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로] “애들도 한 번쯤은 아빠가 뭔가 해내는 걸 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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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에게 부끄럽지 않은 삶 그렇게 우리는 아버지가 된다
그때는 아들을 오해했다. 녀석이 초등학교 2학년 무렵이었을까. 맥락 없이 물었다. “아빠도 쉰 넘으면 ‘Why’에 나오는 거야?” 당시 조선일보 주말 섹션 ‘Why’를 책임지고 있던 터라, 당연히 그 얘기인 줄 알았다. 쩝, 녀석은 기자 아버지보다 아예 신문에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아버지를 원하는구나. 어쨌거나 아빠가 만드는 신문을 읽는 착한 아들이로군. 신통하기도 하지 오해였다. 녀석은 당시 초등생에게 인기 있던 만화 위인전 ‘Why 시리즈’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그 안엔 빌 게이츠나 스필버그처럼 생존 인물도 포함돼 있다면서.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위인전 아빠’ 해프닝을 떠올린 이유는 역시 정이삭 감독의 영화 ‘미나리’ 때문이다. 작품상 등 6개 부문 후보에 오른 이 매력적인 영화에서, 스티븐 연이 연기하는 고집불통 아버지는 가족을 곤경에 빠트린다. 아내랑 자식에게 별 상의도 없이 나만의 농사를 짓겠다며 아칸소 시골 마을로 끌고 가 고생만 시키는 것이다. 컨테이너 박스가 집이 되어버린 가족의 삶. 화를 내는 아내에게 남편은 처연히 말한다. “애들도 한 번쯤은 아빠가 뭔가 해내는 걸 봐야 할 거 아니야.”
이민 가족의 아메리칸 드림으로 이 영화를 읽는 관객들이 더 많겠지만, 나는 이 대사에서 연출자 정이삭(43) 감독과 그의 부친을 먼저 떠올렸다. 14년 전의 인연이 있다. 아직 20대 청년이던 그를 2007년 프랑스 칸 영화제에서 만났다. 남들 1/10, 1/100에 불과한 3만달러에 찍은 데뷔작으로 칸에 초대받은 신인 감독. 영화보다 더 영화 같았던 그의 스토리를 지면에 싣자, 생면부지였던 그의 부친으로부터 이메일이 왔다. 우리 아들을 지면에 소개해줘서 고맙다고, 이번에는 미국 AFI(영화연구소)에서 최고상을 받았다고. 앞으로도 계속 주목해 달라는 부정(父情)이었다.
하지만 칸의 주목이 할리우드의 성공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이후 10년 동안 장편영화 3편을 만들었는데, 대중의 환호나 비평의 지지가 따라오지는 않았던 것이다. 마흔을 넘긴 정 감독은 진지하게 영화감독 삶의 포기를 고민했다고 한다. 가족의 생계는 제쳐 두고, 무책임하게 내 꿈만 좇고 있구나 우리에게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이야기지만, 그 무렵 정 감독은 한국에 들어왔다. 인천 송도의 유타 대학 아시아캠퍼스 강사. 딸을 둔 40대 가장은 생활인으로서 삶을 선택했던 것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 어린 소녀가 ‘마지막으로 한 번’을 결심하게 만든 이유가 됐다.
최근 영국 파이낸셜타임스 인터뷰에서 그는 말했다. “내 딸이 나중에 어른이 되어 내 영화를 보면 알게 해 주고 싶었어요. 아버지가 무슨 맘을 먹고 세상을 살았는지, 무엇을 남겼는지, 무엇을 해냈는지.” 한 달 전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미나리’가 외국어 영화상을 받은 순간, 정 감독과 함께 환호하던 일곱 살 딸을 기억한다. “내가 기도했어요, 내가 기도했어요.”
모든 빼어난 예술 작품은 공통점이 있다. 창작자의 개인적 경험을 고백했을 뿐이지만, 독자나 관객 스스로 자문(自問)하게 만든다는 것. ‘미나리’가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몇 개의 트로피를 받을지 여부보다 중요한 것은, 감독이 내게, 그리고 세상의 아버지들에게 던진 질문이다.
초등 고학년이 된 아이는 이제 더 이상 만화 위인전을 보지 않는다. 그리고 위인전에 등장하는 삶만이 반드시 위대한 것은 아니라는 것도 조금은 아는 눈치다. 하지만 자식에게 부끄럽지 않은 삶. 가부장제의 유효기간이 끝났더라도, 남녀 모두 차별 없는 삶을 살게 되더라도, 이 질문은 여전히 세상 모든 아버지의 숙제로 남아있다. “애들도 한 번쯤은 아빠가 뭔가 해내는 걸 봐야 할 것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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