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한 당신] 정치-종교-가부장의 파라오 권력에 저항한 '이시스의 딸'

최윤필 2021. 4. 19.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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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는 공화제가 시작된 1952년 군부쿠데타 이후 2011년 '아랍의 봄'까지 60년 동안 단 세 명의 군인 대통령이 통치한 권위주의 독재국가였다.

22년 독립 후의 입헌군주(술탄)제까지 치면 근 한 세기가 그러했다.

1928년 탄생한 아랍 최초-최대 이슬람 정치조직 '무슬림형제단'의 기치도 외세 배격과 부패 왕정 타도, 이슬람국가 건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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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wal El Saadawi(1931.10.27~2021.3.21)
나왈 엘 사다위는 말과 글로써 억압적 정치-종교-가부장 권력에 저항한 이집트 의사 출신 페미니스트 작가다. 감시와 투옥, 살해 위협 속에서 평생 장애물 비월 경주마처럼 허들을 넘어 내달린 그는 82년 출옥 직후 출간한 '여성교도소 회고록'에서 '글쓰기는 유년기부터 지금까지 나의 범죄였"고, "풀려난 지금도 나는 철창 없는 감옥 속에 있다"고 썼다. orgs.law.harvard.edu

이집트는 공화제가 시작된 1952년 군부쿠데타 이후 2011년 '아랍의 봄'까지 60년 동안 단 세 명의 군인 대통령이 통치한 권위주의 독재국가였다. 22년 독립 후의 입헌군주(술탄)제까지 치면 근 한 세기가 그러했다. 장기집권을 물리적으로 지탱한 건 군부와 공권력이었지만 이념적 들보는 아랍민족주의와 이슬람주의였다. 이집트는 시민 90%가 국교인 이슬람교(수니파)를 믿는, 원조 원리주의 정치단체인 '무슬림형제단'을 탄생시킨 나라다. 거기에 뿌리깊은 가부장주의는 권위주의 국가시스템 전체를 떠받친 기반이었다.

나왈 엘 사다위(Nawal El Saadawi)는 저 '파라오'적 정치-종교-가부장 권력의 삼각파도 한복판에서 저항의 등대처럼 우뚝했던 의사 출신 페미니스트 작가다. 그는 외과-정신과 의사로서 여성의 육체-정신에 가해지는 야만을 들추었고, 맹렬한 세속주의자로서 종교적 몽매와 억압을 성토했고, 비타협적인 민주주의자로서 권위주의 세속권력에 저항했다.
그의 무기는 글이었다. 50여 권의 소설과 희곡, 자서전 등 논픽션을 쓰면서 그는 글 때문에 실직 당하고, 말 때문에 투옥되고, 공공연한 살해 협박에 약 13년을 외국에서 지내야 했다. 하지만 '유배지'에서도 그는 서구 주류 페미니스트들과 논쟁했고, 어김없이 '전장'으로 되돌아와서는 "무바라크식 민주주의의 실체를 폭로하기 위해" 2004년 대선에도 출마했고, 여성에겐 이혼 청구권조차 없는 나라에서 남편에게 칼까지 들이대는 결기로 무려 세 차례 말 그대로 '탈혼'했다.

그는 그렇게 사나웠고, 스스로 언제나 옳고 정의로웠고, 생의 어느 한 굽이도 헛되이 걷지 않았노라 말할 만큼 당당했다. 그리고 목숨이 아까워 더 맹렬히 못 싸운 세월이 안타깝고 후회될 뿐이라고 말했다. '이시스(Isis, 사다위에 따르면 정의의 여신)의 딸' 나왈 엘 사다위가 3월 21일 별세했다. 향년 89세.


공정하지 않은 신이라면 믿지 않겠다

아랍민족주의는 이슬람(원리)주의와 사실상 한 몸이고, 이슬람주의는 슬라보이 지제크의 말처럼 세속화-서구화 '모더니티'의 산물이다. 1차대전 뒤 민족주의 열풍 속에 1922년 나라는 독립했지만, 국왕도 관료들도 전 종주국 영국의 꼭두각시였다. 1928년 탄생한 아랍 최초-최대 이슬람 정치조직 '무슬림형제단'의 기치도 외세 배격과 부패 왕정 타도, 이슬람국가 건설이었다. 가말 나세르(56~70년 집권)가 이끈 '자유장교단'의 1952년 쿠데타와 공화정의 지향 역시 민족주의에 기반한 실질적 독립이었고, 사다트(70~81년)-무바라크(81~2011) 권력의 뿌리도 중동전쟁 등 불안한 정세와 서구화의 반작용으로 강화된 아랍민족주의였다.

