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 살인' 갑질 그놈 벌하게..경비실 단숨에 달려간 변호사

고한솔 2021. 4. 17.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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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설립 5주년 공익인권변론센터
사회적 약자의 '사익'이 우리의 '공익'으로
2020년 5월12일 서울 강북구 우이동 한 아파트 경비실 앞에서 시민사회단체 활동가들이 연 고 최희석 경비노동자 추모 긴급 기자회견에 앞서 시민들이 헌화하고 있다. 한겨레 김봉규 선임기자

“아파트 경비원 한 분이 입주민에게 상당히 심하게 괴롭힘을 당하다가 너무 억울한 나머지 사과도 못 받고 스스로….”

2020년 5월11일 아침, 류하경 변호사(법률사무소 휴먼)는 서울 강북구에서 활동하는 빈민운동가에게 전화 한 통을 받았다. 경비노동자를 상대로 한 아파트 입주민의 갑질은 이전에도 종종 발생하던 사건이다. 입주민의 괴롭힘이 얼마나 심했기에 예순 가까운 한 집안의 가장이 스스로 세상을 등졌을까, 그는 생각했다. “가해자 법적 조치, 유가족 보호를 변호사님이 맡아주실 수 있을까요?” 그 말에 그는 단숨에 사건 현장으로 달려갔다. 

‘경비노동자 최희석씨’, 10대 주요 변론 사건 포함

서울 강북구 한 아파트의 경비노동자 최희석씨는 2020년 4월21일 이중으로 주차된 입주민의 차를 밀었다는 이유로 입주민에게서 갖가지 폭언과 폭행, 협박을 당했다. ‘꼭 (입주민) ○○○씨를 강력히 처벌해주세요. 저같이 억울하게 당하다가 죽는 사람 없게요.’ 유서로 남긴 녹음파일에서 고인은 울먹이고 있었다.

“사람의 심장을 멎게 하고 뇌를 정지시키는 것보다 고통스러운 게 사람의 자존감을 파괴하는 영혼 살인인데, 살인 중에서도 자신이 자신을 죽이게 한 극악하고 악마적인 살인 범죄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2021년 4월9일 법률사무소 휴먼에서 피해자 쪽을 대리한 권호현 변호사와 함께 만난 자리에서 류 변호사가 말했다. 고령의 비정규직이자 저임금 노동자에 대한 괴롭힘 사건이었고, 같은 사건이 재발하지 않도록 사회에 경종을 울려야 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공익인권변론센터(이하 변론센터·대표 김칠준 변호사)는 이 사건을 변론센터가 지원하는 공익 변론 사건으로 지정했다. 민변 노동위원회 소속 류하경·권호현·신하나 변호사와 법무법인 승전의 최영기 변호사가 모든 법적 절차를 도왔다.

고인의 두 자녀는 ‘돈은 필요 없으니 가해자를 최대한 강하게 처벌할 수 있게 도와달라’고 호소했지만, 민사상 손해배상 청구까지 해야 한다고 류하경 변호사는 유족을 설득했다. “가해자한테서 돈을 받아오는 것도 하나의 처벌이니, 할 수 있는 법적 조치를 다 해본다는 의미로 시도해봅시다.”

2020년 8월 가해자에게 1억원의 손해배상 책임 인정, 보복상해 등의 혐의로 기소된 가해자에게 그해 12월 대법원 양형기준보다 높은 징역 5년형 선고(1심), 2021년 2월 최씨의 산업재해 인정까지 쉬지 않고 달렸지만 끝은 아니다. 가해자의 재산을 훑어본 권호현 변호사의 말이다. “가해자가 살던 아파트는 그 아버지 명의였고 가해자 소유 재산은 없어 손해배상 집행을 못하고 있어요. 판결은 10년짜리 판결금 채권으로 바뀌기 때문에 가해자에게 지속적으로 채권 추심을 할 수 있습니다. 형기를 마치고 나올 가해자 행적을 계속 추적해야죠.”

입주민 갑질에 의한 경비노동자 사망 사건은 변론센터가 설립 5주년을 맞아 선정한 ‘10대 주요 공익인권변론사건’의 하나다.

2020년 5월18일 서울 서초구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공익인권변론센터 사무실에 모인 변론센터 구성원. 왼쪽부터 서채완 변호사, 이수연 간사, 조영관 변호사, 이상희 소장, 전임 소장인 송상교 변호사, 최용근 변호사. 변론센터 제공

5년 동안 사건 279건, 시민 5476명 지원

민변은 1988년 설립된 진보적 법률전문가 단체다.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이익단체라기보다는 회원 1천여 명의 느슨한 연대체 혹은 거대한 동아리와 가깝다. 회원 다수가 개인 업무와 공익 변론을 병행하는데 발생 사건, 전문 분야에 따라 ‘헤쳐 모여’를 반복하며 산발적으로 공익 변론을 수행해왔다. 그러다보니 민변의 공익 변론 사건을 체계적·효율적으로 진행하고 그 노하우를 축적할 필요가 있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개인 돈을 들여가며 공익 활동을 해오던 관행을 개선하자는 문제의식도 더해졌다. 2016년 4월21일 변론센터가 설립된 배경이다.

