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가 망하면 중국도 망하는 시대, 과학으로 기후위기 대응해야"
[경향신문]
사물은 각자 고유의 색을 ‘갖고’ 있다. 그럼 색깔은 어디서 생긴 것일까. 물리학에 따르면 우리는 사물에 닿은 태양빛이나 조명 중 흡수되지 않고 반사된 빛을 본다. 형광등 밑의 사과를 보자. “사과는 우리 눈에 빨간색으로 보인다. 사과 표면이 빨주노초파남보 중에서 주로 빨간색을 반사하고 나머지 색의 빛들은 흡수하기 때문이다. 병아리가 노란 이유도 마찬가지다. 햇빛이 병아리의 깃털에 부딪히면 주로 파란색 계열의 빛이 흡수된다. 흡수되지 않고 반사되는 빨간빛과 초록빛이 섞여 눈에 들어오면 우리는 노란색을 느낀다.”<빛의 핵심>(고재현·사이언스북스) 비슷하게 흰색 사물은 모든 빛을 반사하고, 검은색 사물은 모든 빛을 흡수해 그렇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사물이 어떤 빛은 흡수하고 어떤 빛은 반사하는지 결정하는 것은 무엇인가. 지난 4월 13일 광물리학자인 노도영 기초과학연구원(IBS) 원장을 만나 물어봤다. ‘식전 요리’ 정도로 생각할 수 있을 질문도 그는 허투루 넘어가지 않았다. “우주는 빛(에너지)과 물질이 평형을 이루고 있다. 빛은 물리적으로 해석하면 전자기파다. 빛을 흡수하면 물질의 에너지가 바뀐다. 에너지가 들어올 때 가장 잘 움직이는 건 가장 가벼운 전자다. 전자가 빛의 에너지를 흡수해 더 높은 운동 에너지를 갖고 그 빛(광자)은 없어진다. 반대로 자기의 에너지를 버리고 낮은 에너지로 가면 거기서 빛이 나온다. 양자역학에 따르면 전자는 연속적인 에너지를 가질 수 없다. 전자가 갈 수 있는 에너지 준위는 물질에 따라 다르다. 결국 전자들의 에너지 분포에 따라 어떤 색을 흡수하고 반사하는지가 결정된다.” 더 자세히 설명했지만 대략 이해한 바로는 이런 내용이었다.
노도영 원장은 방사광 분야에서 국내외 학계를 이끄는 석학으로 평가받는다. 1985년 서울대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 물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극미세초고속X-선과학연구센터장,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심의위원, 한국방사광이용자협회 회장, 광주과학기술원(GIST) 대학장 등을 역임하며 과학연구와 행정에서 두루 왕성하게 활약했다. 2019년 11월 22일 제3대 기초과학연구원장에 선임되기 전까지 광주과학기술원에서 물리·광과학과 교수로 일했다. 한국을 대표하는 기초과학연구기관의 수장을 맡은 지 이제 1년 반이 지났다. 남은 임기는 3년 반. 장기 기초과학연구를 안정적으로 추진하라는 취지에서 과학기관장 중 임기가 5년으로 가장 길다.
IBS의 연구 대상은 크게 우주, 물질, 생명의 세가지로 나눌 수 있다. 지난 4월 12일 IBS의 액시온 및 극한상호작용 연구단은 국제공동연구로 뮤온(전자의 무거운 형제 격으로, 고에너지 입자들이 충돌할 때 발생하는 입자)의 흔들림을 측정해 뮤온이 현대 물리학의 예측과 다르게 행동함을 밝혀냈다. 새로운 기본입자의 존재 가능성을 밝힌 연구라는 평가를 받는다. IBS의 또 다른 연구단들은 원자가 모여 결정을 이루는 핵생성 과정을 관찰하고, 26개 원자로 구성된 반도체를 촉매로 사용해 이산화탄소를 유용 유기물질로 전환하는 데 성공했다. 세계 최초의 연구들이 한달여 사이에도 여러건이 나올 정도다. IBS는 설립 10년이라는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기초과학연구소로 성장했다. 하지만 아직 독일 막스플랑크연구소나 일본 이화학연구소와 비교하기에는 부족하다. 노도영 원장에게서 한국 기초과학과 IBS의 미래를 들었다.
-현재의 기후위기를 인류세로 해석하기도 한다.
