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여사의 어쩌다 마을] 아파도 괜찮아, 마을
[김여사의 어쩌다 마을]
봄은 마을에서도 텃밭 농사가 시작되는 때다. 지난해 이맘때쯤, 마을 사람 몇몇이 함께 밭을 갈기로 한 날이었다. 김 셰프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말없이 안 올 사람이 아니라며 누군가 전화를 했다. “아니, 갑자기 수술이라고요? 아아… 그래요, 꼭 잘됐으면 좋겠어요. 꼭이요.” 무슨 일인지 모두의 눈길이 쏠렸다. “오늘 새벽 연락이 와서 갑자기 신장 이식 수술이 잡혔대요. 석현씨 앞 순번 대기자가 네명이나 있어 기대를 안 했는데. 정말 잘됐어요, 정말….” 모두 제 일처럼 기뻐했다. 나도 그랬다.
마을에서 김 셰프로 통하는 석현씨는 자연주의 요리를 연구하고 만드는 40대 싱글 남성이다. 아무 연고도 없는 이 마을에 온 건 10년 전, 중증 만성신부전증 진단을 받고 나서다. 석현씨는 미디어 아트라는 첨단 분야에서 박사학위를 받고서 시쳇말로 잘나가던 중이었단다. 갑자기 몸이 많이 아파왔지만 일이 바빠 미루고 미루다 병원을 찾았다. 신장이 거의 망가져 있었다고 한다. 요양을 위해 서울을 떠나 한적한 이곳 파주로 온 이유다.
어쩌다 아무 연고도 없는 파주로 왔을까? “누나가 돌봐주겠다며 가까이 이사 오라고 했어요. 하지만 엄마 병간호하느라 가족 모두 많이 힘겨웠던 걸 아는데 부담 주고 싶지 않았어요.” 그렇게 홀로서기를 결심한 석현씨는 또 하나 결심을 했다. 낯선 마을에 스며들기로 마음먹었던 것. 병의 특성상 섭식이 중요했다. 음식만큼은 좋은 재료로 직접 해 먹겠다고 결심하고 생협 조합원으로 가입했다. 주부, 여성들이 대부분인 생협 소모임에도 적극 참여해서 자연주의 음식을 함께 공부했다. “처음엔 싱글 남성인 제가 나타나니 다들 어리둥절 어색해했어요. 그전까지는 어쩌다 남성이 참여해도 부부 동반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대요.”
생협 활동으로 ‘내 몸을 살리기 위한 요리’에 웬만큼 자신이 붙자 이웃과도 나누고 싶어졌다. 물론 생계를 위한 최소한의 벌이도 필요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원 테이블 키친, 예약제로 오직 한 팀만 받아 집에서 음식을 준비하고 대접했다. “일주일 중 3~4일은 나의 재능으로 최소한의 벌이를 하고, 남는 시간은 오롯이 내가 좋아하는 걸 하며 살고 싶었어요. 좋은 음식을 먹고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는 게 참 좋았어요.” 물론 시행착오도 많았다. “처음엔 음식값도 내고 싶은 만큼만 내시라고 했어요. 오히려 부담스러워하더군요. 많이 내면 부담되고, 적게 내면 미안하다면서요.” 음식값 대신 물건으로 받는 물물교환 실험도 해봤다. 생계를 위한 최소한의 소득 50만원을 목표로 나름 다양한 대안경제 실험을 한 셈이다.
복지가 튼튼하지 못한 우리 사회에서 병은 너무 많은 것을 빼앗아가곤 한다. 긴병에 장사 없다고, 경제적 위기, 가족의 해체, 친구들과의 단절 등 불행이 다발로 펼쳐진다. 누구도 스스로 아픔을 선택하지 않지만 아픈 몸은 곧잘 쓸모없는 몸으로 여겨진다.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의 저자 조한진희는 “회복되지 않는 아픈 몸으로도 어떻게 온전하고 행복한 삶이 가능한가”를 고민해야 한다고 말한다. 석현씨는 불행에 떠밀리지 않기 위해서 ‘셀프 돌봄’과 자립을 선택했다. 건강하지 않아도 잘 사는 방법을 찾았다. 고립이 아닌 ‘관계와 유대’를 선택했다. 그때 마을이 마중물이 되었다.
작년 4월의 수술 후 석현씨의 몸은 조금씩 회복되고 있다. 언제나 흙빛 같던 얼굴에 생기가 돌고 준수한 용모도 살아나기 시작했다. 그래도 아직은 허약하다. 많이 아픈 몸에서 조금 ‘덜 아픈 몸’이 된 석현씨는 요즘 마을의 몇몇 공방과 함께 ‘자연주의 식생활’ 프로그램을 시작하면서 신이 났다. 지역의 재료로 만드는 그의 자연주의 음식에 더해 집에서 담그는 술, 한식 디저트, 바느질과 목공으로 만드는 식기와 식탁 소품 제작까지 곁들여진 멋진 기획이다. “제가 지향하는 건 요리의 방법이 아니라 요리 전체, 특히 재료에 대한 것이에요. 그래서 농사와 생태 순환에 관심이 많아요.” 맛에만 집중하는 먹방이 만연하는 시대, 음식은 땅과 농사에서부터 시작한다고 생각하는 석현씨다.
이웃과 가장 나누고 싶은 음식이 뭐냐고 묻자 석현씨는 ‘갱미죽’을 꼽았다. 흰쌀죽을 의미하는 갱미죽은 아픈 몸을 살리는 음식이란다. 맛있는 음식보다 사람을 살리는 음식을 나누려 하는 석현씨다. 문득 석현씨에게 신장을 주고 떠난 이를 생각한다. 석현씨 앞 순번에 있다가 피치 못할 사정으로 수술을 미뤘을 이들도 떠올린다. 모두 둘러앉아 석현씨의 갱미죽을 나눠 먹는 상상을 해본다. 이 봄이 가기 전에 석현씨의 갱미죽을 배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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