엘 사다위는 형제단 출범 3년 뒤인 1931년, 카이로 북부 농촌마을 카프르 탈라(Kafr Tahla)에서 9남매의 장녀(둘째)로 태어났다. 그는 6세 때 "어머니가 웃으며 지켜보는 가운데" 성기절제(FGM)를 당했고, 10세 때 강제결혼 위기에 몰렸다. 결혼이 한사코 싫었던 그는 가지를 먹어 이를 검게 물들이고, 구혼자에게 끓는 커피를 엎지르는 소동까지 벌여 결혼을 면했다. 교육공무원 아버지와 전업주부 어머니는 딸에게 글을 가르치고 대학 교육을 시킬 만큼 합리적이었고, "주어진 것을 곧이곧대로 믿지 말고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라"고 가르칠 만큼 이성적이었지만, 저 오래된 관습을 '다시 생각해볼' 정도는 아니었다.
자서전 '이시스의 딸(A Daughter of Isis)'에 엘 사다위는 '사내애 한 명의 값어치가 여자애 15명과 맞먹는다'는 할머니의 말에 화가 나서 발을 동동 구른 일화를 썼다. 신에게 '왜 여자는 남자와 다르게 취급 당하느냐'는 편지를 쓴 것도 그 무렵이었다. "신은 답장하지 않았고, 나는 이렇게 외쳤다. '당신이 공정치 않으면 나는 당신을 믿지 못하겠다'고."

여성성기절제(FGM)을 당한 이듬해인 1938년 만 7세의 엘 사다위(맨 오른쪽). 그는 여성의 몸으로부터, 오직 복종을 강요하는 모든 억압의 권력으로부터 소외당하면서도, 글쓰기와 저항의 힘으로 그 소외를 극복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Guardian, 엘 사다위 사진.

그의 꿈은 댄서였고 피아니스트였지만, 피아노 사줄 형편이 안 되던 부모는 대신 공부를 시켰다. 공부에 재능이 없던 장남 대신이었다. 엘 사다위는 1955년 카이로대 의대를 졸업하고 고향서 약 10년간 의사로 일했다. 시골 마을에서 젊은 여성이 남자의 몸까지 보는 의사가 되는 일 자체가 썩 드물고 도전적인 일이었다.
의사로서 보고 겪은 일과 자신의 FGM 체험 등을 소재로 그는 50년대부터 에세이와 소설을 썼다. 대부분 여성 보건과 젠더 폭력을 고발하는 분노와 계몽의 글이었다. 그가 60년대 중반 보건부 보건교육국장에 발탁된 것은 글로 얻은 명성 덕이었다. 당시는 수에즈운하 국유화 등을 단행하며 자립경제와 근대적 개혁정책을 추진한 나세르 집권기였다. 나세르는 70년 심장마비로 숨졌고, 이어 사다트가 집권했다.

나세르와 달리 무슬림형제단과 친밀했던 사다트는 71년 헌법을 개정, '샤리아(이슬람 율법)'를 모든 입법의 근거로 규정했다. 엘 사다위가 문제의 논픽션 '여성과 성(Women and Sex, 1972)'을 출간한 게 그 무렵이었다. FGM과 초야의 처녀막 검사 등 종교-전통의 이름으로 여성의 몸에 가해지는 폭력을 고발한 그 책 때문에 그는 보건국에서 쫓겨났고, 의사 일도 못하게 됐고, 69년 창간한 잡지 'al-Sihha(보건)'도 폐간 당했다. 그는 72~80년 아인샴스(Ain Shams) 대학 연구원으로 여성신경증 등 정신의학을 연구했고, 유엔 아프리카-중동 여성프로그램 자문위원으로도 일했다. 그러면서 소설 '영점의 여성들(Women at Point Zero, 1975)' 등 여성인권에 관한 책을 줄기차게 썼다. 가정폭력에 시달리다 매춘부가 된 여성이 다시 포주의 횡포를 견디다 못해 그를 살해하고 사형선고를 받는 게 저 소설의 줄거리라고 한다.

사다트 정권은 1978년 '캠프데이비드 협정'으로 이스라엘과 화해하면서 이슬람 권력과 척지게 된다. 극우-개혁 두 진영으로부터 협공 당하던 사다트는 81년 9월 소위 '반정부 인사' 1,536명을 전격 구금했다. 엘 사다위도 옥에 갇혔다. 사다트는 약 한 달 뒤 무슬림 무장세력에 의해 암살됐고, 뒤이은 무바라크 정권은 이듬해 초 민심수습책의 하나로 '반정부 인사' 대부분을 석방했다. 석방 당일 무바라크가 옥중 인사 스무 명(여성 2명)을 초청해 식사를 대접하는 자리에 엘 사다위도 초대됐다. 참석자 중 무바라크 정부를 상대로 국가의 불법 구금에 대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한 건 엘 사다위가 유일했다. 그는 옥중에서 눈썹연필로 화장지에 쓴 글을 다듬어 '여성교도소 회고록(Memoirs from the Women's Prison)'을 출간했고, 아랍권 최초 여성인권단체인 '아랍여성연대회의(AWSA, 1982)를 창립했다.