“현재는 인간이 지구에 가하는 변화가 충분히 커서 그 변화에서 자유롭지 못한 상황이다. 인류가 탄생한 후 그간 인간 간의 갈등이 가장 큰 문제였다면 지금은 인간과 자연의 갈등이 문제이다. 초연결 시대로 불릴 정도로 인간 간의 상관관계도 너무 높다. 대기중 이산화탄소 농도가 지수적으로 증가한다는 것은 어떤 시점에서 결정적 변화가 나타날 수 있다는 뜻이다. 자연은 복원력이 있는데 변화가 클수록 복원력의 크기도 크다. 인류가 그 변화에 적응할 수 있느냐가 위기의 본질이다. 과거 로마가 망해도 중국엔 영향이 없었지만, 지금은 로마가 망가지면 중국도 망가진다. 인류 공동체적으로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다.”
-이런 시기에 과학의 역할은.
“자연을 이해하는 과학이 더 중요해질 수밖에 없다. 코로나19도 자연의 반격이라고 할 수 있다. 과학자는 이 싸움을 조화롭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모든 것이 기후변화로 연결된다는 점에서 우리나라가 기후변화와 관련한 연구 능력을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부산대 기후물리연구단의 의미가 크다.”
-어릴 때부터 과학에 관심을 가졌는가.
“중학교 때 학교를 4㎞ 이상 걸어다녔다. 힘들어서 망가진 자전거를 구해 고쳐 타고 다녔다. 그때 바퀴를 돌리면 헤드라이트가 켜지는 걸 보고 신기해했다. 어릴 적 갖고 놀았던 게 중요했던 것 같다. 돋보기에 상이 맺히는 이유도 궁금해했다. 물리에 관심을 가진 건 고등학교 입학 이후였다. 그때 입학시험에서 일등을 했던 친구가 물리 시간에 선생님에게 질문했다. ‘타원은 초점이 두개가 있어야 한다. 지구가 타원궤도로 태양을 돈다면 왜 초점인 태양은 하나뿐이냐’였다. 굉장한 질문이었다. 우린 문제 풀기에 바빴는데 그런 질문을 던질 수 있다는 데 자극을 받았다.”
-방사광 분야를 연구한 계기는.
“박사과정 지도교수가 중성자와 X레이로 물질을 연구하는 분이었다. 방사광 가속기가 미국에서도 제대로 된 걸 처음 만들었을 시기였다. 2세대 가속기로 당시에는 어마어마한 시설이었다. 밤새 싱크로트론에서 전자를 돌려 빛이 나오길 기다리는데 초기라 작동이 됐다 안 됐다 했다. 빛이 있어야 실험을 하니까 고치는 동안 밖에 나가 밥 먹고, 영화 보고 그랬다. 지금은 우리나라 4세대 가속기만 해도 거의 망가지지 않고 쉼 없이 돌아간다. 학생들이 밥 먹을 새가 없다.”
-방사광 가속기의 원리는.
“원래 입자물리학에서 전자를 가속시켜 고에너지의 전자가 어떻게 가동하는지를 보려 한 시설이었다. 가속시킨 전자를 계속 쓰려고 방향을 바꾸는 방법을 생각했다. 전자의 방향을 바꾸는 데는 에너지가 많이 들지 않으니까. 그런데 방향을 바꾸니 에너지가 줄어든다. 줄어든 에너지는 빛으로 바뀌었다. 방향을 바꿀 때마다 에너지가 빛으로 새는데 이 빛이 쓸 만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 빛을 만들어내는 전용 시설이 된 것이다(방사광가속기는 X선 파장의 빛을 만들어 분자가 결합하고 떨어지는 수십조분의 일초의 순간을 관측할 수 있다. 그래서 물질 분석, 신물질 개발, 세포 내부 영상 획득, 단백질 구조 분석 등 활용 분야가 넓다).”
-IBS의 중이온 가속기 구축 사업은 당초 계획보다 늦어지고 있다.
“방사광 가속기가 가속된 전자를 이용해 빛을 만든다면, 중이온 가속기는 전자가 아닌 핵을 가속시킨다. 중이온 가속기는 다른 여러 이유를 대지만 근본적으로는 핵물리 연구 도구라고 생각하면 된다. 우리나라도 핵물리나 입자물리 실험시설을 갖출 정도의 나라가 됐다고 해서 시작했는데 전자보다 무거운 핵을 가속시켜야 하니 상대적으로 어렵다. 어려운 기술이다 보니 처음부터 전략을 잘 짜서 했으면 못 할 프로젝트는 아닌데 시행착오가 많이 있었다. 열손실이 없이 효과적으로 가속하려고 초전도 가속을 택했는데, 시행착오를 겪고 있다. 이를 계획에 포함시켰어야 했는데 다 잘될 경우를 가정한 게 문제였다. 원리적으로 가능하지만 실제 만들려면 고도의 엔지니어링이 필요해 시제품을 만드는 게 어렵고, 일부분은 지금도 시제품을 못 만들고 있다. 국내 생산 위주로 하려 했는데 국내에 이런 경험을 가진 업체가 많지 않다는 데 대한 고려가 부족했다. 초전도라 저온냉각을 위한 장치를 프랑스에서 구했는데 코로나19로 안전허가 등도 지연되고 있다. 정부와 저희의 대원칙은 시간과 비용이 더 들더라도 원래 계획대로 만들자는 것이다. 그래서 우선 저에너지 구간만 올해 완성하려 한다. 고에너지 구간은 수백개의 가속모듈을 완벽하게 만든 후 시작하기로 했다.”
