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다해도 '공포의 2년'..열번 찍어 안넘어가면 '스토킹'입니다

김주현 기자 2021. 4. 18.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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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절해도 끝까지 순애보?..이젠 '스토킹'(上)

◇전화번호 거절에도 석달간 쫓아왔다 '이 남자의 정체는'

"저기요."

2년 전 여름 서울 성동구 길거리에서 한 남성이 집에 가던 이혜선씨(가명·29)를 불러세웠다. 이 남성은 이씨에게 호감이 있다며 전화번호를 물었다. 이씨는 거절했지만 남성은 집 문을 열고 들어갈 때까지 이씨를 쫓아왔다. 그 때부터 이씨는 3개월 동안 이 남성에게 스토킹을 당했다.

그날 이후 이씨는 밤 길을 걸을 때마다 인기척을 느꼈다. 이씨는 "집 근처에 누군가 따라오는 기분이 들었다"며 "나를 쫓아오는 사람이 누구인지 확인하려고 집 앞 편의점에 몇 시간 서 있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씨가 편의점에서 나오면 이 남성은 어둠 속에서 다시 나타나 이씨를 뒤쫓았다.

남성의 스토킹은 더 심해졌다. 1층 원룸에 살던 이씨가 창문을 열어두면 남성은 창문 틈으로 집 안을 들여다봤다. 또 이씨의 남자친구가 이씨와 팔짱을 끼고 걸을 땐 멀리서 둘을 노려보며 쫓아왔다고 한다. 이씨는 "매일 집 근처에 찾아와 지켜보고 있으니 밖에 나가기도 힘들었다"며 "항상 감시당하는 느낌이었고 트라우마가 생겼다"고 했다.

이씨는 경찰에 스토킹 피해를 신고했지만 이렇다할 도움을 받지 못했다. 경범죄 위반(지속적 괴롭힘)으로 처벌하려면 피해자가 3번 이상 명시적 거부 의사를 보여야 했기 때문이다. 이씨가 남성을 직접 만나 대화한 건 이씨의 번호를 물어봤던 첫 날이 유일했다.

이씨는 "가족들이 걱정할까봐 스토킹 사실을 알리지도 못했고 남자친구와 몇몇 지인들에게 알린 게 전부"라며 "만약 그 남성이 경범죄로 처벌받았어도 혹시 보복할까 두려웠다"고 했다. 이어 "3개월 동안의 기억은 끔찍하고 무서웠다"고 했다.

◇"스토킹 피해자 10명 중 9명 법적 보호 못 받는다"


'노원구 세 모녀 살인사건'도 스토킹에서 시작됐다. 피의자 김태현(25)은 지난해 11월 피해자 큰 딸 A씨를 온라인 게임에서 알게 됐다. 이후 지난 1월 A씨를 오프라인에서 만난 이후부터 스토킹했다.

A씨가 거부 의사를 보였지만 김태현은 집 주변을 맴돌았다. 김태현은 A씨가 계속 연락을 피하자 앙심을 품고 범행을 저질렀다. 경찰은 김태현에게 살인 혐의 외에도 스토킹(지속적 괴롭힘) 혐의도 적용했다.

경찰청에 따르면 최근 3년간 112로 들어온 스토킹 신고 가운데 사법처리된 건 12.6% 정도다. 지난해의 경우 스토킹 범죄 신고 10건 중 1건(10.8%) 정도만 사법처리로 이어졌다. 나머지 9명은 사법기관의 도움을 받지 못했다는 의미다.

스토킹 가해자에 대한 사법처리도 가벼웠다. 대부분이 통고처분이나 즉결심판에 그쳤다. 그간 스토킹은 법적 규정이 없었고, 처벌도 없었다. 경범죄처벌법 3조 '지속적 괴롭힘'으로 분류돼 가해자는 10만원 이하의 벌금, 구류, 과료형 처벌을 받았다. 암표매매(벌금 20만원)보다 못한 처벌 수준이다.

◇스토킹, 과도한 구애 아니다. '스토킹=범죄' 인식 생겨야


스토킹 처벌법이 지난달 24일 국회를 통과했지만 스토킹도 범죄라는 인식은 아직 부족하다. 미디어에서는 스토킹을 순애보, 짝사랑 등으로 포장했다. 집이나 직장에 불쑥 찾아가는 드라마 속 주인공이 아름답게 포장됐다.

한국여성민우회가 2018년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지상파·종편·케이블 등에서 반영한 드라마 120개(총 2946편) 중 스토킹으로 볼 수 있는 것이 62건이 있었다.

전문가들은 스토킹이 피해자에게 정신적 고통을 초래하는 범죄라는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지적한다. '열 번 찍어 안 넘어 가는 나무 없다'는 이제 옛말이 됐다. 거절했는데도 '찍으면' 이젠 스토킹이다.

권김현영 여성현실연구소장은 "'노원구 세 모녀 살해사건' 피의자 김태현뿐만 아니라 다른 스토킹 범죄 피의자들은 공통적으로 피해자를 완벽하게 통제하고 싶은 욕구에서 비롯된다"며 "이제 스토킹을 과도한 구애 행위로만 보면 위험하다"고 했다.

그는 "상대방이 연락을 거부하면 연락 빈도가 줄어드는 게 정상이지만 스토킹하는 사람은 더 심해진다"며 "스토킹을 과도한 구애 행위로 보는 것이 문제를 키웠고, 스토킹을 사적 관계에서 벌어지는 해프닝으로 보는 건 대단히 위험하다"고 했다.

