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의사실공표죄 실효화' 박범계의 오래된 화두

김세정 2021. 4. 19.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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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범계 법무부 장관이 15일 오전 경기 과천시 정부과천종합청사로 출근하며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뉴시스

"아니면 말고? 아니면 처벌"…의원 시절 법안 발의도

[더팩트ㅣ김세정 기자] "피의사실공표 하면 노무현 전 대통령이 떠오른다." 박범계 법무부 장관이 지난 10일 자신의 SNS에 올린 글 일부다.

2009년 봄, 언론은 '명품시계'로 뒤덮였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에게 고가의 시계를 받았다는 보도 때문이다. 그로부터 20일 뒤에는 권양숙 여사가 시계를 논두렁에 버렸다는 수사 내용이 보도됐다. 노 전 대통령은 열흘 후 서거했다.

'논두렁 시계' 사건은 검찰 피의사실공표 논란 때마다 등장하는 대표적인 예다. 이 사건으로 처벌받은 사람은 없다. 노 전 대통령 서거 직후 민주통합당(옛 더불어민주당)이 이인규 당시 대검 중수부장, 우병우 중수1과장, 홍만표 수사기획관 등을 고발했지만 검찰은 모두 불기소 처분했다.

최근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 출국금지 사건을 두고 피의사실공표 논란이 재점화됐다. 수사상황이 연일 언론에 보도되자 박범계 장관이 강한 유감을 표명했기 때문이다. 재보선을 하루 앞둔 지난 6일 박 장관은 "특정 언론에 특정 사건과 관련해 피의사실공표라고 볼 만한 보도가 되고 있다. 묵과하기 어렵다"며 감찰 가능성을 내비쳤다.

일각에서는 박 장관이 선택적으로 피의사실공표를 문제 삼았다는 비판이 나왔다. 정치적 유불리에 따라 문제를 제기했다는 것이다. 박 장관은 "야당 의원 시절부터 일관되게 피의사실 공표에 대해 지적해왔다"고 맞섰다.

◆ "아니면 말고? 아니면 처벌 돼야" 초선 시절 법안 발의

2012년 4월 총선 결과 초선 야당 의원으로 국회에 입성한 박 장관은 '노건평 뭉칫돈' 사건과 맞부딪혔다. 5월 노 전 대통령의 형 노건평씨의 공유수면 매립 이권의혹을 수사하던 창원지검은 브리핑에서 "노건평씨의 자금관리인 추정 계좌에서 수백억원의 뭉칫돈이 발견돼 확인하지 않을 수 없다"며 불법 정치자금일 가능성을 내비쳤다.

당시는 대통령선거를 7개월가량 앞두고 이명박 대통령의 친형 이상득 의원 등 측근 비리의혹 수사 요구가 거센 때였다. '노건평 뭉칫돈' 공개 이후 언론이 대대적으로 보도를 이어가자 일각에서는 대통령 형의 의혹을 덮기위한 물타기가 아니냐는 주장이 나왔다. 이후 뭉칫돈 의혹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고 피의사실을 공표한 모 차장검사는 대검이 징계를 청구하려하자 사표를 내고 김앤장 변호사로 옮겼다.

원내 부대표였던 박 장관은 민주통합당 원내대책회의에서 "그동안 많은 검사들이 사실상 형해화된, 한 번도 입건되지도 않았고 수사되지도 않은 피의사실공표죄라는 법조문 뒤에 숨어있었다"며 "(노건평 뭉칫돈 사건은) 검찰의 현 주소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것이며 검찰개혁의 중요한 기준으로 삼아야 할 사건"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박 장관은 "악의적인 피의사실공표는 반드시 처벌받도록 하겠다"며 법적 실효화를 위한 입법을 준비했다. 같은해 9월에는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 참여연대 등과 공동으로 '피의사실공표죄를 살리기 위한 세미나'를 개최했다. 검찰의 기소독점으로 사실상 사문화된 피의사실공표죄를 재점검하는 자리였다.

박 장관은 세미나 개회사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을 언급했다. 그는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 게이트 관련 수사 당시 50여 일간 피의사실공표로 피해를 입어 극단적인 선택을 해야만 했던 노 전 대통령을 보면 (피의사실공표의 문제점을) 잘 알 수 있다"며 "당시 언론들은 '로또마을 봉하마을에 집결하자'와 같은 자극적인 제목으로 도배하면서 앞다퉈 노 전 대통령을 음해할 목적으로 희화화했다"고 강조했다.

