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과학기술, 여성이 뛰어들어야 발전한다"

글 송윤경 기자 kyung@kyunghyang.com·사진 김영민 기자 2021. 4. 17.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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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80:20. 한국의 과학기술 연구개발인력 성별 분포다. 물론 80%가 남성, 20%가 여성이다. 10억 이상 대형 연구 책임자 분포는 더 극단적이다. 남성이 93%, 여성이 7%다.(2018년 여성과학기술인력 실태조사).

한국사회에서 ‘여성 과학자’로 살아가는 일은 버겁다. ‘여자는 과학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회적 편견이 소녀들을 가로막고, 출산·육아를 거치면 경력이 단절되기 일쑤다. 여성이 극소수이다 보니 남성 위주의 조직문화도 굳건하다.

62세의 안혜연 한국여성과학기술인지원센터(WISET) 소장은 여성 과학자들에게 롤모델이 될만한 인물이다. 대학이 아닌 산업현장에서, 그것도 근무조건이 열악한 벤처기업에서 20여년의 커리어를 쌓은 점도 독특하다. 그는 보안 솔루션 전문가지만 박사학위를 받을 때까지만 해도 이 분야에 문외한이었다고 한다.

여성 공학도로 사회에 발을 내디뎌 IT 업계 보안 분야 리더가 되기까지 30여년간 그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지난 4월 14일 한국여성과학기술인지원센터에서 안 소장을 만나 여성 과학자로서의 지난 여정과 여성 과학기술인 양성에 관한 생각 등을 들었다.

-20년간 벤처기업에서 일했다. 60대 여성 공학자 중에선 흔치 않은 사례다.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했을 때 친정어머니가 끝까지 하신 말씀이 기억난다. ‘학교 좀 알아보지, 교수를 하지(웃음).’ 다수의 여성 과학자들이 교육자의 길을 걷는다는 것은 나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대학교수는 1%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내 기술을 가지고 뭔가를 해보고, 몰입하고픈 욕망이 컸다. 그래서 인더스트리(산업현장)가 좋았다.”

-삼성SDS에서 5년간 일하다 나왔다고 들었다.

“내가 있을 곳이 아니라는 느낌이 컸다. 박사학위를 받고 들어갔기 때문에 금방 고참이 됐는데, 내 작업에 대한 몰입을 더 하고 싶었다. 보안 전문 벤처기업들이 여기저기 생기면서 이직을 하게 됐다.”

-애초 인터넷 보안을 전공했던 것인가.

“전혀 아니다. 대학에서 수학을 전공하고 데이콤에 입사했는데 그때 무선 네트워크 같은 ‘신기술’을 처음 알았다. 신나는 경험이었다. 내가 대학 다니던 시절엔 컴퓨터 사이언스 학과가 없었고, 컴퓨터 네트워크 강의도 없어 서울대에 가서 청강할 정도였다. 직장생활을 하며 돈이 모였다 싶어 다시 공부를 시작했고, 컴퓨터 공학 박사학위를 땄다. 삼성SDS에 갔는데, 막상 내가 할 일이 없어 답답했다. 마침 ‘인터넷 보안’ 이슈가 주목받을 때였는데, 아무도 마땅한 답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때부터 혼자 공부를 시작했다. 공부한 걸 주변에 알려주기도 하고…. 그렇게 6개월이 지나니까 내가 보안 전문가가 돼 있더라. 나의 보안 솔루션에 집중하고 싶다는 생각이 점차 커지면서 IT 벤처업계로 나왔다.”


-새롭게 공부해 전문가가 되기는 쉽지 않았을 텐데.

“빨리 공부해 빨리 써먹을 수 있다는 점이 산업현장의 매력이다. 10년짜리 방대한 연구를 하지 않는 이상, 배워서 못할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기업에선 일의 성패만 가지고 평가하기 때문에 내가 미워도 자를 수가 없다. 오히려 여성들에게는 산업현장이 더 공정한 일터일 수도 있다.”

-여성 공학자가 IT 계열 리더로 성공한 사례가 많지는 않다. 여성 과학자 하면 흔히 연구실에 있는 존재로 그려진다.

“2년 전 이곳 소장으로 와보니 로고와 팸플릿 속 여성 과학자 이미지에 전부 흰 가운을 입혀놨더라. 여성 과학자들이 생물·화학 계열에 많이 종사하다 보니 으레 ‘실험실에서 흰 가운 입고 일하겠지’ 하는 고정관념이 생긴 거다. 가운부터 벗기라고 했다(웃음). 이런 선입견을 바꾸기 위해 다양한 여성 과학자들의 ‘성공 스토리’를 보여주는 캠페인을 하고 있다”(한국여성과학기술인지원센터는 블로그를 통해 ‘쉬 디드 잇(She did it)’이라는 콘텐츠를 지속적으로 내보내고 있다. 민간·공공 연구소에서 일하는 학자들뿐 아니라 건설사, 제약사, 통신사에서 활약하는 여성 과학자들의 이야기를 접할 수 있다.)