아울러 전문가들은 스토킹이 또다른 범죄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했다. 곽대경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스토킹은 심각한 범죄 행위로 방치하면 폭력, 살인 등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높다"며 "피해자들은 가해자들의 무리한 집착으로 창살 없는 감옥에 사는 것과 같다"고 했다. 이어 "스토킹 범죄에 대한 사회적인 인식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했다.

홍순빈·김주현 기자

신고 즉시 '접근금지'… 22년 걸린 스토킹 처벌법, 아직 멀었다

# 지난해 11월 뮤지컬 배우 배다해씨를 2년간 스토킹한 20대 남성이 구속됐다. 혐의는 '스토킹'이 아닌 모욕과 협박, 명예훼손 등이다. 이 남성은 2년 동안 배씨가 출연하는 공연장에 찾아가 '내가 보이느냐'고 협박하고 SNS로 끊임없이 연락하거나 악성 댓글을 달았다. 남성은 배씨에게 "벌금형으로 끝난다", "합의금 1000만원이면 되냐"며 비아냥댔다. 배씨는 고소 사실을 밝히며 "신변 보호 요청을 하고 신고해도 별다른 조치가 없단 현실을 깨닫고 '죽어야 고통이 끝날까'란 생각에 절망했다"고 말했다.

오는 9월부터는 배씨가 이 남성을 모욕이나 협박이 아닌 '스토킹 처벌법'으로 신고할 수 있게 된다. '스토킹' 피해자는 경찰 신고 직후 가해자로부터 접근금지 보호도 받을 수 있다. 경찰은 즉시 스토킹 가해자에게 처벌 가능성을 경고해야 하고, 가해자는 경범죄나 협박죄가 아닌 '스토킹 처벌법' 위반으로 처벌받게 된다.

지금까지는 '스토킹 범죄'가 따로 명시되지 않아 가해자가 경찰에 입건되더라도 '경범죄'(지속적괴롭힘)로 처벌됐다. 피해자가 느끼는 고통에 비해 가벼운 처벌에 그쳐 스토킹이 심각한 범죄라는 인식이 사회적으로 자리잡지 못했다는 지적이다.

◇앞으론 '스토킹 신고 시' 경찰이 즉시 현장서 조치


지난달 국회에서 '스토킹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법률 제정안(이후 스토킹처벌법)'이 통과돼 오는 9월 시행된다. 법안 첫 발의 이후 22년 만이다.

여성단체와 법조계는 법안 통과로 가해자에게 '처벌 받을 수 있다'는 인식을, 피해자들에겐 '보호받을 수 있다'는 인식을 심어줄 수 있다고 의미를 보탰다. 여성단체가 지적하는 '피해자 보호' 공백은 앞으로 개선해야할 과제다.

법안이 시행되면 경찰은 신고 받은 직후 스토킹 행위자에게 스토킹을 중지할 것을 통보하고 처벌 가능성을 경고해야 한다. 또 스토킹 행위자와 피해자를 분리하고, 피해자 동의 하에 상담소나 보호시설로 인도해야 한다.

처벌법 4조(긴급 응급조치)는 신고를 받은 경찰이 직권으로 △스토킹 행위 상대방에 대한 100m 이내 접근금지 △전기통신을 이용한 접근금지 등을 할 수 있게 규정했다. 이를 따르지 않으면 1000만원 이하 과태료에 처할 수 있다.

스토킹 범죄 재발 우려가 있다고 판단되면 경찰의 신청과 검찰의 청구로 스토킹 행위자를 유치장이나 구치소에 최대 1개월까지 유치(잠정 조치)할 수도 있다. 이를 따르지 않으면 2년 이하 징역 또는 2000만원 이하 벌금에 처한다.

피해자가 직접 접근금지가처분신청을 할 수도 있다. 상대방의 과도한 연락기록, 위협 행위를 증명할 수 있는 영상과 사진, 녹취, 병원 진단서와 경찰 출동기록 등을 증거로 법원에 신청할 수 있다. 법원은 심리 후 피해자 집, 직장 등의 100m 이내 접근과 전화, 메시지 등을 통한 접근을 금지할 수 있다.

◇'스토킹=범죄' 인식 이제 시작...적극 신고 발판 마련 의미

전문가들은 법안이 가해자에겐 이것이 '문제적 행동', 피해자에겐 '보호받을 수 있는 일'이라는 인식을 심어주게 됐다고 평가했다. 법안이 피해자에게 보다 적극적으로 신고할 수 있는 발판을 제공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고 봤다.

김혜정 한국성폭력상담소장(활동명 '오매')은 "처벌을 통해 문제적 행동이 무엇인지 정확하고 강력하게 알려줄 수있다"며 "처벌과 예방은 대립되는 게 아니고 같이 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스토킹 자체가 큰 폭력이고 추후 더 큰 폭력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범죄'"라며 "처벌받을 일이라는 인식이 자리잡을 필요가 있다"고 했다.

여성단체에서는 피해자에 대한 실질적 보호조치가 보완돼야 한다고 지적한다. 특히 피해자 보호범위가 '직접적 피해자 본인'으로 좁게 설정된 점이 한계점으로 꼽힌다.

이수연 한국여성변호사회 공보이사는 "이번 노원구 사건을 보면 가족도 스토킹 피해의 대상이 되는데 법안이 이를 포괄하지 못한다"며 "직접적 스토킹 피해자만 보호받을 수 있게 된 건 아쉬운 부분"이라고 말했다.

임소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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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현 기자 naro@mt.co.kr, 홍순빈 기자 binihong@mt.co.kr, 임소연 기자 goatlim@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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