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에 비전문가 위한 '알기쉬운요약' 작성 신영전 교수 "연구는 누구의 것인가"
[경향신문]
“15~18세 청소년에게 설명한다고 생각해달라”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전문용어를 쓰지 말라” “비전문가가 읽고 이해가 됐는지 확인하라” 보건사회연구원이 발간하는 학술지 <보건사회연구> 최신호(제41권 제1호)의 첫머리 논설에 신영전 편집위원장이 적은 문장이다. 신 위원장은 한양대 의대 예방의학과 교수이다.
<보건사회연구>는 올해부터 모든 게재 논문의 첫장에 ‘알기 쉬운 요약’을 작성하기로 했다. 논문 작성자가 논문 내용을 비전문가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정리하는 것이다. 국내 학술지에선 처음 시도되는 작업이다.
경향신문은 15일 서울 성동구 한양대 의대 연구실에서 신 교수를 만나 ‘알기 쉬운 요약’을 시작한 계기와 앞으로의 바람을 물었다.
-‘알기 쉬운 요약’을 마련한 계기가 궁금하다.
“10여년 전 일부 외국 학술지에서 ‘일반인을 위한 요약(lay summary)’이란 코너를 보고 한국에도 도입하면 어떨까 생각한 적이 있다. 과학 분야의 연구 성과가 전문가들 사이에서만 논의되고, 비전문가인 대중들에겐 잘 전달되지 않는다는 문제의식이 있었다. 연구가 전문화될수록 자기네들끼리만 아는 언어(jargon)를 쓰는 경향이 있는데, 비전문가 입장에서는 말 자체를 이해하지 못해서 논의를 따라가지 못하게 된다. 연구 내용이 이따금 대중매체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왜곡되거나 잘못 해석되는 모습도 봤다. 연구물은 연구자의 헌신에서 나오지만 연구자의 교육과 연구, 장비와 시설에 들어가는 비용은 상당부분 시민이 내는 세금으로 충당된다. 특히 보건 연구 다수는 인구학적 자료나 시민·환자가 제공한 설문을 근거로 이뤄지는데 정작 시민이 연구 결과를 보고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문제라고 생각했다. 2018년 <보건사회연구> 편집위원장직을 맡게 되면서 ‘알기 쉬운 요약’을 시도할 기회가 생겼다. 편집위원들이 전원 찬성해줬고, 내부에 태스크포스를 꾸려 6개월 동안 구상하고 여러번의 회의를 거쳤다.”
-과학·의학 등 일부 분야의 연구와 정책 논의는 전문가들의 몫이란 인식이 강하다.
“전문가들이 중요한 역할을 맡는 건 사실이지만, 전문가만의 것이 되어선 곤란하다. 시민이 논의에서 소외되면 과학기술은 돈이 많거나 권력을 가진 일부 계층의 전유물이 된다. <보건사회연구> 최신호 논설에 ‘언던 사이언스(undone science)’라는 개념을 적었다. 사회 운동이나 시민사회 조직에서는 가치가 있다고 여기지만 지원이 없는 등의 이유로 이뤄지지 않는 연구를 뜻하는 말이다. 국외 한 연구단체가 조사한 결과 (보건 관련) 전 세계 90% 연구가 고소득 국가의 보건의료 이슈를 다룬다. 연구 주제 선정부터 그런 편향이 생긴다. 예를 들어 ‘아프리카 지역에서 많은 사람이 호흡기질환으로 사망하는데, 부족한 연료 대신 말린 소똥을 태우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면 먼지가 안나는 화로를 만들까’, 이런 연구를 미국의 어떤 연구자가 한다면 논문이 나오기도 어렵고 교수가 되기도 힘들다. 그 분야를 앞서 전공한 사람이 없으니 논문을 선보일 기회가 적고, 돈이 안되니까 지원을 받기도 어렵다. 다른 나라에 대한 연구라서 시민들의 지지를 받을 확률도 적다.
