 정서를 자극하는 레토릭만 있을 뿐 실제로 청년의 삶을 개선하기 위한 정책적 대안 등 내용은 없다는 점을 지적한다. 나아가 20대 남성이 겪는 사회·경제적 곤경의 원인을 페미니즘이나 20대 여성에게 돌리는 프레임이 젠더 갈등을 위험한 방식으로 격화시킬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 2018년 워마드 겨냥하며 시작…역차별 프레임 전면 내세워
두 정치인이 페미니즘과의 ‘전쟁’을 시작한 것은 2018년 급진적 페미니즘을 내세운 워마드 논쟁 때부터다. 하태경 의원은 2018년 8월 워마드에 남성을 몰래 찍은 불법촬영 사진이 올라온 사건이, 이준석 전 최고의원은 그해 11월 벌어진 이수역 폭행사건이 이남자 표심 공략의 시작이 됐다.
당시 거대 양당 사이에서 좀처럼 지지율이 오르지 않던 바른미래당 소속이었던 두 정치인은 ‘역차별을 느끼는 2030 남성’을 발굴되지 않은 표밭으로 보고 젠더갈등 이슈에 대해 적극적으로 발언하기 시작된다. 손희정 문화평론가는 “2010년 이후 한국사회에 등장한 ‘내가 피해자’라고 말하는 남성을 정치세력화하겠다는 기획인데, 남성의 ‘정체성 정치’라는 측면에서 세계적으로도 특이한 케이스”라고 짚었다.
두 정치인은 주로 “급진 페미니즘의 득세로 중장년층과 달리 성별에 따른 우위를 경험하지 못한 2030 남성들이 오히려 역차별을 당하고 있다”라는 역차별 프레임을 내세웠다. 여기서 남녀갈등을 부추기고 2030 남성의 ‘파이’를 빼앗는 것으로 지목된 대상은 급진 페미니즘 세력이고, 더불어민주당은 이러한 급진 페미니즘에 휘둘리는 정당으로 규정되었다. 하태경 의원은 워마드 폐쇄법·알페스 처벌법 등을 발의하며 급진 페미니즘을 겨냥한 입법에 나섰다. 원외인 이준석 전 최고위원은 주로 토론회나 페이스북 등에서 보조를 맞췄다.
이 전 최고위원은 이번 선거국면에서 성차별적 구조 자체를 부인하는 수준으로 나아가기도 했다. 오세훈 서울시장 후보 캠프 뉴미디어본부장이었던 이 전 최고위원은 지난 보궐선거 기간 청년단체로부터 성평등 정책에 대한 공개질의를 받자 이런 글을 페이스북에 올렸다.
“답정너에 답하지 않겠습니다. 안전, 자살, 디지털 성범죄에 대해서 남녀구분이 필요한게 뭡니까. 제발 시대착오적인 페미니즘 강요하지 마십시오.”
“남성 자살자가 여성 자살자보다 많”고 “남성의 디지털 성범죄 피해도 빠르게 증가”하고 있기 때문에 이들 문제가 더 이상 젠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최근 20대 여성 자살률이 다른 성별과 세대를 압도하며 빠르게 늘고있다는 점, 디지털 성범죄 피해의 대다수가 미성년자 여성이라는 점을 의도적으로 누락한 주장이다.
■ “페미니즘 반감 이용한 레토릭일뿐 내용이 없다”
전문가들은 이들이 ‘성차별은 이미 사라졌고 역차별로 가고 있다’는 주장을 반복하면서도 청년 문제 해결을 위한 구체적 정책에 대해 침묵하는 것에 주목한다. 페미니즘에 반감을 가진 남성 청년 표를 모으기 위한 레토릭만 있고 정작 내용이 없다는 것이다.
권김현영 여성현실연구소 소장은 “책임있는 정치인이라면 청년 자살률 문제, 디지털 성범죄에 대해 ‘젠더 문제가 아니다’라고 단언하는 것으로 끝낼 게 아니라, 남녀 청년 모두가 직면한 문제에 대해 어떤 정책적 대안을 갖고 있는지 이야기하는 게 순서일 것이다. 하지만 이 전 최고위원은 문제제기 자체를 무화하는 데서 멈춘다. 정치가적 태도가 아닌 평론가적 태도”라고 말했다. 하 의원과 이 전 최고위원이 지난 4년간 벌인 청년정치가 급진 페미니즘을 겨냥한 일부 입법 외에는 논평적 활동이 거의 대부분이었던 것을 꼬집은 지적이다.
하 의원이 병사들의 휴대전화 사용에 ‘당나라 군대 된다’고 비판했다가 사과한 일은 이들 정치의 한계를 보여주는 사례다. 하 의원은 2019년 1월 국방부의 ‘병사 일과 후 휴대폰 사용 방침’에 대해 “저녁과 주말은 폰게임으로 날밤 새울 것” “군대가 너무 편해 밖에서와 다를 게 없어지면 군 복무는 정말 허송세월, 인생낭비”라고 논평했다. 이후 20대 남성들 사이에서 ‘군 복무 현실을 모른다’는 비판이 이어지자 “욱해서 실수했다”며 사과의 글을 올렸다. 손희정 평론가는 “20대 남성들을 위한 정치를 하겠다고 목소리를 높이지만, 정작 그 또래들이 직면하는 가장 큰 곤경인 군내 인권 문제에 대해서는 기본적인 공부도 되어있지 않다는 게 드러난 사건”이라고 했다.
■ 이남자 사회·경제적 곤경이 페미니즘 탓?…‘원한의 정치’ 우려도
이준석·하태경식 젠더 갈등 프레임이 청년들이 당면한 사회·경제적 문제 해결을 위한 논의의 장 자체를 왜곡한다는 분석도 나온다.
