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흔적에서 교훈으로]서청 제주본부· 제주신보사 안내판도 없어

제주CBS 류도성 아나운서 2021. 4. 19. 12:00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한반도 서북지역, 평안도 & 황해도 & 함경도지역 사람들이 결성한 단체
1946년 11월 30일 서울에서 결성, 좌익에 대한 적개심 많아
1947년 총파업 이후 응원경찰과 서청이 같이 제주도 입도
'제주는 빨갱이 섬'이라고 교육받아 도민을 죽이는 것은 죄가 아니라 생각
4.3발발 이후 토벌을 위해 서청이 대거 제주 입도, 수많은 악행 저질러
서북청년단 제주본부 옛터와 제주신보사에 대한 유적지 관리 필요

제주에는 4.3유적지를 비롯해 수많은 다크투어 유적지가 존재한다. 제주는 대한민국의 대표 관광지이지만 제주를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과거에 대한 제대로 된 기억의 전승이 우선 필요하다. 제주CBS <시사매거진 제주>는 사단법인 제주다크투어와 함께 제주에 존재하는 다크투어 유적지가 잘 보전되고 정확하게 안내가 되고 있는지 역사적 사건과 함께 짚어보는 시간을 가져본다. 방송은 매주 토요일 오후 5시 5분부터 방송되며, 노컷뉴스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사단법인 제주다크투어 양성주 대표. 사단법인 제주다크투어 제공

■ 방송 : CBS 라디오 <시사매거진 제주> FM 제주시 93.3MHz, 서귀포 90.9MHz (17:05∼18:00)
■ 방송일시 : 2021년 4월 17일(토) 오후 5시 5분
■ 진행자 : 류도성 아나운서
■ 대담자 : (사)제주다크투어 양성주 대표

◇류도성> 오늘 소개해주실 유적지는 어디인가요?

◆양성주> 오늘은 서북청년단 이야기와 서북청년단과 관련된 유적지 얘기를 할까 합니다.

◇류도성> 서북청년단이라면 지난 시간 몇 차례 언급하셨던 ‘서청’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양성주> 그렇습니다. 4·3의 발발부터 전개과정에 있어서 서북청년단 이야기를 절대 빼놓을 수 없습니다. 제주도민들에게 서청이 끼친 악행은 그만큼 컸고, 이북말을 쓰는 사람에 대한 공포감이 컸다고 할 수 있습니다.

◇류도성> 서북청년단이라면 어떤 조직이었나요?

◆양성주> 남과 북이 나뉘는 시기에 한반도의 서북지역 즉, 평안도, 황해도, 함경도 지역 사람들이 남한지역으로 내려와 결성한 단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서북청년단은 이북출신 청년단체가 통합해서 1946년 11월 30일 서울에서 결성됐고, 이 조직의 구성원들은 소련과 조선공산당에 대한 불만을 품고 북에서 피난 온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좌익에 대한 적개심이 엄청났습니다.

소련이 진주했던 북한지역에서는 친일파 청산과 지주의 토지를 몰수했기 때문에 그에 대한 불만을 가지고 남한으로 내려온 사람들이라 공산당에 대해 엄청난 원한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좌익세력을 배척하고자 했던 이승만과 미군정은 이런 서북청년회의 성향을 잘 이용했던 것입니다.

◇류도성> 제주4·3을 설명하는 데 있어 서청을 빼놓고 설명할 수 없겠네요?

◆양성주> 맞습니다. 무장봉기의 주요인 중 하나도 서청의 탄압에 대한 저항이었습니다. 무장세력을 진압하기 위한 과정에서 엄청난 수의 서청단원이 제주로 내려와 진압에 참여했고 서청으로 인한 주민의 피해는 그 규모와 잔혹함을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류도성> 좌익에 대한 적개심이 엄청났다면 이들에 의해 제주도민들의 피해가 상당했을 것 같은데요?

◆양성주> 그렇습니다. 이들은 권력은 부여 받았지만 급료를 따로 받지 않았습니다. 그냥 현지에서 알아서 해결하는 식으로 내버려 뒀던 거죠.