국내 건강 불평등(사회·경제적 불평등이 건강에도 격차를 가져온다는 개념) 연구도 마찬가지다. 애당초 연구 자체가 안 이뤄진다. 그러면 사회 정책도 기울어진다. 정부나 지방자치단체가 뭔가를 시도할 때, 과학적 근거나 사례를 요구하지 않나. 건강 불평등이 문제라는 증거나 이를 해소하기 위해 어떤 정책이 효과적이라는 근거가 없다. 정부 정책도 건강불평등 해소를 위한 방향으로 입안되지 않는다. 국가, 기업, 전문가들은 (이에 대해) 반대다. 논설에서 이들을 두고 ‘철의 삼각’이란 말을 썼는데, 거대한 재력과 공권력은 자신들에게 도움이 되는 전문가를 확보하고 필요한 연구를 수행하기 쉽다. 연구 윤리 등 과정을 심사하는 기관이 마련됐지만 비전문가들은 거기에 들어가도 논의에 끼기가 어렵다. 요즘처럼 과학 연구에 들어가는 비용이 수십억, 수천억원에 달하는 상황에서는 그런 편향이 더 커진다.”
신 교수는 대통령 직속 국가생명윤리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된 지 2년만인 지난 2019년 사직서를 제출했다. 위원회에서 비의료기관 유전자검사 항목 확대에 반대했지만, 산업통상자원부가 검사 항목을 확대하고 유전자검사를 영리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연구사업을 승인하면서 사직 의사를 밝혔다. 당시 그는 영리 유전자 검사가 오용돼채용에서 차별이 확대되고 낙태, 고용가입 거절이 늘어나는 등 부작용이 일어날 수 있다고 우려했다. 특히 이런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기 어려운 노인, 장애인 등 취약계층이 피해를 볼 수 있다고 봤다.
-학술논문을 알기 쉽게 소개한다고 그런 문제가 해결될 수 있나.
“당연히 그렇지 않다. 문제는 뿌리깊고 거대한 반면 우리가 한 시도는 미미하다. 하지만 작은 변화를 이끌어낼 수는 있다고 본다. 일단 연구자들에게 상징적인 효과를 줄 수 있다. <보건사회연구>는 꽤 큰 학술지고 순위도 높다. 연구자들에게 게재 비용도 받지 않아서 선호도가 높다. 이곳에 논문을 싣고 싶어하는 연구자가, 한번이라도 비전문가들을 생각한다면 어떨까. ‘내 말을 이해할까?’ ‘비전문가에겐 이 연구가 어떤 의미를 가질까’ 생각하는 문턱이 생기는 것이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작게는 연구를 설명할 때, 크게는 연구 주제 선정부터 비전문가 시민을 생각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다른 측면으로는 수용자인 시민들의 오해를 줄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시민들은 논문을 직접 읽기도 하지만 대중매체·SNS 등을 통해 누군가가 요약하고 해석한 내용을 전달받기도 한다. (연구의) 중간 전달자가 이따금 (정부가) 잘못된 백신회사를 선택했다거나 대통령이 무슨 백신을 맞는다거나, 이런 정치적인 이유가 엿보이는 왜곡을 하는데, 참 유감이지만 막기가 어렵다. 다만 나쁜 의도가 없는데 (언론 등 중간전달자가) (연구 내용을) 이해를 못해서 잘못 해석하고 전달하는 건 우리 시도로 줄일 수 있을 것 같다.”
-코로나19 확산과 방역, 백신을 두고도 오해가 많았다.
“백신의 효과와 부작용에 대해 온갖 설이 돌았는데, 과장된 측면이 있었다. 백신뿐 아니라 모든 신약은 효과나 부작용에서 불확실성이 크다. 어떤 제약회사에서 어떤 공정으로 만들어지는지에 따라서도 많은 것이 달라진다. 오히려 코로나19 백신은 전 세계의 관심과 집중을 받는 상황이라 투명성이 높았다. 부작용처럼 보이는 증상이 눈에 잘 띄는 것도, 다른 백신 대비 모니터링을 많이 하기 때문이라고 봐야 한다. 이런 내용을 고려해 종합적으로 전달하지 않고 부작용이라며 자극적으로 알리거나, 정치적으로 왜곡한 것은 문제라고 본다.”