변론센터는 민변의 공익 변론을 연구·지원하는 ‘조력자’이자 ‘발전소’ 구실을 한다. 변호사들이 직접 변론 지원을 신청하거나, 시민사회단체와의 협의, 혹은 사건 당사자인 시민이 직접 변론 지원을 신청한다. 변론센터는 최소한의 활동비에 달하는 공익인권기금을 지원하거나, 상근 변호사 4명(최용근·조영관·서채완·조은호)이 직접 소송을 기획·실행한다. 센터 ‘1호 사건’인 통신자료 무단수집 헌법소원 사건에서 시작해 지난 5년 동안 279건의 사건을 지원했는데, 변론을 지원받거나 상담받은 시민만 5476명에 이른다. 사용된 공익변론기금은 모두 3억여원이다.

“민변은 사회변혁적이고 운동성이 강해요. 민변 변호사의 공익 변론을 따라가다보면 사회 현안이 무엇인지, 또 무엇이어야 하는지 알 수 있죠. 변론센터의 주요 과제는 이를 어떻게 지원할 것인가에 집중돼 있어요.”

4월6일 서울 서초구 민변 사무실에서 만난 변론센터 소장 이상희 변호사의 말이다. 민변 변호사는 법률전문가이자 시민사회 활동가로서 공익 변론부터 기자회견, 입법 개선 연구·운동까지 전방위로 활동한다. 이들이 맡는 사건에는 세월호 참사, 문화계 블랙리스트, 국가보안법 등 시대의 요청을 받는 사건뿐 아니라 사회적 약자를 대변하기 위해 민변이 직접 발굴하는 사건도 있다.

2017년 검정고시 출신자가 교대 수시입학에서 차별받은 사건에 대한 위헌 결정이 ‘발굴 사건’의 한 사례다. 2016년 초등학교 교사를 꿈꾸던 대안학교 학생 정인주, 한선영씨는 대학 입시 준비를 하다가 교대 입시요강에 가로막혔다. 일부 교대가 ‘정규 고등학교 3년 과정을 이수한 자’로 수시모집 자격에 제한을 뒀기 때문이다. 그해 8월 교대 11곳을 상대로 한 헌법소원(기본권 침해를 받은 사람이 헌법재판소에 구제를 요청하고 이를 헌재가 심판하는 제도)을 냈다. “검정고시 출신의 수시 지원을 막은 2017학년도 수시모집 입시요강을 취소해달라.” 

‘차별이 맞다’는 말에 큰 용기 얻어

민변 교육청소년위원회 소속 류광옥 변호사가 법적 절차를 조력했고, 변론센터는 이 사건을 공익 변론 사건으로 지정해 그 활동비 일부인 100만원을 지원했다. 2017년 12월 헌재는 재판관 전원의 일치된 의견으로 위헌 결정을 내렸다. 이미 신입생 합격자 발표가 끝나 이들은 헌재 결정의 수혜를 입지 못했지만, 학교 후배들이 수시로 교대에 입학하는 길을 터줬다는 데 보람을 느낀다. <한겨레21>과의 통화에서 정인주씨가 한 말이다.

“민변 변호사님이 ‘이건 엄연한 차별이 맞다’고 말씀해주셔서 심적으로 큰 용기를 얻었던 기억이 나요. 헌법소원을 하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차별을 확인받고 해소하는 경험을 하지 못했겠죠.”

기초생활수급자, 성소수자, 검정고시 출신자, 경비노동자,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 해외입양인, 아동… 변론센터가 대변하는 건 사회적 소수자의 ‘사익’이다. 그러나 이 사익은 사회적 측면에서 볼 때 표현의 자유, 민생, 사회권, 정보인권, 과거사 청산 등 ‘공익’의 문제로 풀이된다. “지금 이 시점 사회에서 허용되고 보장돼야 하는, 사회적 약자의 사익 추구 행위를 공익이라고 하는 거죠. 보편타당한 공익이라는 이데아는 없어요. 민변 활동은 그 사회적 약자의 사익 추구 행위를 위한 울타리를 넓혀가는 거라고 생각해요.” 류하경 변호사의 말이다. ‘사회적으로 아주 중요한 권리임에도 잘게 쪼개져서 사회구성원 개개인에게 흩어져 있기에 법적으로 제대로 보호받지 못하는 이익이 공익’1)(황승흠 국민대 법학과 교수)이라는 정의와도 일맥상통한다. 