서청단원들은 이북에서 급히 도망쳐 나와 빈털터리가 된 경우가 많았고,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해 태극기나 이승만 사진 등을 들고 다니며 반강압적으로 파는 단원들도 있었습니다. 당시 제주도는 공공질서가 제대로 잡혀있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들은 약탈, 갈취, 폭행 등을 무수히 일삼았습니다.

◇류도성> 서북청년단이 본격적으로 제주에 들어오게 된 시기가 3·1사건 이후라면서요?

◆양성주> 1947년 3·1사건 발생 후, 3·10총파업으로 제주도민들 대부분이 파업에 참여하고 심지어는 경찰관들도 사직서를 제출하는 상황이 발생합니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당시 미군정 경무부장 조병옥은 제주도에 와서 연설합니다. 당시 도청에서 공무원들을 다 불러 놓고 사상이 불온하거나 건국에 저해된다면 싹 쓸어버릴 수도 있다는 취지의 발언을 합니다.

◇류도성> 당시 제주도민들이 원했던 건 주민들에게 발포한 사건에 대해 진상규명을 원했던 것 아닌가요?

◆양성주> 그렇습니다. 당시 미군정은 3·1절 발포사건 때 경찰의 행위를 덮어두려고만 했고 오히려 좌파세력 척결에 주력하는 정책을 펴갔습니다.

제주도민들이 원했던 건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과 책임자처벌이었는데 미군정은 이에 대한 대응책으로 제주를 빨갱이 섬으로 규정하고 빨갱이 소탕이라는 명분으로 응원경찰을 급파하게 됩니다. 이 시기에 서북청년단이 입도하게 되면서 제주도민을 탄압하게 됩니다.

◇류도성> 제주도 상황에서 미루어 봤을 때 서청단원을 데리고 왔다는 것은 제주도민들의 민심을 자극했을 같네요?

◆양성주> 그렇습니다. 당시 3·10총파업으로 인한 치안 공백을 메우기 위해 응원 경찰과 서청 단원들이 그 자리를 채우기 시작합니다. 이들은 아무런 급료도 없이 제주도로 보내졌기 때문에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제주도민을 약탈했구요.

‘제주는 빨갱이 섬’이라고 교육받아 제주도민을 죽이는 것은 죄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박경훈 제주도지사가 총파업의 책임을 지고 사임하고, 후임으로 유해진 지사가 도지사로 부임하게 되면서 서청 단원 7명을 데리고 오게 됩니다.

서북청년단 제주도본부 옛터 현재 모습. 사단법인 제주다크투어 제공

◇류도성>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서청이 제주도로 입도하게 된 건가요?

◆양성주> 그렇습니다. 유해진 도지사는 총파업에 가담한 관리들을 파직시키고 공직사회의 빈자리를 이북출신으로 채워나갔습니다. 정식으로 제주에서 서북청년회지부가 결성된 것은 1947년 11월입니다.

서청이 제주에 들어오게 된 경위를 3가지 정도로 분류할 수 있다고 하는데요. 그 중 하나가 유해진 도지사가 호위병으로 서청 단원을 활용한 것을 시작으로 4·3 발발 직전까지로 대략 500명 ∼ 700명 정도의 서청단원이 제주에 들어왔습니다. 이 시기에 서청단원에 밉보인 사람들이 나중에 큰 피해를 보게 됩니다.

◇류도성> 경찰을 도우면서도 보수가 없었던 건가요?

◆양성주> 일정한 보수가 없었기 때문에 주민들에게 민폐를 많이 끼쳤고 백색테러에 자주 동원이 되었기 때문에 서청에 대한 원성이 자자했던 것입니다.

죄가 있든 없든 일단 잡아들여서 고문과 매질을 일삼았고 주민들은 그 사람을 구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금품을 제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하지 못하면 죽어 나갔고 빨갱이 낙인이 찍히게 되었던 것입니다.

◇류도성> 또 언제 서청이 제주로 들어오게 되나요?

◆양성주> 두 번째로 서청이 제주를 들어오게 된 때는 4·3 발발 직후입니다. 경무부장 조병옥의 요청으로 제주도 사태를 진압하기 위해 서청 단원 500명을 급파해 사태진압에 투입 시켰습니다.