-공학계열 여성 전공자가 늘긴 했지만 석·박사급까지 공부를 이어가기 힘들다고 들었다. 대형 프로젝트나 고위 보직을 맡는 여성 과학자들도 극소수다.

“통계를 보니 석사는 많이 늘었지만, 박사는 여전히 소수다. 석·박사 학위가 꼭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여성 과학자가 넘기기 어려운 ‘타이밍’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석사에서 박사로 넘어가는 시기가 30대 초반 즈음 된다. 결혼, 출산을 거치면서 공부를 이어가기가 쉽지 않은 거다. 남녀의 육아·살림 분담 수준이 나아졌다고는 하나 여전히 80%(여성) 대 20%(남성)쯤 되는 것 같다. 여성이 책임지는 집안일이 60%까지는 내려와야 일에 집중할 수 있을 것이다. 문화가 바뀌어야 하는 문제라 해결이 쉽지는 않다. 다만 여성 후배들에게 이런 조언을 하고 싶다. ‘놓치고 싶지 않다’ 싶은 프로젝트가 있을 때는 과감히 나서야 한다. 육아 중인 여성에게 ‘프로젝트 매니저(연구과제 책임자)를 하실래요’ 하면 스스로 부담스러워하는 경우가 많아 안타깝다.”

-아이 둘을 키우며 공부하고 일하는 것은 어땠나.

“첫째는 미국에서 공부하며 키웠다. 남편도 함께 유학할 때였다. 그야말로 파란만장했다. 책으로 쓰면 몇권 나올 것이다. 둘째는 귀국 후 회사생활을 하면서 낳았는데 초등학교 입학 때까지 한글을 떼지 못했다. 받아쓰기 시험을 보면 잘해야 20점 받아오더라. 주변 사람들이 미쳤다고 했다. 그런데 아이 뒤를 쫓아다니면서 답을 주겠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사교육도 딱히 강요하지 않았다. ‘이거 해보는 게 어때’ 혹은 ‘여기서 중단하면 이렇게 후회할 수 있어’ 식으로 대화를 했다. 스스로 결정하게 하고 실패하든 성공하든 기다려주려고 노력했다. ‘내가 내 자식을 안 믿으면 누가 믿겠나’ 하는 글을 봤는데 정말 그 마음으로 살았다.”


-꼭 여성 과학자뿐 아니라 일하는 엄마들 다수가 아이들과 보내는 시간이 부족해 죄책감을 느낀다.

“미국에서 큰 애를 키울 때 주간보육시설(데이케어센터) 선생님과 상담하며 ‘너무 힘들다’ 했더니 이런 말을 하더라. ‘양보다 질’이라고. 아이랑 10시간 보낸다면 좋겠지만 그 시간 내내 좋은 얘기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매일 매일 30분이라도 ‘오늘 하루 어땠어’로 시작하는 대화를 하려고 노력했다. 야근할 때는 아이한테 전화해 ‘엄마 10시에 들어가니까 자지 마’라고 했다. 얘기하려고. 엄마는 아이 얼굴만 봐도 안다. ‘오늘 별일이 없었구나’ 하는 것을. 오히려 애가 5분 얘기하다가 졸리다며 자러 간다. 그럼 나도 그날 하루 편하게 잘 수가 있는 거다.”

-가족 분위기도 영향을 미쳤을 것 같다.

“아는 의사부부가 있는데, 미국에 이민 갔다. 그곳에서 의사로 일하려면, 인턴과 레지던트를 다시 거쳐야 한다. 그런데 한 살, 세 살배기 아이가 있어 남편만 그 과정을 거치고 아내는 그냥 가정주부로 살았다. 70대가 됐는데도 늘 그 한스러움을 말씀하신다. 남편이 이분들을 뵙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나를 공부시켜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웃음).”

-IT 업계에서 많은 여성 후배들을 봐왔을 텐데.

“상담을 많이 해주었는데 육아 고민을 토로하는 후배들이 가장 많았다. ‘걔(아이)는 걔고 나는 나다’라고 분리해 생각해야 한다는 얘길 많이 해줬다. 내가 아이의 모든 것을 책임져줘야 한다는 생각을 내려놓아야 한다. 나는 사실 애들 때문에 일을 오래했다고 생각한다. 회사생활을 하면서 최악의 상황이 닥치기도 하잖나. ‘내일 사표 내자’는 생각으로 퇴근을 했는데 집에 또 다른 난장판이 벌어져 있다? 그러면 완전히 잊게 된다. 다음날 출근하면서 ‘아 별일 아니었어’ 하는 마음으로 극복할 수 있게 된다. 아이를 낳을지 말지 고민하는 후배들도 있는데, 각자의 선택이겠지만 아끼는 이들에게는 ‘오래 일하려면 애가 있는 게 좋다’고 말하는 편이다.

-IT 분야에서 종사하는 여성 과학자들의 특성이 있을지.

