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 몸통 잡아달라" 고발장 낸 보이스피싱 '전달책'
40대 여성 A씨는 최근 보이스피싱(Voice Phishing) 범죄에 연루돼 검찰에 기소됐다. 보이스피싱 조직에 속은 피해자로부터 현금 수백만 원을 받아 또 다른 조직원에게 전달했는데, 보이스피싱 범죄에서 전달책·수금책·운반책 등으로 불리는 역할이다. 범죄를 기획하는 총책 '상선(上線)'의 하수인 격이라 '하선(下線)'이라고도 한다.
오랫동안 의류 판매업에 종사한 A씨는 최근 코로나19 사태로 직격탄을 맞았다. 지난해 말 동네 마트 한편을 빌린 가설(假設) 판매장의 관리자로 취직했지만 손에 쥐는 돈은 한 달에 100만 원 남짓이었다. 때마침 '판매 직원을 모집한다'라는 내용의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를 받고 솔깃했다. 연락해보니 회사 인사 담당자라는 사람은 "스마트폰 메신저로 얘기하자"고 했다. A씨는 "뭐 하는 회사냐고 물으니 합법적 카지노업체라고 하더라. 구인 문자와 달리 판매직은 아니지만 간단한 심부름만 하면 적잖은 수입을 보장해준다고 했다. 그때 수상하다는 것을 알아챘어야 했다"고 토로했다.
"중국·필리핀에 본거지…검거 어려워"
경찰청에 따르면 지난해 경찰이 접수한 보이스피싱 범죄는 3만1681건, 피해 금액은 약 7000억 원이다. 매일 19억 원의 사기 피해가 발생한 셈이다. 2019년(7만2488건, 6720억 원) 대비 범죄 건수는 감소했지만 피해 금액은 줄지 않았다. 2016~2020년 누적 피해액은 2조 원에 가깝다. 최근 범죄 수법도 한층 교묘해졌다. 보이스피싱 조직은 외국에서 걸려온 피싱 전화의 번호를 변조해 표기하는 '사설 중계기'를 국내 가정집이나 원룸에 설치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집 주인이나 세입자를 기망·포섭해 중계기 설치 대가로 금품을 제공하기도 한다. 보이스피싱 피해가 줄지 않는 이유에 대해 전문가들은 "외국에 본거지를 둔 총책을 검거해 발본색원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라고 입을 모았다.
보이스피싱 범죄 수사 경험이 많은 경찰 관계자는 "보이스피싱 범죄 본거지는 대부분 중국에 있다. 필리핀에 근거지를 마련한 조직도 일부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며 "총책의 국적은 중국인이 다수이지만 한국인 총책이 국내 지인을 중국, 필리핀 등으로 유인·포섭해 대규모 보이스피싱 조직을 운영하는 경우도 적잖다"고 짚었다. 보이스피싱 사건을 여러 번 수임한 B 변호사는 "수사 당국이 체포했다는 보이스피싱 조직은 사실상 전달책 등 하선이 대부분이다. 총책이 체포된 경우는 많지 않다. 상선은 사용자를 특정하기 힘든 메신저 프로그램으로 지령을 내리기 때문에 소재를 파악하는 것 자체가 어렵다"고 말했다.
전달책에 대한 구형·선고에서 중요한 변수는 자신이 범죄에 가담한 사실을 얼마나 명확히 인지했는지 여부다. 총책을 함께 검거하는 경우는 드물기 때문에 전달책이 어느 정도 범행에 관여했는지를 밝히기도 쉽지 않다.
