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이 낳은 절경 제주 차귀도섬 전체가 천연기념물/해안절경·기암괴석 ·쪽빛바다에 감탄 저절로/붉은 화산송이·독수리바위·장군바위·쌍둥이바위 어우러지는 풍경 장관/너무 아름다운 풍경 돌아가는 발길 가로막네
거대한 고래가 바다에 누웠나 보다. 멀리서 보면 머리와 꼬리를 드러내고 몸은 반쯤 잠긴 고래 모양의 독특한 섬. 가까이 다가갈수록 파도가 심해지면서 작은 배는 마치 롤러코스터가 된 듯 아찔하다. 선장은 오늘은 파도가 좀 있어서 위험할 수 있으니 갑판에는 오르지 말라고 당부한다. ‘섬 속의 섬’ 제주 차귀도. 배로 10분 남짓 걸리는 짧은 거리지만 하루 두 차례만 사람의 발길을 허용한다. 아무도 살지 않는 저 섬에는 어떤 신비로운 비밀이 가득할까. 섬이 가까이 다가올수록 여행자들의 얼굴이 호기심으로 물든다.
#시간이 만든 비밀의 섬
발에 족쇄를 채우고 거대한 나무를 어깨에 짊어진 채 날카로운 화산석 바위를 달리는 청년들. 옷은 거지처럼 너덜너덜하고 지친 표정이 역력하지만 눈에는 결기 가득하다. 반드시 이뤄야 할 꿈이 있기에. 1980년대 학번들에게 ‘까치’ 오혜성(최재성), 엄지(이보희) 하면 바로 떠오르는 만화 이현세의 ‘공포의 외인구단’. 이 만화로 만든 영화의 한 장면이다. “난 네가 기뻐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라는 가사로 히트 친 영화 OST 정수라의 ‘난 너에게’까지 안다면 당신은 ‘옛날사람’ 취급을 받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1980년대에 20대를 보낸 이들에게는 추억이고 낭만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외인구단의 지옥훈련 장소가 바로 차귀도다. 1977에 나온 영화 ‘이어도’도 이곳에 촬영됐다.
차귀도로 가는 배는 제주시 한경면 고산리 고산포구에서 출항한다. 포구 뒤쪽 언덕길 차귀도 유람선 매표소에서 탑승권은 성인 1인 1만3000원이다. 원래 오전 9시30분부터 오후 4시30분까지 매시 30분마다 배편이 있었지만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으로 지난해부터 오전 10시30분이나 11시, 오후 2시30분 두 차례만 차귀도에 들어갈 수 있다. 물론 풍랑주의보가 내려지거나 파도가 심할 때는 배가 뜨지 않는다. 유람선 선착장에 도착하니 신비로운 섬들이 바로 코앞에 둥실 떠있는 풍경이 아주 신비롭다. 가장 가까운 섬 와도 너머로 차귀도 본섬인 죽도, 왼쪽으로 독수리 바위 또는 매 바위로 불리는 지실이섬이 보인다. 이렇게 세 섬을 묶어 차귀도라 부른다.
배 뜰 시간이 좀 남아 포구 구경에 나선다. 당산봉을 배경으로 둔 고산포구에는 갈매기들이 앉아 한가롭게 휴식을 즐긴다. 낚싯배들이 여기저기서 손님을 태우느라 분주하다. 차귀도는 제주에서도 아열대성이 아주 강한 지역으로 바닷속에 많은 물고기가 서식해 강태공들이 좋아하는 낚시터로도 유명하다. 참돔, 돌돔, 벵에돔, 자바리 등이 잘 잡히고 특히 1∼3월과 6∼12월 사이에 낚시꾼들이 많이 찾는다. 낚시 경험이 전혀 없는 젊은 연인들도 낚싯배에 오른다. 낚시체험 업체들이 많아 모든 장비를 빌려주기에 맨 몸으로 가도 짜릿한 손맛을 즐길 수 있다. 부둣가에는 오징어가 줄에 주렁주렁 매달려 꾸덕꾸덕 맛있게 건조되는 풍경이 정겹다. 반건조 오징어 등을 파는 상점들도 늘어섰다. 즉석에서 구워주는 반건 오징어 한 마리 입에 물고 차귀도 유람선에 오른다.
#붉은 화산송이·장군바위에 감탄 저절로
선착장을 떠난 유람선은 지중해 같은 환상적인 쪽빛 바다를 가르며 와도를 거쳐 10분 만에 섬에 닿는다. 날이 맑고 투명해 와도가 아주 선명하다. 본섬 죽도에 내리자마자 감탄사가 쏟아진다. 섬의 역사처럼 겹겹이 쌓인 화산 단면이 잘 드러나는 웅장한 절벽과 그 아래 찰랑이는 물은 바닥이 보일 정도로 맑고 투명하다. 배를 타고 올 때는 보이지 않던 범바위가 왼쪽 독수리바위와 함께 또 다른 작은 고래를 만들고 있다. 범바위는 입을 쩍 벌리고 포효하는 듯하다.