엘 사다위는 80년대 말부터 무슬림 원리주의자들의 산발적인 살해 위협에 시달렸고, 90년대 초 사우디 한 신문이 소개한 '처단 대상 목록(death list)'에 포함되기도 했다. 정부는 경호원을 파견했지만, 엘 사다위는 무바라크의 경호원들이야말로 잠재적 킬러라 여겼다. 그는 93년 영국을 거쳐 미국으로 피신, 만 3년간 듀크대 등에서 강의했다.


"노출과 베일은 동전의 양면"

그의 눈에 서구 페미니즘(페미니스트)의 전장은 느슨하고 나이브해 보였을지 모른다. 니캅(베일)을 여성의 육체뿐 아니라 영혼을 가리는 억압이라며 결연히 거부했던 그는, 서구 무슬림 여성들이 베일을 자유의지의 패션 아이템, 혹은 문화정체성의 상징으로 옹호하는 데 아연해서는 "선택이라니.(...) 인식을 못할 뿐 감춰진 억압이다. 우리는 경제-사회-정치의 산물이며 교육의 산물이다"라고 말했다.
무슬림 페미니즘을 도식적으로 이해하며 "베일만 들먹이는" 서구 페미니스트들의 우월적 시선에도 그는 분노했다. 예컨대 과다 노출로 여성성을 과시하는 행위를 성 해방의 방증인 양 긍정하는 논리에 그는 "노출과 베일은 동전의 양면"이라고 지적했다. "남성은 왜 반라나 베일의 충동에서 자유로운가?(...) 우리를 해방시키려 하기 전에 당신들부터 자유로워져라." 그가 말한 '당신'에는 글로리아 스타이넘과 '급진 페미니스트' 로빈 모건 등이 포함됐다. 그는 "유럽과 미국 여성들은 FGM을 당하지 않았을 뿐, 그들 역시 문화적-정신적 음핵절제술(clitoridectomy)의 희생자들"이라며, "전세계 모든 여성은 한 배를 타고 있"으며 "가부장주의와 종교-자본의 억압은 보편적"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젠더해방은 개별 정부의 개혁이 아니라 전세계 여성의 조직적 투쟁으로만 쟁취할 수 있다고 2018년 BBC 인터뷰에서 말했다. "나는 여성 인권이 어떤 정부든 국가권력으로부터 주어지리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 역시 아랍민족주의로부터 완벽히 자유로울 순 없었지만, 그렇게 그는 페미니즘을 통해 그 사슬을 넘고자 했다. 그의 전선은 자본-제국주의와 계급, 종교-가부장주의에 폭넓게 펼쳐져 있었고, 여성해방은 저 모든 억압의 '핵심고리'였다. 그는 "페미니즘은 사회정의이고, 정치정의이며, 성의 정의이다(...) 의학과 문학 정치 경제 정신의학 역사를 잇는 것도 페미니즘이다"라고 말했다.

이집트 남성은 4명의 아내를 둘 수 있고, 언제 어떤 이유로든 이혼할 수 있다. 반면 여성은 가장의 뜻에 따라 결혼해야 하고, 언제든 어떤 이유로든 이혼당할 수 있다. 여성에겐 먼저 이혼을 요구할 법적 권리가 없고, 이혼 자체가 사회적 낙인이 된다.
엘 사다위는 세 차례 결혼했고, 자기 의지로 세 차례 이혼했다. 대학 동기였던 55년의 첫 남편은 수에즈 전쟁에 참전-귀향한 뒤 마약-알코올 의존증이 악화해 가정폭력을 일삼았고, 엘 사다위는 아버지의 도움으로 2년만에 이혼했다. 재혼한 변호사 남편은 엘 사다위에게 글쓰기를 포기하고 전업주부로 지낼 것을 강요했다. 두 번째 자서전 '불길을 헤치며 걷기(Walking Through Fire)'에 엘 사다위는 메스로 남편을 위협해서 결혼 몇 달 만에 이혼 동의를 얻어낸 사연을 소개했다. "세상에서 유일한 페미니스트 남성"이라고 자랑하던 세 번째 남편 셰리프 하타타(Sherif Hatata)와는 64년 결혼해 2010년까지 만 46년을 함께했다. 좌파 혁명 이력으로 투옥된 경험이 있던 하타타는 결혼 후 엘 사다위의 도움을 받아 만 43세에 작가로 데뷔했고 아랍어로 쓰인 아내의 책 다수를 영어로 번역해 서구에 알렸다. 2010년 하타타의 불륜 사실을 알게 된 만 79세의 엘 사다위는 "내 권리를 침해한 사람과 함께 지낼 수 없다"며 서슴없이 이혼했다. 2014년 인터뷰에서 엘 사다위는 "셰리프가 나보단 더 예의 바르고 인간적인 사람일지 모르겠다. 나는 무척 드세고, 내 위주로 살아온 편이다. 솔직히 내 진짜 사랑은 나 자신을 향한 사랑뿐"이라고 말했다. 글로써 모든 억압의 권위-권력과 싸우는 자신에 대한 사랑. 2013년 인터뷰에서 그는 유년의 댄서 꿈을 환기하며 "지금 나는 마음으로 춤추고 몸으로 글을 쓴다"고 말했다.