"나도 속았다"
최근 A씨는 "보이스피싱 범죄 조직의 몸통을 검거해 처벌해달라"며 경찰에 고발장을 제출했다. 이유를 묻자 "나로 인해 피해자가 발생한 것은 사실이다. 다만, 나도 보이스피싱 조직에 속아 범죄인 줄 모르고 그들에게 동조했다. 죄인이 죄인을 고발했다고 손가락질할지 모르나, 주범을 반드시 잡아 법정에 세워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보이스피싱 전달책의 '범의(犯意)'를 명확히 파악하지 못할 경우 전달책을 처벌해선 안 된다는 취지의 판례도 있다. 2019년 12월 이형주 당시 서울동부지방법원 판사는 피해자의 돈을 보이스피싱 조직에 전달한 혐의를 받은 피고인들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당시 피고는 20대 중국인 유학생들로 전화 유인책에게 속은 피해자의 돈 2000만 원을 범죄 조직 계좌로 송금했다. 검찰은 "사기 범행을 인식했음에도 범행을 방조했다"며 사기 방조 등 혐의로 피고인들을 기소했다.
당시 재판부는 판결문을 통해 이례적으로 보이스피싱 범죄 수사 관행을 비판했다. △전달책만 검거·엄벌해서는 주범들의 추가 범행을 억제할 수 없고 △보이스피싱 조직에 현혹될 또 다른 전달책의 범죄 가담을 방지할 수 없기에 △범죄 본거지가 있는 외국의 사법기관과 공조로 주범을 검거해야 한다는 취지였다.
4월 13일 '주간동아'와 전화통화에서 당시 판결을 내린 이형주 변호사는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에게 유리하게'라는 법언이 있다. 보이스피싱 피해가 워낙 크다 보니 이런 형사법의 대원칙이 왜곡되는 듯하다"며 "판사는 사건의 사실관계를 따져 판결할 뿐, 특정 범죄를 엄벌하자는 형사정책 방향에 휩쓸려선 안 된다. 당시 피고인들이 고의로 보이스피싱 사기에 가담했다고 보기 어려워 무죄 판결을 내렸다"고 밝혔다. 그는 "불경기에 의한 생활고로 '잠재적 전달책'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자신의 행동이 범죄라는 사실을 명확히 인지한 경우에는 엄단해야 하지만, 알바에 나섰다 범행에 연루된 이를 무조건 엄벌에 처할 필요가 있느냐"고 반문했다.
다른 시각도 있다. 전달책이 보이스피싱 범죄에서 중요한 구실을 할 뿐 아니라, 범행 의도도 뚜렷하다는 것. 김계환 변호사는 "전달책은 대부분 자신의 행동이 범죄에 연루됐다고 의심할 수밖에 없다. 상선이 피해자를 만나 금융감독원 직원을 사칭하라는 등 수상한 지시를 하기 때문"이라며 "3~4회 이상 반복적으로 범행에 가담하고 금액도 수천만 원에 이르는 등 피해가 크다면 지금 같은 수준으로 실형을 구형·선고해야 한다"고 말했다.
"피해자 극단적 선택도…중대 범죄 엄벌해야"
수사 당국의 판단도 비슷했다. 경찰 관계자는 "은행들이 출금 지연 등 보이스피싱 대책에 나서 계좌 이체가 어려워지자 최근 보이스피싱 범죄 60% 이상이 '대면편취'로 이뤄지고 있다. 피해자를 직접 만나면 전달책도 자신이 범죄에 연루됐음을 직감할 수밖에 없다"며 "현장에서 검거된 수거책 상당수가 위조 신분증이나 문서를 소지하고 있다. 피해자를 속이고 돈을 받아내기 위해서다. 이 정도 전달책은 범행에 상당히 깊숙이 개입했다고 봐야 한다"고 짚었다.김계환 변호사는 피해자가 겪은 고통도 무시해선 안 된다고 지적했다. 그는 2010년대 초반 '카드론'(신용카드 대출) 보이스피싱 피해자를 여럿 변호한 바 있다. 피해자들의 처지를 두고 김 변호사는 "위암 수술을 받은 피해자가 '깡소주' 여러 병을 연거푸 들이켜고 급사하기도 했다. 사실상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다. 보이스피싱은 피해자와 가족을 절망으로 몰아가는 중대한 범죄"라고 말했다.
김우정 기자 frien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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