가파른 오솔길을 오르면서 차귀도 여행이 시작된다. 오르다 뒤를 돌아보면 차귀도 선착장, 와도, 쪽빛 바다가 만들어 내는 풍경이 그림 같다. 가장 먼저 집터가 여행자를 맞는다. 1970년대 말까지 이곳에는 7가구가 보리, 콩, 참외, 수박 등의 농사를 지으면 살았는데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다. 연자방아, 빗물 저장시설 등이 남아 섬의 역사를 전한다. 면적은 0.16㎢로 제주 무인도 중 가장 크다. 섬 전체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돼 30년 동안 출입을 제한하다 2011년 말부터 다시 사람의 발길을 허용했다.
집터 앞에서 탐방로는 장군바위 방면과 정상 방면으로 갈라지는데 왼쪽 장군바위 방면을 따라 시계방향으로 한바퀴 도는 트레킹을 추천한다. 차귀도의 최고 뷰포인트가 그쪽에 몰려있어서다. 넓은 들판을 가로지르는 오솔길에는 대나무, 억새가 넘실대고 이름 모를 들풀, 들꽃들이 생명력 넘치는 초록 물결을 이뤘다. 숨을 깊이 들이 마시며 태고의 자연을 몸 안에 가득 담아본다. 장군바위 전망대에 섰다. 왼쪽 붉은 화산송이가 뚜렷하게 드러나는 해안절벽과 촛대처럼 우뚝 선 장군바위, 멀리 당산봉과 수월봉까지 한데 어우러지며 보기 드문 장관을 연출한다.
오백장군 설화가 내려온다. 제주에 오백장군이 있는데 499개의 장군바위가 모두 한라산 영실에 있고 나머지 1개만 차귀도에서 우직하게 섬을 지킨다. 아주 옛날 아들 오백 명을 둔 어머니가 있었는데 흉년이 들어 끼니를 잇기 힘들어지자 오백 아들이 양식을 구하러 떠났다. 어머니는 큰 솥에 아들들을 먹일 죽을 끓이다 그만 발을 헛디뎌 솥에 빠져 죽고 말았다. 돌아온 아들들은 이를 모른 채 죽을 먹었고 막내가 죽을 먹으려다 사람 뼈를 발견하고는 어머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비탄에 빠진 막내는 제주 서쪽 끝 차귀도로 달려와 하염없이 울다가 바위가 됐고 나머지 형들도 뒤늦게 사실을 알고 울다 한라산 영실에서 바위로 굳어졌다는 얘기다.
해안을 따라 갈수록 입이 쩍 벌어지는 절경이 이어진다. 예쁜 하얀 등대로 오르는 볼래기 언덕에서 서자 화산송이 절벽, 장군바위에 기암괴석의 쌍둥이바위와 넓은 평원까지 더해지며 차귀도 풍경을 완성한다. 등대는 고산리 주민들이 직접 만들었다. 돌을 들고 언덕을 오르면 힘들어 제주말로 숨을 ‘볼락볼락’ 내쉬게 된다고 해서 볼래기 언덕이란 이름이 붙었다. 등대 앞에서면 한라산, 산방산, 신창 해안의 그림 같은 풍력발전기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제주도를 지키는 독수리바위와 와도
트레킹을 마치면 더 실감 나는 순서가 기다린다. 유람선을 타고 선장의 맛깔나는 설명과 함께 차귀도 바위들을 코앞에서 즐기는 시간이다. 죽도 선착장을 떠난 배가 독수리바위를 오른쪽에 두고 돌아나가자 독수리바위의 기암괴석과 겹겹이 쌓인 단층이 또렷해 감탄이 쏟아진다. 왜 독수리바위인지를 알겠다. 영락없이 날개를 접고 비상을 준비하는 매 또는 독수리 형상이다. 얼굴의 커다란 눈과 부리가 또렷해 금방이라도 날아오를 것 같다.
차귀도(遮歸島). 돌아가는 것을 막는다는 뜻인데 독수리바위와 함께 또 하나의 전설이 깃들어 있다. 옛날 중국 송나라 황제는 제주에서 천하를 호령할 왕이 날 지세라는 말을 듣고 신하 호종단에게 제주의 모든 지맥을 끊어 그 기운을 없애라고 명령한다. 호종단은 산방산에서 바다로 뻗는 용머리를 발견하고 목에 칼을 꽂아 붉은 피로 바다를 물들이는 등 제주 곳곳의 지맥과 수맥을 끊었다. 호종단 일행이 고산포구를 통해 중국으로 돌아가려고 배를 띄우자 커다란 독수리가 나타나 돛대에 앉았고 갑자기 바람과 파도가 거세지며 바다는 배를 삼켜버렸다. 독수리는 분노한 한라산신으로 바다에 내려앉아 지금도 제주를 지키는 독수리바위가 됐다는 신비로운 설화다.
가까이서 본 화산송이의 단면은 붉은 진흙을 발라놓은 것 같고 장군바위는 남근석을 닮았다. 고산포구로 돌아가는 길에는 만나는 와도는 영락없이 산모가 바다에 누워 곧 태어날 아이가 자라는 만삭의 배를 쓰다듬는 형상이다. 차귀도. 너무나 아름다운 풍경에 이름처럼 발길을 돌리기 쉽지 않아 아쉬움이 가득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