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계 충격에도.."흑인 살해 경찰, 유죄" 68%가 뜻하는 것

조일준 2021. 4. 17. 2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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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미국인 68% "조지 플로이드 살해 경찰, 유죄 평결 나와야"
메릴랜드 주의회 '집행관 권리법' 폐지 등 경찰 개혁도 본격화
2020년 12월5일, 미국 버지니아주 윈저에서 현역 육군 장교인 캐런 나자리오가 교통 단속을 하던 경찰관이 쏜 최루액을 맞고 고통스러워하고 있다. 경찰관의 보디카메라 영상 갈무리.

2020년 5월25일(현지시각), 미국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의 한 편의점에서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가 경찰에 체포됐다. 위조지폐 사용을 의심한 가게 종업원이 신고했다. 백인 경찰관 데릭 쇼빈은 플로이드의 양팔을 뒤로 꺾어 수갑을 채우고 연행하려 했다. 플로이드가 저항하자 경찰관은 그를 길바닥에 엎드리게 한 뒤 무릎으로 목을 눌렀다. 농구를 좋아하던 건장한 체구의 플로이드는 겨우 새어 나오는 목소리로 “엄마, 숨을… 숨을 쉴 수 없어요”라고 스무 번 넘게 호소했다. 약 9분 뒤, 플로이드는 끝내 숨을 거뒀다.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은 “엄마, 사랑해요. 내 아이들에게 사랑한다고 전해주세요. 저는 죽어요”였다.

“위력 사용, 사후 아니라 현장 관점으로 판단해야”

비무장 흑인 시민이 바지에 손을 꽂아넣은 백인 경찰관의 무릎에 짓눌려 백주대로에서 서서히 죽어가는 과정은 행인이 촬영한 동영상에 고스란히 담겼다. 미국은 큰 충격에 휩싸였고 곳곳에서 인종차별 반대 시위가 이어졌다. 시위대에서 터져나온 “숨을 쉴 수 없다!”(I can’t breathe!)는 외침은 인종적 소수자들이 느끼는 ‘숨 막히는’ 현실을 빗댄 중의적 표현이었다.

2021년 3월29일, 쇼빈에 대한 배심 재판이 시작됐다. 쇼빈은 2급 살인 등 세 가지 혐의로 기소됐다. 플로이드 사건 재판은 미국 사회의 뿌리 깊은 인종주의와 지나친 경찰 공권력을 둘러싼 여러 문제와 쟁점이 민낯을 드러내는 자리다. 변화의 조짐도 있다. 경찰의 광범위하고 자의적인 면책특권의 빌미가 된 대법원 판례가 새삼 도마 위에 오르고, 경찰 개혁에도 한층 힘이 실리는 모양새다.

변호인 쪽에선 쇼빈의 행위가 경찰관의 ‘합리적 판단’에 따른 공무 집행이라며 무죄를 주장한다. 플로이드 주검을 부검한 결과 나온 마약 복용 흔적도 희생자 쪽에 불리함을 보태는 근거로 동원됐다. 2021년 4월8일 미국 시사주간 <네이션>은 “변호인의 이런 전략이 법에 익숙지 않은 일반인들에겐 어리석게 보일 수 있지만, 변호사들은 경찰 직무 관련법이 ‘인간다운 행동’이 아니라 ‘경찰다운 행동’을 요구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고 짚었다. 현행 미국 법은 경찰관 개인이 직무 수행 현장에서 느끼는 두려움, 인종차별적 편견, 심지어 개인적 히스테리까지 용인할 수 있는 행위의 사유로 인정한다.

4월7일 쇼빈의 변호사는 법정 변론에서 미니애폴리스 경찰의 ‘직무 수행 매뉴얼’ 일부를 읽으며 쇼빈을 두둔했다. “경찰의 특정한 위력 사용의 ‘합리성’은 모든 일이 벌어진 뒤 판단할 게 아니라, 현장 경찰관의 ‘이성’이라는 관점에서 판단해야 한다”는 대목이다. 미니애폴리스 경찰은 플로이드 사망 사건 이후 경찰관의 위력 사용을 더 분명하고 엄격하게 제약하도록 매뉴얼을 개정했다. 그러나 1년 전 쇼빈이 플로이드를 제압할 때 일선 경찰관에게 제공했던 매뉴얼의 모호한 규정은 지금도 미국의 대다수 경찰 직무 지침에서 전형적 형태라고 미국 온라인 매체 <복스>가 보도했다.