세 번째는 여순사건 이후에 대거 제주로 들어오게 되는데 군인과 경찰이 서청 판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서청이 활보할 수 있었던 것은 배후에 이승만이 있었고, 이를 미군이 암묵적으로 동의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미군정 보고서를 통해 이 내용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류도성> 날이 갈수록 서청의 위세가 등등해지면서 제주도민에게 서청은 악몽의 그림자였겠네요?

◆양성주> 그렇습니다. 4·3 발발 이전부터 미군정은 제주도를 ‘붉은 섬’으로 지목하여 응원경찰을 파견하고 서북청년회와 함께 빨갱이 사냥을 구실로 테러를 일삼았습니다.

지난 시간에 1948년 4월 3일 남로당이 무장봉기를 했던 이유는 단선·단정 반대뿐만 아니라 경찰과 우익단체의 탄압에 대한 저항으로 봉기를 일으켰다고 했었는데요. 이때의 대표적인 우익단체가 서북청년회입니다.

◇류도성> 서북청년회가 막강한 권력을 휘두를 수 있었던 건 미군정이 배후에 있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겠네요?

◆양성주> 특히 미군정 경무부장 조병옥은 서청의 육성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했습니다. 좌우 단체의 극심한 대립으로 충돌이 잦아졌을 때 미군정은 좌익조직에 해산명령을 내리면서 서청에게도 똑같이 해산명령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조병옥은 서청은 해산시킬 수 없다고 강력히 주장하였고 미군정은 이를 받아들여서 서청의 존속을 묵인했습니다.

◇류도성> 서북청년단이 4·3 발발 이전부터 파견되었다고 하셨는데, 4·3 발발 이후에는 그 숫자가 더욱 늘어났겠네요?

◆양성주> 그렇습니다. 4·3이 발발하기까지 들어온 서청의 수는 760여 명으로 추산하고 있습니다. 1948년 4월 6일 조병옥은 서북청년단 문봉제 위원에게 “반공정신이 투철한 사람들로 500명을 보내 달라.”며 서청단원의 파견을 요청했습니다. 이후에도 서청은 계속 투입되어 그 수가 상당했습니다.

◇류도성> 4·3 발발 후 진압 당국이 강경한 작전을 펼쳤을 때, 서청을 어떻게 활용했나요?

◆양성주> 서청은 전위에 서서 군경 못지않은 역할을 했습니다. 이승만과 미군정은 서청을 군경에 편입시키면서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습니다.

◇류도성> 미군정이 결국 서청을 이용해서 강력한 토벌을 진행했다고 볼 수 있겠네요?

◆양성주> 그렇습니다. 미군정의 보고서에 따르면 4·3 발발 직후 무장대의 인원은 500명 안팎이었습니다. 하지만 군정 당국은 무장세력을 토벌하기 위해 1,700여 명의 응원경찰, 500여 명의 서청 단원들을 제주도에 배치했습니다. 또한 육지에 있는 대대를 추가 파병하기도 했습니다.

◇류도성> 서청이 날이 갈수록 그 위세를 떨쳤을 것 같은데요?

◆양성주> 당시 제주도청 총무국장이었던 김두현의 고문치사는 서청의 위세를 말해줍니다.

◇류도성> 도청 총무국장이 고문치사 당했다고요?

◆양성주> 당시 제주도청 총무국장은 행정의 2인자로 실세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보급품을 담당하는 총무국장 김두현에 대해 보급품 지급에 대해 불만을 품고 서청 사무실에서 심한 매질을 해서 죽게 했습니다.

이 사건에 대하여 미군정이나 당시 9연대 수사관의 대처는 미온적이었습니다. 공산주의자를 처형했다는 말 한마디면 별문제가 되지 않았던 겁니다. 살인에 가담한 서청단원은 처벌을 받기는커녕 오히려 군에 입대하는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했다고 합니다. 이런 지경이니 일반 주민의 목숨 하나쯤은 아무렇지도 않게 여겼던 것입니다.

◇류도성> 서북청년회의 악행은 끝이 없었네요?

◆양성주> 서청의 만행은 너무도 잔혹했고, 셀 수조차 없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그 모든 걸 말로 다 설명할 수 없습니다. 진짜 ‘상상 그 이상’이라는 표현이 딱 맞는 것 같습니다.

