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박정희 연출 "석유, 여성주의 관점으로 봅니다"
이자람·장영규 존경 연극계 대모
[서울=뉴시스]이재훈 기자 = "석유는 땅에서 나오죠. 땅의 신은 여신입니다. 생산, 자연 같은 이미지를 갖고 있죠."
연극 '오일(Oil)'이 오는 5월 1~9일 한남동 더줌아트센터에서 국내 초연한다. 160년에 걸친 '석유 연대기'를 따라 '메이'와 '에이미'라는 두 모녀(母女)의 관계를 그린 서사시다.
최근 더줌아트센터에서 만난 '오일'의 연출가 박정희(63) 극단 풍경 대표는 "석유를 여성주의 관점에서 대하는 것이 흥미로웠다"고 말했다.
그간 '석유 이야기'는 주로 남성 중심이었다. 석유를 차지하기 위한 첩보전 영화 '007 언리미티드'(1999), 오일러시와 인간의 욕망을 엮은 영화 '데어 윌 비 블러드'(2007) 등이 예다.
영국 극작가 엘라 힉슨이 쓴 '오일'은 석유의 흥망성쇠 속에서 치열하게 투쟁하고 고민하는 여성을 통해 계급주의·제국주의·환경 문제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던진다.
1889년 영국의 콘월에서 출발해 1908년 영국의 식민지 페르시아, 1970년 햄스테드, 2021년 바그다드, 그리고 2051년, 다시 콘월로 되돌아가는 한 세기 반을 다룬다.
박 연출은 "그간 석유 관련 이야기는 백인 남성의 관점으로 써졌다"면서 "'오일'은 영국 이야기지만, 제국주의 같은 소재는 일본이 우리에게 가했던 끔찍한 폭력을 떠올리게 해요. 엄마와 딸의 관계는 그 자체로 보편적 이야기입니다. 무엇보다 집을 떠나 빛을 따라가는 여성의 성장에 대한 욕구와 서사는 지금 한국과 잘 맞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독일 프랑크푸르트 a/M 괴테 대학에서 공부한 박 연출은 1995년 귀국했다. 바탕골소극장에서 아동극으로 연출 활동을 시작했다.
극단 사다리를 거쳐 2001년 풍격을 창단하고 선보인 연극 '하녀들'을 통해 대학로를 대표하는 연출가로 자리매김했다. 프랑스 실존주의 극작가 장 주네의 해방적 기운이 담긴 원작을 회화적으로 그렸다는 평을 들으며 상을 휩쓸었다.
박 연출은 "'하녀들'은 내 인생의 한 페이지를 넘겨준 작품"이라면서 "힘들었던 제 한 시기에 대한 일종의 진혼굿(죽은 사람의 넋을 달래어 위로하기 위해 하는 굿)이었다"고 돌아봤다.
이와 함께 역시 주네의 원작을 로마 원형극장 같은 무대로 풀어낸 '발코니', 영국 극작가 데이비드 헤어의 희곡을 국내 초연한 '유다의 키스', 영국 극작가 니나 레인의 '가족이란 이름의 부족 : 트라이브스(tribes)' 등 주로 완성도 높은 외국 희곡을 실험적인 연출로 국내 선보이며 '연극계 대모'로 자리매김했다.
이번 '오일'에 내로라하는 배우들과 창작진이 앞다퉈 가세한 이유다. 특히 석유에서 기회를 발견하는 주인공 메이 역에 소리꾼이자 전방위 창작자로 활동 중인 이자람이 캐스팅, 정극에 도전한다.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낸 두 사람이 제대로 함께 작업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박 연출은 "자람 씨의 작품을 꾸준히 봐오면서 성장과 진화를 확인해왔다"면서 "최근엔 '노인과 바다'를 봤는데 긍정적인 힘이 많아졌더라고요. 빛을 따라가는 이번 작품에도 자람 씨가 잘 어울릴 거 같았다"고 했다.
밴드 '이날치'의 장영규가 음악을 맡는다. 지난 2009년 장영규가 음악을 맡았던 극단 여행자의 '페르귄트'를 본 박 연출이 그에게 러브콜을 보낸 뒤 꾸준히 작업을 해오고 있다.
박 연출은 "연극은 하모니가 중요한데 영규 씨는 연극 음악을 할 때는 부러 자아를 보여주지 않아요. 음악을 갖고 연출을 할 수 있게 만드는 재능 있는 음악가"라고 봤다. 스타 무대 디자이너 여신동도 2010년 초반부터 박 연출이 계속 작업해오고 있는 예술가다.
박 연출은 연극 작업에서 '만남으로 인한 폭발'을 중요하게 여긴다. 하지만, 코로나19는 이런 시너지를 힘들게 하고 있다.
2000년대 말 박광정이 운영하던 대학로 정보소극장을 골목길(대표 박근형), 백수광부(대표 이성열), 여행자(대표 양정웅), 작은신화(대표 최용훈), 청우(대표 김광보)와 함께 공동 인수해 꾸린 경험도 있는 박 연출은 "한때 극단들이 함께 체육대회
를 열고 교류를 해온 적도 있는데, 이제 각자 도생의 시기가 왔다"고 안타까워했다.
팬데믹 시대의 초창기, 격리가 이어지는 공황 상태가 당황스러웠다는 박 대표는 현재 이 상황을 차분히 들여다보고 있다. 메타버스(3차원 가상세계)에 대해 공부도 하지만, '연극의 현장성'을 잘 살릴 수 있는 공연의 형태에 대한 관심이 더 크다.
"힘겨운 체제나 우울한 감정에 지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것을 극복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걸 인정하면서도 끝까지 나아갈 수 있는 '긍정적이 힘'에 대해서요. 연극 '오일'은 그런 고민 과정 중에 만난 귀한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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