미국 경찰 매뉴얼의 모호함이 정당화되는 현실은 1989년 연방대법원의 ‘그레이엄 대 코너’ 사건 판례에 기대고 있다. 당시 흑인 남성 그레이엄은 편의점에 들어갔다가 곧바로 나와 친구 차에 타고 현장을 떠났다. 마침 이를 목격한 백인 경찰관 코너가 수상하게 여겨 차를 세웠다. 그레이엄은 체포하려는 경찰에 저항하다가 발과 손목, 어깨, 이마 등에 심각한 부상을 입었고 경찰이 과도한 위력으로 시민권을 침해했다며 소송을 제기했다. 연방대법원까지 올라간 이 사건에서 재판부는 미국 수정헌법 제4조의 법리 검토를 거쳐, 경찰관의 물리력 사용 위법성 여부를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기준”으로 판단해야 한다며 경찰관의 무죄를 선고했다.

2020년 5월25일, 미국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의 한 편의점에서 백인 경찰관 데릭 쇼빈이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에게 수갑을 채운 뒤 무릎으로 목을 짓누르고 있다. 주변의 한 시민이 10분 가까이 촬영한 동영상이 퍼지면서 미국뿐 아니라 세계가 큰 충격을 받았다. 로이터 연합뉴스

1989년 연방대법원의 그레이엄 사건 판례

수정헌법 제4조는 “불합리한 수색과 압수(인신 구금 포함)로부터 개인, 주거, 서류, 물건의 안전을 확보할 권리는 침해받지 아니한다”고 명시했다. 이 조항의 취지는 ‘국가 공권력의 불합리하고 임의적인 압수·수색·구금을 금지’함으로써 시민의 권익을 보호하는 것이다. 연방대법원은 “국가 공권력의 집행에는 어느 정도 시민 권리의 제약이 따를 수밖에 없으며 상충하는 법익의 균형을 세심하게 봐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코너의 행위는 사건 당시 상황에 대한 합리적 판단에 비춰 위법하다고 볼 수 없다고 했다.

문제는 ‘합리적’ 또는 ‘부당함’의 판단 주체와 기준이다. <네이션>은 “수정헌법이 금지한 ‘불합리함’이 헌법을 쓰고 비준했던 백인들에 의해 형편없이 정의됐으며, 그 백인들은 노예제와 대량학살 같은 인권유린이 국가권력의 ‘합리적’ 사용이라고 결정했다”고 비판했다. 미국 역사의 대부분 시기에서 수정헌법 제4조의 해석은 ‘합리적인 백인’ 기준을 따랐으며, 정부와 법 집행 기구 종사자들의 행위도 그들의 렌즈를 통해 판단됐다는 지적이다. 그러다보니 ‘권한 남용’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경찰 폭력의 피해자나 유가족은 경찰관이 ‘악의를 갖고 불합리하게 행동’했다는 걸 직접 입증해야 한다. ‘합리적 판단’의 주체는 공권력으로, ‘불합리함’의 증명은 피해자 몫으로 뒤바꿔버린 셈이다. 그러나 ‘피해자 입증 책임’은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경찰의 보디카메라(공무 때 몸에 장착하는 카메라) 착용이 시행되기 전에는 사실상 불가능했다.

현직 경찰 간부인 최성규 서울 성북경찰서장도 미국 파견 근무 경험을 토대로 쓴 <총과 도넛>(동아시아 펴냄)에서 “미국 경찰의 공권력이 강한 이유는 민간인 총기 소유가 가능하고 강한 경찰 노조가 있다는 현실적 이유도 있지만, 무엇보다 법적 보호장치가 확실하게 갖춰져 있기 때문”이라고 평한다. 1968년 연방대법원 판결로 세워진 ‘테리 스톱’(Terry stop)이 한 사례다. 한국의 불심검문에 해당하는 테리 스톱은 경찰관이 ‘합리적 의심’이 들 때 보행자나 운전자를 세워 검문검색을 할 수 있는 권한이다. 이를 거부하면 즉시 체포돼 사회봉사나 벌금, 나아가 최대 6개월의 구금형까지 각오해야 한다.

대다수 나라와 달리 미국은 국가 경찰이 없는 자치 경찰 제도를 시행한다. 경찰서 전체의 75%가 경찰관 10명 이하의 소규모이며, 경찰서장만 있는 1인 경찰서도 전체의 10%나 된다. 유난히 미국에서 경찰 노조의 힘과 공권력 행사의 범위가 커진 배경이다. 그 이면에 인종차별이나 인권침해의 그늘도 생겨났다. 