2001년의 엘 사다위와 셰리프 하타타. 엘 사다위는 "세상에서 유일한 페미니스트 남성"이라며 자랑하던 하타타와 46년을 해로했지만 2010년 불륜 사실을 안 뒤 이혼했고, "남자는 95%가 다 똑같다"고 말했다. AP 연합뉴스

무슬림 5대 의무 중 하나인 하즈(Hajj, 메카 순례)는 몰려드는 인파로 크고 작은 참사를 낳아왔다. 엘 사다위는 2001년 3월 주간지(Al-Maydan) 인터뷰에서 하즈의 대미인 자마라트(악마의 돌기둥에 돌을 던지는 의식)와 검은 돌 키스 의식을 싸잡아 이교 전통의 잔재라고 비판했다. 율법학자 등 종교계의 비난이 빗발쳤고, "목을 쳐야 한다"는 편지를 잡지사에 보낸 이도 있었다. 그 직후 한 변호사가 엘 사다위 부부의 강제이혼 소송을 제기했다. 고대 이슬람 율법 '히스바(Hisba, 배교 행위를 제3자가 고발할 수 있게 한 율법)에 근거한 소송이었다. 패소할 경우 이혼은 물론이고 최대 3년형을 살아야 했다. 다행히 부부는 승소했고, 엘 사다위는 히스바 철폐운동으로 반격했다.
2015년 9월 1,500여 명의 목숨을 앗은 사상 최대 하즈 참사 직후 인터뷰에서 엘 사다위는 "왜 언론은 본질적인 문제는 지적하지 않느냐"며 종교에 대한 비판의 억압을 비판했다. 그는 "내 꿈은 종교없는 세상이다. 남성과 여성, 빈자와 부자가 동일한 윤리적 기준으로 평가받는 세상, 전쟁 없는 세상, 젠더와 계급이 평등하고 정의롭게 조화하는 진짜 자유와 민주주의의 세상이다"라고 말했다.
2002년 에세이에서 그는 추방-소외로 점철된 자신의 삶을 회고했다. FGM 등으로 육체적으로 소외 당하고, 복종을 강요하는 권력으로부터 인격적으로 소외 당하고, 28세 되던 59년 부모를 잇따라 여읜 뒤 친정 남매들까지 건사하며 가난으로 소외 당하고, 나라 안에서는 '살생부'에 밖에서는 서구적 편견에 쫓기고 소외 당해온 삶. 그 억압에 맞설 힘을 그는 글쓰기로 얻었고, 거리에서 함께 한 저항의 함성에서 얻었노라고 했다. 2011년 '아랍의 봄' 시위-농성장의 그는 청년들의 리더이자 우상이었다. 10세 때인 1941년 아버지와 함께 처음 독립 시위에 가담한 지 만 70년만에 그는 "지연된 혁명의 꿈"의 일부를 실현했다.

그는 첫 남편과 딸을, 세 번째 남편과 아들을 낳았다. 99년 자서전 '이시스의 딸' 서문에 그는 "내게 이름을 물려주지 못한 위대한 여성, 내 어머니(Zeinab Shoukry)에게 헌정한다"고 썼다. 어머니 뒤를 이어 작가 겸 시인이 된 딸 모나 헬미(Mona Helmi)는 2007년 '어머니의 날' 칼럼에 "어머니에게 어떤 선물을 드릴 수 있을까. 구두? 드레스? 내가 드리려는 건 그의 이름이다"라며 필자의 자리에 'Mona Nawal Helmi'라 썼다. 모나 헬미는 쿠란이 금지한 어머니의 이름을 딴 '이단' 혐의로 역시 소송을 당했다.
엘 사다위는 '아랍의 시몬 드 보봐르'라 불리는 걸 싫어했다. 대신 스스로를 '장애물 비월 경주마'에 비유했다. 허들을 넘고 넘으며 더러 자빠지긴 했지만 한 순간도 달리기를 멈춘 적 없으므로 " 나는 승리마"라 했다. 불신자(不信者)라는 비난에는 이렇게 응수했다. "나는 나를 믿고 창의(문학)를 믿고 정의를 믿고 사랑을 믿고 자유를 믿는다. 그런 나를 어떻게 불신자라 할 수 있는가?"

최윤필 기자 proos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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