-전문가로 분류되는 사람들이 오히려 부정확한 내용을 알리기도 했다.
“같은 학문이라도 세분화가 많이 진행됐는데, 잘 모르면서 말하는 경우가 있는 것 같다. 정치적인 고려나 다른 이유가 있을 수도 있고, 대강 안다고 생각해서 그러는 것일 수도 있다. 전문가라도 모르는 게 많다. 의학이건 과학이건 무지가 본질이다. 고혈압 환자의 95%는 원인을 모른다. 하지만 의사들은 원인을 모르겠다고 말하지 않고, 유전자, 스트레스 등을 거론한다. 그렇게 말 안해주면 환자들부터 ‘저 사람 실력 없는 거 아냐’ 생각하고 싫어한다. 전문가는 정확하게 얘기했는데, 용어 사용 등 전달에 미숙해서 오해를 야기하는 경우도 있다.
신 교수는 많은 시민이 <보건사회연구> 게재 논문을 보고 이해할 수 있도록 섬세한 장치를 마련했다. <보건사회연구>는 지난해부터 100% 전자출판 방식으로 전환했다. 종이 절약이란 고려도 있었지만 시각장애인이나 외국인의 소리 전환, 번역기 활용을 쉽게 하려는 의도가 앞섰다. ‘알기 쉬운 요약’의 원조인 ‘lay summary’도 직역하면 ‘일반인을 위한 요약’인데, 자칫 일반인과 비일반인을 구분짓는 차별로 비칠 우려가 있어 고쳤다.‘비전문가’를 염두하라는 작성 지침도 같은 생각에서 나왔다. “비전문가도 꼭 좋은 단어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특정 분야 비전문가’라는 말을 쓰면 너무 길어져서(웃음)….” 신문사 가이드라인처럼 작성했던 ‘중학생이 봐도 볼 수 있게’ 문구도 학교를 다니지 않는 미성년자들을 고려해 ‘청소년’으로 바꿨다.
-코로나 관련 정부 대응에 아쉬움은 없었나.
“양가적이다. 확산 초기부터 투명성을 원칙으로 삼은 것은 훌륭한 결정이었다. 일본은 올림픽 개최를 앞둬서 그런지 모르지만, 감염 상황을 숨겼다가 확산 규모를 키우고 국민의 신뢰를 잃었다. 우리 정부의 태도는 방역 정책에 대한 국민적 신뢰를 만든 버팀목이었다. 하지만 그 투명성이 ‘일방적인 투명성’인 것은 아쉽다. 코로나19 사태가 장기화되면서 시민들은 지쳐가는데 관련 내용은 복잡하고 전문적이라 이해하기가 어렵다. 그냥 확진자 몇명 나왔고 앞으로 어떻게 조치한다 이런 얘기만 보게 되는데, 시민들이 궁금한 내용을 해소하거나 정책 결정에 참여해 영향을 미치는 경로는 없는 것 같다.
과학기술 연구와 관련한 독립 조직을 설치해야 한다. ‘알기 쉬운 요약’을 시작하긴 했지만 시민들이 무슨 이슈가 터질 때마다 관련된 논문을 찾아보고 익히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황우석 사태가 터지면 유전공학을 공부하고, 한국토지주택공사(LH) 사태가 터지면 법조문을 익혀야 하나. 전문가들로 구성된 국가인권위원회에 준하는 조직을 만들고 연구를 상시적으로 모니터링해야 한다. 정부와 기업 모두의 입김에서 자유로운 독립 감시 기관이 생겨 ‘시민학자’ 역할을 하면 시민들이 연구에 대해 신뢰를 할 수 있다. 사회적으로 영향이 큰 주요 연구는 시민회의 등을 개최해 시민 감시와 참여를 유도할 수도 있겠다. 과학적 연구라 해도 같은 사안에 대해 연구자들이 다른 결론을 내놓는 경우가 많다. 이때 시민들에게 알기 쉬운 용어로 설명하고, 결정권을 줘야 한다. 내가 쓴 논설 제목처럼 ‘연구는 누구의 것인가’를 생각해 봐야 한다.”
조문희 기자 moon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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