박 장관은 의원 시절이던 2012년 9월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 참여연대 등과 공동으로 '피의사실공표죄를 살리기 위한 세미나'를 개최했다. /'피의사실공표죄를 살리기 위한 세미나' 자료집

이어 "피해자에게는 씻을 수 없는 가슴의 상흔을 남기는데도 피의사실공표는 정치적으로 민감한 현안이 있을 때마다 벌어졌다"며 "심각한 범죄임에도 처벌이 이뤄지지 않는 이유는 검찰이 수사 주체인 동시에 범죄 주체이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또 "아니면 말고가 아니라 처벌돼야 한다. 그럴 때만이 검찰과 언론이 국민 곁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이후 국회의원으로서 첫 국정감사에서도 피의사실공표죄에 따른 인권침해 문제를 집중제기해 국회 NGO모니터단이 선정한 우수의원, 민주통합당이 자체 선정한 국감 최우수의원에 뽑히기도 했다.

12월 박 장관은 이같은 취지를 담아 '형법 일부개정법률안'을 대표 발의했다. 의원으로서 두번째 대표발의였지만 국회 문턱을 넘지 못 했다. 제안이유를 보면 피의사실공표의 무조건 금지보다는 현실적 대안을 추구했다. 수사 과정에서 피의사실공표가 필요한 특수한 사정도 있을 수 있는데 처벌만 규정해 아예 처벌하지 않는 관행이 형성됐다고 봤다. 이에 따라 '범죄확산을 방지하기 위해 필요한 경우' '범인체포를 위해 필요한 경우' '국민 알 필요가 있는 경우' 등 예외 규정도 명시했다.

박 장관은 이듬해 이른바 '이석기 내란음모 회합 녹취록' 사건 때도 한 언론과 인터뷰에서 "이석기의 발언에 전혀 동의할 수 없지만 국정원이 수사동력을 위해 녹취록 전문을 공개한 것은 심각한 피의사실 공표이며 이렇게 혐의를 입증하는 물증을 전면적으로 언론에 공개한 전례가 없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이석기 통합진보당 의원 기소에 결정적 역할을 한 이 녹취록은 재판 과정에서 270여곳의 오류가 드러났고 내란음모 혐의는 대법원에서 무죄가 확정됐다.

◆"내 편 네 편 가리지 않는 미래지향적 개선 필요"

박 장관이 김학의 사건 피의사실공표 논란에 불을 지피자 '내로남불'이라는 비판도 나온다. 박근혜정부 시절 이석수 특별감찰관의 우병우 청와대 민정수석 감찰 내용 유출을 옹호한 적이 있고 현 정부 초기 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 수사 당시도 야당의 피의사실공표 문제제기를 일축했다는 것이다.

다만 이석수 특감 사건은 당시 민정수석실이 감찰에 불응하고 국정원이 이석수 특감을 사찰한 정황이 제기된 배경이 있어 비교가 어렵다는 주장도 있다. 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 수사는 이례적으로 특검법에 따라 수사내용을 공개하는 브리핑을 허용한 바 있다.

최진봉 성공회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이석수 특별감찰관 감찰 내용 유출 문제는 감찰방해와 특별감찰관 사찰 논란 상황에서 나온 것"이라며 "이와 달리 정상적으로 진행 중인 수사내용이 공표되는 것은 문제다. 왜 그때는 이야기 안 하고 이제는 이야기하느냐는 것은 맞지 않는다"라고 평가했다.

전문가들은 이 기회에 피의사실공표죄를 현실성있게 정비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하태훈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피의사실공표 금지가 공보준칙으로 돼있어 계속 정파적으로 비친다"며 "법률로 제정해야 한다. 쉽지 않겠지만 (이번 계기로) 개혁하는 것이 옳다"고 말했다.

하 교수는 "피의사실공표를 절대적으로 제한할 수는 없지만, 수사 초기 단계부터가 아니라 영장청구나 발부 단계에서는 좀더 객관적이지 않겠는가"라며 "현재는 초기 단계부터 수사기관의 일방적인 주장이 보도된다. 객관적인 단계에서는 공표하도록 하고 반드시 피의자 반론을 함께 실어줘야 공정하다"고 했다.

박 장관은 "(이번 기회에) 네 편, 내 편 가리지 않는 제도개선을 반드시 이루자"며 진영논리를 떠난 대책을 세우자는 입장이다. 지난 16일 법무부 과천청사 출근길에서는 취재진과 만나 "공정이라는 관점에서 모두에게 동등한 룰을 만드는 것을 포함한 대책을 세우겠다. 이번에는 정말 제대로 된 공정룰을 만들겠다"고 강조했다.

sejungkim@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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