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서하듯 직직..해방둥이가 그린 동심
[경향신문]
그림 그리던 유년 시절 회상
“지금도 빈 화면 보면 즐거워”
낙서 같은 그림일까, 그림 같은 낙서일까. 갤러리에 들어서자마자 마주치는 샛노란 화면이 눈부시다. ‘12345678910….’ 다가가면 엉뚱하게도 숫자가 빼곡히 써 있다. ‘65+2=67’ 덧셈도 보인다. 귀여운 토끼 얼굴, 세모꼴 산, 네모난 창문. 알 수 없는 쪼가리들도 여기저기 붙어 있다. 어린아이가 신나게 놀다 간 흔적을 그림이라고 걸어놓은 것일까. 유년의 감각을 재료 삼아 반추상 작업을 해온 오세열의 신작이다. 작가는 지난해 가을 경기 양평 작업실 인근 용문사에 바람을 쐬러 갔다가 은행잎이 바닥에 수북이 쌓인 모습을 본 기억을 화폭에 옮겼다고 했다.
학고재에서 열리고 있는 오세열 개인전 ‘은유의 섬’은 분주히 옮기던 걸음을 멈추고 가만히 숨을 고를 수 있는 전시다. 해방둥이인 오세열은 전쟁의 폐허 한가운데서 유년기를 보냈다. “어린 시절 하루 중 그림 그리는 시간이 제일 소중했다”고 77세의 화가는 회상한다. 소박한 화폭에서 아이와 노인의 마음이 공존하는 이유다.
사람들은 작가에게 그림 속 숫자와 기호들이 무슨 의미냐고 묻는다. “특별한 의미는 없어요.” 굳이 설명하자면 사람이 평생 숫자에 파묻혀 살지 않냐고 답한다. 사실은 “어린아이들이 직직 그리듯이” “그때 그때 낙서하듯이”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의 그림을 보며 공책을, 칠판을 떠올리기도 한다.
쉬워 보이지만, 쉬운 그림은 아니다. 그는 화면을 ‘몸’으로 바라본다. 캔버스 위에 물감을 겹겹이 쌓아올려 바랜 빛깔의 바탕을 마련하고, 못이나 면도날 같은 뾰족한 도구로 긁어 낸다. 몸을 깎아 내듯 화면을 구성하다보면 다시 물감층 아래 표면과 마주하게 된다. 화면 위에는 꽃과 새처럼 살면서 만난 것들이 가만히 자리 잡는다. 길 가다 주운 단추나 포장지, 숟가락 등 일상의 오브제도 붙는다. 작가의 기억과 행위, 그리고 외부로부터 온 소박한 사물들이 화면 위에서 어우러지는 셈이다. 그리고 보는 사람들의 상상을 끌어낸다. 화면 위 숫자들이 산수 문제 같다가도, 빠르게 흘러가는 달력 속 날짜들처럼 보인다.
“지금도 빈 화면을 보면 낙서하고 싶고 즐거워요.” 동심을 찾아가는 여정이다. 전시는 어린이날인 5월5일까지.
배문규 기자 sobbell@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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