2021년 4월11일 미국 미네소타주 소도시 브루클린센터에서 백인 경찰관이 교통 단속에 불응한 흑인 청년에게 총을 쏴 숨지게 하는 순간이 경찰관의 보디카메라에 담겼다. AFP 연합뉴스

메릴랜드, 경찰관 행동 찍는 ‘보디카메라’ 의무화

조지 플로이드 피살 사건의 재판은 미국 경찰 공권력의 실태까지 심판대에 올리며 경찰 개혁의 불씨를 댕겼다. 4월10일 메릴랜드 주의회는 미국에서 처음으로 경찰의 면책특권을 광범위하게 인정하는 ‘법 집행관(경찰관) 권리법’을 전격 폐지했다. 개선안을 담은 대체 법안에는 △경찰관의 물리력 사용 기준 강화, △경찰관 직무 규칙 제정에 시민 패널 참여(미국 최초), △기습적 수색영장 집행 금지, △경찰관 보디카메라 장착 의무화, △경찰관의 위법행위 공개 조사 등 파격적인 내용이 담겼다. 공화당 소속 래리 호건 주지사는 법안에 거부권을 행사했으나, 민주당 다수의 주하원이 표결로 통과시켰다.

앞서 수개월 동안 메릴랜드 주의회에선 경찰 개혁 법안을 놓고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 공화당 백인 의원들은 새 법안이 경찰관이 업무 수행에서 맞닥뜨리는 위험에 대비하는 보호장치를 없앨 것이라며 반대했고, 민주당 흑인 의원들은 경찰관이 더 개선된 직무훈련을 받아야 한다며 새 법안이 경찰의 공권력 행사에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고 논박했다.

4월11일에는 랠프 노덤 버지니아 주지사(민주당)가 교통 단속 과정에서 흑인 현역 장교를 폭행한 경찰관을 해임하고 해당 사건의 정식 수사를 명령했다. 앞서 2020년 12월 버지니아주 윈저의 한 고속도로에서 교통 단속을 하던 경찰관 2명이 운전 중이던 육군 소위 캐런 나자리오(27)에게 총구를 겨누며 하차를 명령했다. 나자리오가 두려움에 질려 불응하자 경찰은 최루액을 뿌리며 그를 끌어냈고, 차 밖에선 발로 마구 걷어찼다. 이 과정은 경찰의 보디카메라에 녹화됐고, 나자리오는 폭행 경찰관을 고소했다. 현역 육군 장교인 나자리오가 경찰 공권력을 두려워한 데는 비극적 가족사가 있었다. 미국 일간 <워싱턴포스트>는 2014년 7월 뉴욕에서 ‘불법 담배 판매’ 혐의로 경찰에 체포되는 과정에서 목이 졸려 사망한 에릭 가너가 나자리오의 처가 쪽 형제였다는 사실을 확인해 보도했다. 나자리오는 가너를 ‘엉클’(삼촌)이라고 부를 만큼 가까웠다.

4월14일에는 미네소타주 소도시 브루클린센터에서 ‘과실치사’를 주장하는 백인 경찰관 킴 포터가 체포돼 2급 살인 혐의로 기소됐다. 브루클린센터 시장은 이 경찰관과 그의 상관인 경찰서장이 낸 사직서를 수리하지 않고 해임하겠다고 밝혔다. 앞서 4월11일, 포터는 교통 단속을 하던 중 체포에 불응한 비무장 흑인 청년 단테 라이트(20)를 총으로 쏴 숨지게 했다. 경찰은 경력 26년차인 포터가 테이저건(전기충격기)을 쏘려다가 실수로 총을 발사했다고 해명했다. 라이트가 숨진 장소는 1년 전 조지 플로이드가 경찰에게 목을 짓눌려 질식사한 현장에서 불과 12㎞ 떨어진 곳이었다. 플로이드의 여자친구가 라이트의 교사였던 인연도 애꿎다. 

한겨레21

민주당 지지자 91%가 ‘유죄’ 주장

최근 미국 시민사회에선 ‘경찰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부쩍 커지고 있다. 4월9일 온라인 매체 <복스>가 ‘진보를 위한 데이터’에 의뢰한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미국인 다수가 경찰의 과도한 공권력 행사를 제한하는 법안을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보디카메라 착용 의무화’는 응답자의 84%가 찬성했고 반대는 10%에 불과했다. 경찰의 물리력 사용에 대한 데이터 수집 확대, 목조르기와 인종 프로파일링 금지에도 10명 중 7~8명이 찬성했다. 논란이 뜨거운 ‘경찰관 면책특권 폐지’ 법안도 찬성(59%)이 반대보다 배 이상 많았다.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 재판에 대한 문항에선 응답자의 68%가 ‘유죄’ 평결이 나와야 한다고 했다. ‘무죄’ 응답은 19%였다. 유무죄 판단은 정치적 성향에 따라 뚜렷이 갈렸다. 민주당 지지자는 91%가 ‘유죄’를 주장했지만 공화당 지지자는 그 절반(46%)에 그쳤다.

조일준 기자 ilj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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