“수많은 신입사원을 뽑아봤고, 일하는 것도 지켜봤다. 많은 남성이 ‘조직의 장’이 되는 것을 목표로 삼는 반면 여성은 그렇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여성들은 스스로 동기부여를 잘하는 게 중요하다. 나는 ‘내가 만든 보안 솔루션을 미국에 꼭 팔아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일했다. 여성 과학자들은 대개 섬세하다. 몰입을 잘하다 보니 상대적으로 시야가 좁은 면도 있다. 후배들에게 종종 하는 말이 있다. ‘(공중으로 손가락 집게를 들어올리는 동작을 하며) 답답할 때 나를 쭉 끌어올려봐. 위에서 나를 보려고 해봐.’ 하던 일을 덮고, 생각해보는 거다. 여기는 뭘 하는 데지? 나는 여기서 뭘 할 거지? 일주일, 한달 뒤를 보지 말고 내년, 내후년을 생각해보라. 의도적으로라도 시야를 넓히는 연습을 하면서 일의 동기를 잘 찾았으면 한다.”


-매사 열심히 하려고 하면 오히려 오래 못 하는 것 같다.

“바로 그거다. 내가 이 일을 해야 하는 이유를 장기적 관점에서 본 다음, 다시 현실로 돌아오면 마음에 여유가 생긴다. ‘이건 뭐 대충해도 돼’ 싶을 때도 있을 것이다. 이런 조언은 경험해본 사람만이 해줄 수 있다. 은퇴하면 개인적으로 ‘멘토링 프로그램’을 해보고 싶었는데, 마침 이곳에 오게 돼 ‘온라인 멘토링 서비스’를 시작했다. 한국여성과학기술인지원센터 홈페이지에서 조언을 받고 싶은 여성 과학자를 선택해 질문을 남기면 된다. 이 프로그램에 많은 여성 과학자들이 발 벗고 나서 주었다. 평소 여성들은 남을 진심으로 돕고 싶어하는 장점이 있다고 생각해왔는데,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여성 과학자 양성을 위한 다양한 사업을 하고 있는데 주안점이 있다면.

“여성의 생애주기를 포괄하는 프로그램들을 만들었다. 초·중·고생들에게 다양한 과학 분야가 있다는 걸 알리기 위해 ‘전공체험’ 교육을 하고 있다. 대학(원)생에겐 취업 멘토링을, 사회 초년생들에게는 경력개발 지원을, 경력단절기 여성에게는 복귀 지원사업을 하고 있다. 어린 시절의 경험이 특히 중요한데, 다행히 지금은 소녀들에게 ‘여자가 무슨 과학이야’라고 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그것으로 만족해선 안 된다. 소녀들에게 비전을 보여줘야 한다. 지금은 과학기술이 중요한 시대이고, 이 분야에서 ‘네가 능력을 펼칠 기회가 많다’고 알려줘야 한다.”

-여성 과학자 양성은 교육, 정책, 문화 모두 다루는 일이 될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장·단기 프로그램과 제도·정책을 제안하는 사업을 두루 병행하고 있다. 다만 우리가 ‘여성 과학자가 많아져야 한다’고 말할 때 아쉬운 대목이 있다. 여성의 ‘과학할 권리’가 여성 과학자가 늘어야 할 이유의 전부는 아니다. 여성 과학자가 많아져야 하는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 바로 과학기술의 성장과 발전 때문이다. 선진국에서도 남성만으로 고급인력을 채울 수 없기 때문에 여성 과학자 육성을 얘기하고 있다. 최근 하버드비즈니스 리뷰에 ‘여성 임원’이 기업을 어떻게 긍정적으로 바꾸는지에 대한 분석 기사가 실렸다. 과학 분야, 내가 몸담았던 IT 업계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여성을 필요로 하고 있다. 이게 시대 흐름이다.

-과학기술이 중요한 시대이자, 과학기술 분야가 여성을 필요로 하는 시대라는 말인가. 그 말을 들으니, 문과 출신 여성들도 과학기술 흐름을 알아야 할 것 같다.

“물론이다. 내가 어떤 시대의 흐름 속에 놓여 있는지를 아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다. 과학을 다시 공부해 전공으로 삼으라는 얘기가 아니다. 과학기술이 바꿀 미래를 가늠해보고, 자신의 역할을 구체적으로 찾으라는 얘기다. 갖고 있던 직업이 어느 순간 없어지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일의 방식과 형태가 바뀔 것이다. 인공지능 로봇이 노인을 돌보고 육아도 많이 도울 것이다. 재택근무도 일상화될 것이다. 20~30년 후 나는 어떤 일을 하고 있을지를 상상해보라. 여성 과학자뿐 아니라 많은 여성이 과학기술에 관심을 가지고, 새 시대를 열어가는 주역이 되길 바란다.”

글 송윤경 기자 kyung@kyunghyang.com·사진 김영민 기자 viola@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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