4·3 당시 외도지서에는 경찰관 전원이 서청 단원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그 잔인함을 알 수 있는 게, 4.19 후 국회차원에서 벌인 ‘양민학살사건 진상조사’에서 제주도 고발1호로 기록되기도 했습니다. 당시 고발장에 따르면 생후 10일밖에 되지 않은 영아부터 67세의 노인까지 일가족 10명을 뚜렷한 이유도 없이 죽창으로 살인했다고 합니다.

저번 시간에 소개해 드렸던 삼양지서에도 서청 출신 경찰들이 근무하고 있었는데요. 삼양지서 정용철 주임이 아녀자에게 저질렀던 악행과 살인행위 또한 입에 담을 수 없는 반인륜적인 범죄행위라 할 것입니다.

◇류도성> 제주 군인과 경찰의 빈자리를 서청 단원들이 다 채웠다면서요?

◆양성주> 강경 진압이 진행되면서 제주 출신 경찰과 군인들은 무시되거나 배제됐습니다. 1948년 말에는 서청으로 편성된 200명 경찰부대가 편성되기도 하였고 토벌 책임자였던 송요찬 9연대장은 군대에 서청으로 구성된 특별중대를 만들었습니다.

계급장도 없는 군인도 아닌 군인이었지만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 민간인이었다가 군인이 된 어떤 서청단원의 얘기에 따르면 송요찬 연대장은 9연대 장교와 헌병에게 특별중대 서청은 건들지 말라고 지시했다고 합니다.

◇류도성> 서청에 대한 이승만 정부와 미군정의 지원이 대단했군요?

◆양성주> 이승만에게 서청은 신뢰할 수 있는 토벌대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토벌을 담당했던 9연대에 이어 2연대에서도 서청은 제일 큰 비중을 차지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좌익에 대한 적개심이 가득한 서청에게 제주는 빨갱이 섬이라고 주입 시키고 토벌의 선봉에 나서게 한 것이죠.

◇류도성> 서청의 역할에 대해 어떻게 말하고 싶으세요?

◆양성주> 제주4·3평화공원 전시관에는 서청 출신 경찰관이 자신들도 이승만에게 속아 토벌에 나섰다고 증언하는 영상자료가 있습니다. 서청이 이승만과 미군정의 정치적 도구로 이용당했다고 해서 서청이 저지른 악행을 정당방위로 해석할 순 없겠지요.

서청의 악행은 제주도민들을 몸서리치게 했고 그들이 저질렀던 반인륜적 범죄행위는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서청 단원들에게도 우선적인 책임이 있겠지만 서청을 이용해 이른바 ‘빨갱이 사냥’을 지시했던 이승만과 미군정에 더 큰 책임이 있다 하겠습니다.

◇류도성> 그래서 오늘은 서북청년단과 관련된 유적지를 소개해주신다고요?

◆양성주> 그렇습니다. 서북청년단 제주도본부 옛터와 제주신보사를 소개해 드리려고 합니다.

◇류도성> 서북청년단 제주도본부 옛터에는 역사적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나요?

◆양성주> 현재 유적지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서북청년단 옛터는 현재 칠성로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상가 건물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70여 년 전을 기억할 수 있는 것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서청 제주본부 옛터 주변에 안내판을 설치하고 서청이 제주에서 일삼았던 악행과 범죄행위를 기록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역사가 흔적조차 없이 잊히게 놔둘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류도성> 두 번째 유적지 제주신보사에 대해 설명해 주시죠.

◆양성주> 제주신보사는 4·3 당시 제주도 내 유일한 언론기관이었습니다. 제주신보사는 3·1발포사건 이후 피해 유가족 조의금 모금 운동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제주 지역의 유일한 언론으로써 제주도의 제반 현황에 대한 기사를 작성했고, 제주신보의 당시 자료는 해방 이후 제주 사회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는 주요한 자료로 지금까지 활용되고 있습니다.

제주신보사 옛터 현재 모습. 사단법인 제주다크투어 제공

◇류도성> 제주신보사에는 4·3과 관련해서 어떤 역사적 사건이 담겨 있나요?

◆양성주> 당시 1948년 10월경 강력한 토벌 작전이 진행됐을 당시 제주농업학교에는 제주 지역 유지들이 줄줄이 끌려 들어갔습니다.

