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신 넘치는 美… 같이 간 남편까지 접종해줬다
“오늘이 첫 접종이라고요? 와우, 흥분되시겠네요!”
지난 17일(현지 시각) 미국 뉴욕 맨해튼의 코로나 백신 24시간 접종소인 자비츠 센터. 본인 이름이 지나라고 밝힌 간호사가 쾌활하게 웃으며 소독 솜과 주사기를 꺼내들었다. 지나는 기자의 왼팔에 화이자 백신을 눈깜짝할 사이에 놓은 뒤, 접종 확인 카드를 건네주며 “2차 접종은 5월 8일이다. 그땐 예약할 필요 없이 그냥 오라”고 말했다.
대형 컨벤션 센터에 마련된 접종소엔 접종 부스만 70여개였다. 미 육군 장병 100여명이 마치 군사작전을 펼치듯 일사불란하게 현장 안내와 관리를 맡았다. 입구에 들어서 등록하고 백신을 맞기까지 채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백신을 맞은 뒤 이상 반응이 있는지 지켜보기 위해 대기하는 곳의 한쪽 구석에선 재즈 트리오가 라이브 공연을 하고 있었다.
이날 접종소에 온 사람들은 대부분 20~40대 젊은 뉴요커들이었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이달 초 “4월 19일부터 (16세 이상) 모든 미국인이 접종 자격을 갖게 될 것”이라고 공언했는데 현장에선 이보다 더 빨리 누구나 신청만 하면 백신을 맞고 있는 것이다. 백신 물량이 워낙 넉넉하니 가능한 일이었다. 백신을 맞은 사람들에겐 ‘나 백신 맞았어요(I got my vaccination)’란 글귀가 들어간 스티커를 붙여줬다. 이 스티커를 붙인 사람이 접종소에서 종일 쏟아져 나왔다.
백신 신청 과정은 아주 간단했다. 하루 전날 뉴욕주 온라인 사이트에 접속해 간단한 신상 정보를 입력하자, 집에서 가장 가까운 접종소에서 편한 시간대를 골라 예약할 수 있었다. 외국인이라 절차가 까다롭지 않을까 해서 접종소에 갈 땐 국무부와 유엔 기자출입증, 거주 증명 서류 등을 챙겨갔지만 꺼내 보일 필요도 없었다. 담당자들은 현 건강 상태와 부작용 발현 시 대처가 가능한지를 반복해 확인했다. 함께 간 남편이 “난 19일로 예약했는데 혹시 오늘 온 김에 맞을 수 있느냐”고 묻자, 담당자가 “당연히 환영”이라고 반색하며 받아줘 즉석에서 맞기도 했다.
미국에선 연초 필수 업종 근로자와 고령자 등 접종 우선순위를 엄격하게 정해놨다가 현장의 혼란으로 두 달여 백신 보급 지연 사태를 맞은 적 있다. 이후 행정 절차를 대폭 축소하고 ‘최대한 쉽게, 빨리, 많이 맞히자’는 쪽으로 급선회했다. 이런 속도전을 뒷받침한 건 물론 백신 물량의 폭발적 증가다. 미국은 현재 인구 두 배에 달하는 6억회분의 백신을 확보해놓고, 가을께부터 시작될 3차 접종(부스터 샷)을 위해 더욱 물량을 쌓아놓을 전망이다.
미국은 이날까지 성인의 49.7%인 1억3000만여명이 백신을 1회 이상 접종했다. 65세 이상에선 80.7%가 맞았다. 바이든 대통령은 당초 “취임 100일(4월 30일) 이내 1억명에게 백신을 접종하게 하겠다”고 했는데, 이달 초 목표를 2억명으로 높였다. 집단면역은 6월쯤 달성한다는 계획이다. 미국은 초기 방역 실패로 그간 확진자 3200만명, 사망자 58만명이 발생하는 등 혹독한 대가를 치렀지만, 백신 보급에 성공해 코로나 공포의 사슬을 하루가 다르게 끊어가고 있다.
2차까지 접종을 마친 사람에겐 신세계가 펼쳐진다. 뉴욕에선 2차 접종까지 완료하면 ‘백신 여권' 역할을 하는 앱 증명서를 발행하는데, 이걸로 스포츠 경기와 공연 관람, 자가 격리 없는 국내 여행 등을 즐길 수 있다. 뉴욕 길거리에 코로나 사망자 시신을 담은 가방이 굴러다니던 게 작년 4월이었다. 꼭 1년 만에 딴 세상이 된 것이다.
이날 서울에 있는 부모님께 전화를 했더니 ‘백신 천수답’ 상태였다. 78세인 아버지와 73세 어머니는 당뇨·고혈압 등 기저질환까지 있는 고위험군이라 1년 넘게 외출을 포기하다시피 했다. 부모님은 “한 달 전 동사무소에서 ‘곧 백신 놔준다’고 하더니, 며칠 전 ‘6월쯤 다시 연락주겠다’고 하더라”고 했다. 수도권 요양원에 있는 100세 할머니와 96세 외할머니도 아직 백신을 못 맞았다고 했다. 미국이라면 지난 1월에 이미 2차 접종까지 끝냈어야 하는 이들이다. 이들과 2년째 생이별 중인 부모님은 “할머니들이 영상 통화론 말을 알아듣지 못하신다”며 발을 동동 구른다.
지난해 6월 뉴욕으로 떠날 때 가족과 회사 동료들은 매주 약국에서 사 모은 마스크를 10장, 20장씩 건네며 “위험한 곳에서 이거 쓰고 버티라”고 했다. 한국에서 이 집요한 바이러스의 유일한 방패는 아직 마스크뿐인데, 미국에서 ‘백신 동아줄’을 먼저 잡은 것 같아 기분이 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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