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싫다, 사물이 더 아름답다[김영민의 본다는 것은]
이준익 감독의 영화 ‘자산어보(玆山魚譜)’는 19세기 조선을 다룬다. 19세기에는 주류 학문 경향에서 벗어난 새로운 흐름, 즉 세계의 경험적 탐구에 대한 드높은 관심이 있었다고 한다. 이준익 감독은 그 관심의 결과인 정약전(丁若銓)의 ‘자산어보’에 주목하고, 자기 나름의 해석을 내어 놓는다. 학문적으로 타당한지와 무관하게, 그 해석은 경청할 가치가 있다.
정약전은 신유사옥(辛酉邪獄)이라는 가톨릭 신자 박해사건에 연루되어 흑산도로 유배 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박물학 계통의 저작 ‘자산어보’를 편찬한다. 해양수산부 공식 블로그에 따르면, “당시 과학이 발달한 어느 서양 국가에서도 근대 과학적 동식물 분류법이 확립되어 있지 않았던 시대였기 때문에, 생물학자도 아닌 정약전이 이런 다양한 해양생물을 묶어 설명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나 과학적으로도 큰 성과가 아닐 수 없다.” 정약전이 근대 과학적 분류법을 확립해냈다는 말일까? 아니면, ‘자산어보’가 세계적으로 드문 시도라는 말일까?
그렇다면, ‘자산어보’는 기존 박물학 전통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근대적’ 저술이기에 특별할 것일까? 영화에 따르면, ‘자산어보’가 근대적이어서 특별하다기보다는 19세기 조선이라는 역사적 맥락 속에 있기에 특별하다. 중국의 경우, 청나라 만주족 정권이 한족 지식인들을 몰정치적인 학문에 몰아넣은 결과 고증학과 박물학이 흥성했다는 해석도 있지만, 19세기 조선의 박물학은 그와는 다른 정치성을 띤다. 영화 ‘자산어보’는 몰정치적인 사물 탐구가 어떤 정치적 의미를 띨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영화 속 정약전이 끝내 멀리하고자 한 사상은 성리학(性理學)이다. 성리학은 인간과 정치에 대한 지극한 관심으로 가득하다. 성리학자는 인간의 본성과 세계의 개선 가능성을 믿는다. 누구나 가지고 있는 선한 본성을 실현하면 좋은 정치가 가능하고, 그 좋은 정치를 통해 세상을 바로잡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너나 할 것 없이 세상을 바로잡겠다는 도덕적인 영웅인 것처럼 인간과 정치에 대해 한마디씩 거든다.
인간에게 아직 실망하지 않은 사람은 어떤 박물학을 전개하나? 그런 사람은 ‘어보’가 아니라 ‘인보(人譜)’를 쓴다. 인간과 정치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은 명나라 학자 유종주(劉宗周)가 지은 ‘인보’는 인간의 선한 본성과 그 본성을 실현하기 위한 모색들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인보’는 ‘어보’와는 달리 구체적인 사물을 묘사한 그림 대신에 ‘인극도(人極圖)’처럼 인간 세계 원리를 담은 기호적인 형상을 남긴다.
그러나 ‘어보’의 세계는 ‘인보’의 세계와 다르다. “이 물고기는 헤엄을 잘 치고 도약을 잘해서 사람 그림자만 보아도 도망간다.” “이 물고기는 사람에게 곤란을 당하면 날아서 벌판에 떨어진다.” 세상을 바로잡을 원리를 파악했다는 성리학적 기쁨이 아니라 모르는 대상을 알아가는 데서 오는 몰정치적 기쁨이 ‘자산어보’에는 있다. 원리를 모른다고 인정하는 사람만이 미지의 세계를 향한 겸허한 지식 탐구에 나설 수 있다. 그는 인간의 정치를 떠나 비인간의 사물 세계로 망명한 것이다. 그는 인적이 점점 드물어지는 사물의 세계로 점점 더 깊이 들어간다. 시야에서 사라지기 전 마지막으로 고개를 돌려 말한다. 절 잊으세요. 그게 사실 그다지 어려운 일도 아니잖아요?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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