2017년 7월12일 서울 서초구 민변 대회의실에서 열린 군형법 제92조의 6 위헌소송 민변 대규모 대리인단 구성 및 의견서 제출 기자회견. 변론센터 제공

1970~80년대 독재 권력에 맞서던 인권변호사에 이어 1990년대 중반 공익 전담 변호사가 등장했고 2000년대 변호사들의 공익 활동 전담 조직이 생겨났다. 공익인권법재단 공감(2004년), 공익법센터 어필(2011년), 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만드는법(2012년) 같은 변호사 중심 공익단체나 로펌 후원의 공익단체까지 공익변호사의 존재 기반이 다양화하고 있다.

그 가운데 변론센터는 1988년부터 숙성시켜온 민변의 철학과 경험을 바탕으로, 1천여 명 회원 규모와 그 전문 분야를 무기로 기동력 있게 광범위한 분야를 지원하는 게 특징이다. 공익 변론계의 ‘제너럴리스트’(모든 분야에 상당한 지식과 경험을 가진 사람)인 셈이다.

“국가보안법 사건이나 재소자 인권 문제처럼 사회적 편견이 굳건한 사건들까지 변론센터는 지원하고 있어요. 가습기살균제 사건처럼 다수 피해자가 발생한 사건에 조직적이고 신속한 대응도 가능합니다.” 이상희 변호사의 설명이다. 요양시설의 노인, 성소수자, 수용자 이슈가 중첩된 코로나19 사태에 대응하려 연구모임을 만들고, 법무부에 ‘교정시설 내 코로나 대응 조치가 적절했는지’ 공개 질의도 보냈다.

법률이 기득권에 잠식되지 않도록

공익 변론의 사각지대에 놓인 이슈를 발굴·보완해야 한다는 고민은 여전하다. 재정 부족 문제도 고질적이다. 2019년 발표된 공익변호사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공익변호사 응답자 중 과반수(53.5%)가 소속 단체의 재정 자립이 불가능하다고 답했다.2) 변론센터도 마찬가지 문제를 겪고 있다. 비영리단체인 민변은 독립성을 유지하기 위해 회원 회비만으로 운영하는데, 민변 변론센터는 민변 이월금(한 해 예산에서 소진하고 남는 금액)의 일부(5%)로 겨우 굴러가는 상황이다. 회원들이 십시일반 모아온 기금 역시 소진됐다. 1년에 필요한 공익변론기금 7천만원(인건비 등 제외)에 닿기에 턱없이 부족하다. 공익 변론에 필요한 기금을 시민에게서 후원받는 ‘시민 변론 기금’(siminfund.or.kr)을 시작하는 이유다.

변론센터는 시민 공감대를 모아 기금 모금에 힘쓰는 한편, 공익 변론의 저변을 넓혀갈 계획이다. 아동인권을 외면한 과거 해외입양의 문제점을 지적하기 위해 한국 정부와 홀트아동복지회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하고, 인공지능(AI)을 채용 과정에 도입한 공공기관을 상대로 선발 기준과 다름없는 알고리즘을 공개하라는 소송도 시작했다.

“사회를 운용하는 제도의 외형이 곧 법률이기 때문에, 법률가들이 어떤 의견을 내고 어떤 방향으로 끌고 갈 것인가 항상 문제가 되죠. 그 과정과 결과가 기득권에 잠식되지 않도록 민변과 시민 사이에 징검다리를 놓는 역할을 변론센터는 이어갈 겁니다.”(이상희 변호사)

고한솔 기자 sol@hani.co.kr 

지금까지 10대 사건, 앞으로 5대 사건

한겨레21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공익인권변론센터는 2021년 4월19일 설립 5주년을 맞아 변론센터의 ‘10대 주요 공익변론사건’을 선정해 발표했다. 지난 5년 동안 지원한 279건 중 변론센터 내부 회의를 거쳐 60여 건을 선별한 뒤 선정위원의 심사를 밟았다. 선정위원으로는 김준우 변호사, 김지혜 강릉원주대학 교수, 랄라 다산인권센터 활동가, 박정은 참여연대 사무처장, 어쓰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 조영선 민변 부회장, 홍성수 숙명여대 교수, 고한솔 <한겨레21> 기자가 참여했다. 공익성, 성과와 제도 변화, 사회적 영향력을 기준으로 10대 사건이 추려졌다. 또 현재 한창 진행 중인 사건이어서 사회적 관심이 필요한 ‘주목할 만한 5대 사건’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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