서복경 서강대 현대정치연구소 책임연구원은 “20대 청년들이 코로나로 인한 경제위기, 특히 남성의 경우 군 문제로 인한 (취업) 이행지연으로 고통받는 것은 팩트다. 하지만 이러한 사회·경제적 문제를 20대 여성이 야기한 것이 아니다. 시장구조의 급격한 변동으로 인한 일자리 축소와, 그걸 못 쫓아가는 교육시스템 문제, 정책적 지원 미비 등이 총체적으로 발현된 것”이라고 말했다. 20대 남성 청년들이 당면한 문제의 원인을 페미니즘으로 돌리는 프레임이 사회·경제적 문제에 대한 정밀한 분석을 가로막는다는 것이다.
이들의 청년정치를 20대간 갈등을 이용하는 ‘원한의 정치’ 일종으로 보고 그 위험성을 경고하는 목소리도 있다. 신경아 한림대 사회학과 교수는 독일의 철학자 니체의 말을 빌려 이들이 펼치는 정치가 ‘르상티망(‘원한’의 프랑스어) 정치’의 일종이라고 봤다.
신 교수는 “특정집단이 경험하는 좌절과 실패의 원인을 제대로 분석하지 않고 희생양 집단을 만들어서 거기에 투사하는 정치, 희생양 집단을 끊임없이 미워하게 하면서 특정집단을 응집하고 강화하는 정치를 ‘원한의 정치’라고 부른다. (이준석 발언 등에서) 이런 원한의 정치 초기적 양상이 보인다”고 했다.
20대 남성이 경험하는 사회·경제적 실패 원인을 성평등 정책으로 수혜를 입는 20대 여성이라는 가상의 적에게 투사함으로써 20대 남성의 표를 조직화하는 방식의 정치를 이들이 펼치고 있다는 분석이다. 신 교수는 “당장은 표가 모여 좋을지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사회적으로 굉장히 위험하고 폭력적인 형태로 나아갈 수 있다”며 “희생양 집단이 된 20대 여성들도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 아닌가”라고 우려했다.
■ 민주당 일각 “여성 우대 기조 버려야”…“여성 우대한 적 있나?” 반문
일부 민주당 의원들은 이준석 전 최고위원 등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여 “민주당의 여성우대 정책 기조가 선거 패배요인”이라는 분석까지 내놓기 시작했다
당내 선거 리뷰모임에서 한 재선의원은 “4·7 재보궐 선거에서 우리가 20대 남성의 지지율을 잃은 건 페미니즘 때문”이라고 말했다고 한다.(4월14일치 <한국일보>) 청년 당사자로 당 대표에 출마하겠다는 정한도 민주당 용인시의원은 “젠더와 관련해 여성우대 정책 기조를 바꿔야 한다. 남성도 약자이고 피해자”라고 했다. 2019년 20대 남성 지지율 하락요인이 “문재인 정부의 ‘친여성’ 정책 기조에 대한 불만의 표시” “페미니즘 편향적 교육 내용을 전반적으로 점검”하자고 했던 대통령 직속 정책기획위원회 현안보고서 논리의 재탕인 셈이다.
정작 민주당이 여성우대 정책을 펴왔는지에 대해서는 내부에서도 이견이 나온다. 박성민 전 민주당 최고위원은 16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민주당이 여성정책에 올인해 졌다’는 주장을 “게으르고 손쉬운 분석”이라고 했다. “지자체장 성비위 사건에 대한 미흡한 당의 대처를 비롯해 지지부진한 여성안전과 관련된 법안 통과 과정,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성 발언으로 드러난 성인지 감수성 부족” 등이 여성정책 올인 패배라는 전제가 틀렸다는 것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 “소수자·약자에 원인 돌리는 정치권, 약자끼리 칼 겨누게 해”
젠더정치연구소 여·세·연은 16일 낸 논평에서 “선거의 결과를 젠더 갈등으로 해석하는 것은 청년의 삶을 어렵게 하는 구조의 문제를 덮으려는 시도”이며, 이러한 그릇된 프레임이 “청년의 몫을 앗아가고, 소수자와 약자에게 원인을 돌리도록 하고, 결국 구조에서 배제된 사람들끼리 서로 칼을 겨누게 한다”고 했다. 이남자 피해호소 정치는 청년이 당면한 사회·경제적 구조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는 정치권의 무능을 가리기 위한 가짜 프레임에 가깝다는 지적이다.
다음 대선을 노리는 제1 야당이 추동하고, 수세에 몰린 여당 일부가 따라가는 공적 영역에서의 퇴행적 젠더 갈등 정치의 문제는 또 다른 신호로도 작용한다. 일상에서 성차별적 언행을 하더라도 ‘괜찮다’는 신호로 받아들여 질 수 있으며, 성차별적 언행을 스스로 ‘검열’하는 심리적 경계가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이다.
최근 서울시 자살예방센터가 20대 여성 대상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사실이 알려지자 이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혐오 발언을 담은 게시물을 센터 누리집에 무더기로 올렸다. 지난 13일 편의점 지에스(GS)25의 한 점주는 “페미니스트가 아닌자”라는 성차별 채용 공고를 내기도 했다.
이름 밝히길 꺼린 한 여성학자는 “곧 한국사회도 혐오 발언을 정상적이며 일상적인 것으로 만들어 냈으며, 그 효력이 여전한 트럼프같은 인물이 대거 등장하는 상황에 부닥칠 수 있다”고 했다.
임재우 기자 abbad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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