당시 많은 언론사 대표, 편집국장 등이 수감돼 토벌대가 상황을 예의주시하며 긴장감이 고조됐던 시기였습니다. 이 시기에 이덕구 명의의 ‘선전포고문’과 ‘호소문’ 삐라가 읍내 곳곳에 뿌려지는데요.

◇류도성> 토벌 당국이 발칵 뒤집어졌을 것 같은데요?

◆양성주> 맞습니다. 토벌 당국은 삐라를 뿌린 언론사를 수사했고, 그 삐라는 제주신보사에 편집국장으로 있던 김호진에 의해 인쇄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당시 서북청년단 사무실과 제주신보사의 거리는 불과 1분 남짓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산군들의 부탁이라며 뜻을 굽히지 않고 대담하게 인쇄를 이어나갔다고 합니다.

◇류도성> 그 후 김호진 편집국장은 어떻게 되었나요?

◆양성주> 김호진은 입산을 시도했다가 결국 관음사 근처에서 토벌대에 잡혀 제주농업학교 수용소로 끌려갔습니다. 심한 고문을 받고 10월 말경에는 토벌대에 의해 즉결 처형됐습니다.

◇류도성> 이 후에 제주신보사는 토벌대의 지속적인 간섭을 받았을 것 같은데요?

◆양성주> 그렇습니다. 서청 제주단장 김재능은 제주신보사를 강제로 접수하기도 했는데요. 강력한 토벌 작전이 진행됐을 당시 언론사는 무고한 주민들이 희생됐다는 내용을 신문에 쓰지 못했습니다.

군에서 발표하는 대로 군의 정당한 작전으로 다뤄야 했는데, 서청이 자신들의 역할을 비중 있게 다루지 않았다며 불만을 표시해 제주신보사를 접수했던 것입니다.

◇류도성> 제주신보사를 강제로 접수한 뒤에는 어떤 일이 일어났나요?

◆양성주> 제주신보사를 강제 접수한 김재능은 제주신보사를 제집 드나들 듯 들락날락하며 폭행을 일삼았습니다.

하루는 신문사에 들어와 김석호 사장을 구타하기도 했고, 당시 제주신보사 편집국장이었던 김용수는 자던 중 갑자기 들이닥친 서청 단원들에게 폭행을 당한 뒤 총살당할 뻔했지만 가까스로 목숨을 구했다고 합니다.

후에 서청 특별중대원을 편집국장에 앉히고 자신은 사장 자리에 올라 권력을 휘둘렀다고 합니다.

◇류도성> 당시 역사적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나요?

◆양성주> 4·3과 관련된 원도심 유적지를 돌아보면서 많은 아쉬움이 있습니다. 대토벌의 대상지가 아니었기 때문에 많은 살상자가 당시 제주 읍내에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많은 역사의 흔적들이 새겨져야 할 곳에서 그 흔적들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아주 아쉽습니다.

제주신보사 역시 당시의 모습은 확인할 수 없습니다. 지금은 다른 가게가 들어와 있고 당시의 골격만 확인할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이곳이 유적지였음을 알 수 있는 안내판도 세워져 있지 않았습니다.

4·3 당시 제주도 내 유일한 언론기관이었으며 3·1발포사건 이후 피해 유가족들을 위해 조의금 모금 운동을 벌였고, 군경 토벌대에 의해 장악됐다는 이야기로 제주시 내 원도심 주요 유적지로 소개할 필요가 있습니다.

원도심에는 관덕정을 비롯한 많은 4·3유적지들이 있었던 곳입니다. 건물이 없어져 흔적을 찾아보기 힘든 곳들은 유적지 안내판을 반드시 설치해서 원도심 곳곳이 4·3과 관련이 있음을 알리고 그에 맞은 스토리를 만들어 가는 것이 필요하고 생각합니다.

안내판을 설치할 경우 이동약자의 접근성을 보장하고, 시각장애인 등을 위한 음성변환용코드나 점자 안내판도 설치되어야 할 것입니다.

▶ 기자와 카톡 채팅하기
▶ 노컷뉴스 영상 구독하기

[제주CBS 류도성 아나운서] ryuds@cbs.co.kr

Copyright © 노컷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