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세상]여전히 주파수를 맞추다
[경향신문]
학교 앞 문구점에서 팔던 광석 라디오 키트엔 직접 내 손으로 라디오를 만들 수 있다는 엄청난 성취의 유혹이 상자 위에 선명했습니다. 전쟁이나 재난이 발생하더라도 바깥소식을 들을 수 있는 도구라 참호라디오라고도 부릅니다. <15소년 표류기>와 <로빈슨 크루소>를 탐독하던 시절의 통과의례처럼 용돈을 모아 구입한 후 간단한 몇개의 부품을 조립하면 건전지를 넣지 않아도 가늘게 소리가 들리는 기적을 맛보게 해 주었습니다.
기억을 되짚어보니 ‘나만의’ 처음 미디어는 라디오였습니다. 납작한 모습에 위에는 스피커가 자리잡고 앞에는 디지털시계가 붙어 있던 빨간색 라디오는 공부방에 있던 유일한 전자기기였습니다. 매일같이 반복되는 숙제의 지루함을 덜어주던 친구는 라디오 말고는 없었기에 뭔가 재미있는 것이 있으려나 다이얼을 돌리던 기억이 선명합니다. 빗소리처럼 치직거리는 소음 구간을 지나 선명한 음질의 음악이 들릴 때면 낚시를 해본적 없는 저에게도 손맛이 느껴졌습니다. 그토록 공부를 강요받던 10대 시절 누구의 말처럼 국가가 유일하게 허락한 마약은 다름 아닌 라디오였습니다.
바이러스가 휩쓴 작년에 유난히 유튜브를 ‘듣는’ 사람들이 늘어났다고 합니다. 함께 있는 일터에서는 듣는 행위가 눈치가 보여 어려웠는데 재택근무가 대거 시도되며 어릴 적 듣던 라디오의 향수가 재현되기 시작한 것도 원인일 터입니다. 학창 시절 다 함께 청소하던 시간, 질 낮은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던 방송반이 준비한 유행가는 이 땅의 조상들이 함께한 숙명 같은 쌀농사를 견디게 해주었던 노동요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흥이 다시금 허락되는 집 안 나만의 일터는 외로움의 대안으로 새로운 주파수를 떠올린 것이겠지요. 그러고 보면 저 역시 이 글을 쓰기 위해 노트북을 연 후 먼저 한 일은 유튜브 검색창에 ‘글 쓸 때 듣기 좋은 노래’를 입력한 것이었습니다. 매질이 디지털로 바뀌었을 뿐, 습관이 하나도 변하지 않은 것은 제가 완고한 사람이기도 하겠지만 그것보다 인간의 행동은 끝없이 반복되기 때문이기도 한 것이라 위안합니다.
뭔가를 읽거나 쓰는 일 다음으로 라디오가 제게 소중하게 다가오는 때는 운전을 하며 이동하는 시간입니다. 전방을 주시하고 운전대에 손을 고정하고 나면 감각기관 중에서 여유로운 것은 듣는 기관 정도라 이리저리 주파수를 움직여 이동 시간을 헛되지 않게 보내려 노력하는 것도 하나의 즐거움입니다. 하지만 진행자와 테마가 매 시간 시보와 함께 바뀔 때마다 새로운 채널을 찾는 일도 번거로워지면서 어느덧 다른 매질을 시도해봅니다. 팟캐스트와 유튜브를 기웃거리기도 하고 아예 스트리밍 서비스로 제공되는 프로그램을 라이브로 듣기도 합니다. 그곳에도 기존 방송의 진행자들이 출퇴근 시간에 맞추어 나름의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일까지 생기면서 이제 라디오의 경쟁자들이 하나둘씩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렇게 채널이 늘다보면 나중엔 오천만이 오천만에게 이야기하는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겠다는 실없는 상상으로 생각이 번져갑니다.
MTV의 개국과 함께 뮤직 비디오라는 새로운 장르가 듣는 음악을 보는 것으로 바꿔주면서 라디오는 힘을 잃기 시작했습니다. 버글스의 ‘Video kills the radio star’의 가사처럼 보는 음악으로의 전환은 더 큰 매력으로 다가오며 귀와 눈을 탐하는 새로운 매체에 라디오는 자리를 넘겨주게 된 것이지요. 그렇다면 라디오에 다음의 위협은 직접 운전할 필요가 없는 자율주행시대가 될 수도 있겠다 생각됩니다. 양손과 눈을 자유롭게 쓸 수 있게 되면 사람들은 이동 시간에 영화를 볼 수도 게임을 할 수도 있을 터이니 말입니다. 그날이 오더라도 무언가를 읽고 쓰는 지금의 습관과 함께 적어도 저라도 라디오를 지키길 희망하는 마음이 듭니다. 그런 마음이 든 것은 역시 제가 완고한 사람이어서일까요?
송길영 마인드 마이너(Mind Mi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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