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헌의 히스토리 인 팝스] [58] 희망을 찾아왔건만
1990년, ‘언어의 마술사’ 김수현이 극본을 쓴 MBC의 드라마 ‘배반의 장미'는 예기치 않은 극 중 삽입곡의 돌풍을 일으킨다. 우리나라엔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멕시코계 미국 여성 싱어송라이터인 티시 이노호사의 애절한 스페인어 노래 ‘Donde Voy’다. 제목도 가사도 생소한 스페인어였기에 정작 이 노래의 의미는 제대로 알려지지 못했다. 제목도 그냥 ‘돈데 보이’라는 발음으로 소개되었을 정도였으니.
이 노래의 제목은 ‘어디로 가야 하나’라는 뜻이고 노랫말은 이민자 단속국의 눈을 피해 3141㎞에 이르는 미국-멕시코 국경을 넘는 멕시칸들의 슬픈 심정을 담았다. 트럼프의 장벽 설치 공방으로 잘 알려진 이 국경선은 한반도 넓이의 5배가 넘는 사막지대다.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 그리고 자신과 가족의 미래를 위해 불법 이민의 길을 택한 멕시칸들의 애환으로 점철된 곳이다. 해마다 4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이곳에서 목숨을 잃는다.
미국이라는 나라 자체가 이민자의 나라지만 백인 우월주의가 폭력적으로 존속하는 이중성으로부터 아직 벗어나지 못했다. 한국계 여성 4명이 희생된 애틀랜타 총격 사건은 코로나19 이후 아시아계 여성에 대한 인종 혐오와 여성 혐오의 결합이 나날이 증가하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번 사건이 더욱 심각한 것은 인종차별 반대 투쟁의 상징인 마틴 루서 킹 목사의 고향이기도 한 애틀랜타의 경찰이 연쇄 총격 살인범 로버트 롱의 대변인이라도 된 듯한 발언으로 2차 가해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는 점이다. 애틀랜타 경찰은 범행 원인을 ‘성 중독’으로 돌리거나 ‘그에게 나쁜 하루였다' 등의 말을 해 비난받았다.
때마침 93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이 목전이다. 미국 이민자의 삶을 다룬 ‘미나리’의 조연으로 영국 아카데미 조연상을 비롯해 스무 개 넘는 트로피를 받았던 배우 윤여정의 수상 여부가 비상한 관심으로 떠오르고 있다. 그러고 보니 윤여정은 ‘배반의 장미’에서도 조연으로 브라운관을 빛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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