-과학 교육은 어떻게 바뀌어야 하나.
“처음 접할 때 잘 가르치지 않으면 막연한 두려움을 갖게 된다. 초·중등 수학·물리 교사가 이런 부분에서 주의해야 한다. 저도 물리가 암기과목인 줄 알았다. 개념을 잘 잡아야 시간을 절약할 수 있다. 앞서 말한 싱크로트론에서 연구하는데 X선 빔을 모을 수 있는 거울을 얼마만큼 휘어야 할지 문제였다. 그때 한 선배가 종이를 꺼내 어느 정도의 탄성이 필요한지 계산하고, 스프링을 반 잘라 넣으니 문제가 해결됐다. 그렇게 어려운 계산은 아니었지만, 현장에서 그런 원리를 적용하는 건 개념을 정확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IBS의 미래상은.
“IBS가 10년간 상당한 발전을 이룬 건 사실이지만 아직 시스템이 안정적이지 않은 면이 있다. 국제적 경쟁력을 갖추려면 어느 정도 양적 성장이 필요하다. 예산이나 아웃풋 측면에서 IBS는 독일을 대표하는 기초과학연구소인 막스플랑크연구소의 10분의 1, 일본 이화학연구소의 4분의 1 수준이다. 더구나 IBS는 독자적인 연구소가 아니라 대학 캠퍼스와 연계해 국내 기초과학연구를 모두 통합하는 역할을 한다. 규모 면에서 허수가 있는 것이다. ISB에 지금 30개 연구단이 있는데 출범 때 계획대로 50개 연구단은 돼야 어느 정도 경쟁력을 갖출 수 있다. 연구단의 클러스터화도 추진할 계획이다. 4~5개 정도의 연구단을 모아 클러스터로 만들어 하나의 연구소처럼 작동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면 연구단의 시너지도 높아지고, 한 연구단에서 다른 연구단에서 옮겨갈 수 있어서 IBS의 치명적 약점인 연구자의 고용 불안정 문제도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다. 올해 설립하는 바이러스기초연구소가 여러 센터가 묶인 형태라 클러스터화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다. IBS가 추구하는 게 장기 연구라 시작을 젊을 때 해도 고령이 될 때까지 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최근에는 연구단을 이끌어가는 단장의 연령을 낮게 가져가고 있다. 검증이 안 됐어도 잠재력을 보고 뽑는 것이다. 젊은 단장을 뽑으면 당연히 소속 연구자도 젊어진다.”
-과학자란 직업의 매력은.
“나라가 발전할수록 과학기술을 하겠다는 사람이 줄어드는 건 당연하다. 선진국을 봐도 그렇다. 미국 학생들은 더 재미난 게 많아 과학을 안 하고 유학생이 대신 한다. 그러나 과학자는 국가와 사회를 위해 꼭 갖춰야 할 직업군이다. 군인과 마찬가지다. 전쟁이 나지 않을 땐 필요성을 모르는 것처럼 과학자도 약간 그렇다. 이번에 코로나19로 이렇게 힘들게 될 줄 몰랐는데 우리나라엔 바이러스 연구자가 거의 없다. 대접도 못 받고 재미도 없는데다 위험해 생물학 분야에서도 제일 인기가 없다. 그런데 팬데믹 상황이 되니 이제는 꼭 이 집단을 확보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결국 국가는 과학자 집단이 필요 없어 보여도 항상 지원해야 한다. 우리가 바이러스기초연구소를 만드는 것도 ‘레디니스(준비성)’ 때문이다. 바이러스를 분자 수준에서 대응할 수 있는 준비를 해야 한다. 그러려면 학생들, 과학연구자들에게 너만 좋아한다면, 충분히 먹고살 수 있다는 믿음을 주는 게 중요하다.”
주영재 기자 jyj@kyunghyang.com김기남 기자 kknphot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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