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대학농구와 함께한 10년 세월 이상원 한국대학농구연맹 사무국장

민준구 2021. 4. 17. 1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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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프볼=민준구 기자] 농구전문잡지 점프볼이 2021년 창간 21주년을 맞았다. 점프볼은 오랜 세월 한국농구와 함께하며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농구매거진으로 자리 잡았다. 점프볼은 창간 21주년을 기념하는 기획 시리즈로 자신의 자리에서 묵묵하게 농구 발전을 뒷받침해온 주인공을 소개하는 시간을 만들었다. 세 번째 주인공은 대학농구연맹의 전반적인 업무를 총괄하고 있는 이상원 사무국장이다. 선수 출신으로 구단 프런트, 유소년 코치를 거쳐 대학농구연맹의 살림을 도맡아 하고 있다. 과연 그는 위기의 대학농구를 위해 어떤 플랜을 지니고 있을까.

※본 기사는 점프볼 3월호에 게재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선수, 매니저, 전력분석원, 유소년 코치

이상원 국장은 어렸을 때 부터 체격이 좋았다. 그래서 시작했던 농구가 곧 인생이 되었다. 그는 짧았던 선수 시절을 뒤로 한 채 창원 LG의 매니저, 전력분석원, 그리고 유소년 코치까지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며 농구 인생을 걸어왔다.

Q. 한국농구를 지킨다 시리즈를 시작하면서 처음 만나는 선수 출신입니다. 농구와 첫 만남은 어떻게 이뤄졌나요.
초등학교 때 신체조건이 좋은 학생들을 따로 적어놓은 명단이 있었습니다. 체력 측정을 했는데 나름 기록이 좋았어요. 결국 대방초등학교로 전학을 했고 4학년 2학기 때부터 농구를 시작했습니다. 키가 큰 편이었죠. 170cm가 훌쩍 넘었으니까요. 용산중, 용산고, 그리고 명지대에 이를 때까지 농구를 계속했습니다. 원래는 국민대에 가기로 했는데 해체되면서 명지대에 갔죠.

Q. 프로 생활이 짧았습니다. 허리 부상 문제가 있었다면서요.
대학 시절에 허리 수술을 받았습니다. 군 면제 판정이 날 정도로 심각했었죠. 무릎 수술도 두 번이나 했어요. 다행히 LG가 농구팀을 창단했고 프로 선수가 될 수 있었습니다. 대신 운동을 많이 하지는 못했어요. 현 손종오 LG 사무국장이 당시 매니저였는데 군대를 가게 되면서 그 자리를 물려받았죠. 선수로서의 미련은 없었습니다. 남들보다 잘하지 못할 바에는 빨리 그만두고 다른 생활에 적응하는 것이 맞다고 판단했죠.

Q. 후회는 없었나요.
전혀요. 오히려 지금 생각해봐도 좋은 선택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미련 을 가지고 몇 년 동안 억지로 붙잡을 인연이 아니었어요. 어릴 때부터 운동을 했다고 해서 그게 인생의 전부는 아닙니다. 잘하지 못한다면 다른 걸 빨리 생각해야 하죠. LG에서 14년간 있으면서 정말 많은 사람들을 봤습니다. 붙잡고 있으면 안 될 일에 미련을 두면 보통 결말이 좋지 않더라고요. 또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선수를 그만두게 되면 사회에 적응하지 못합니다.전 좋은 케이스라고 생각했어요.

Q. 선수 시절은 짧았지만 농구로 밥을 먹고 사는 사람이 됐습니다. 이렇게 질긴 인연이 될 거라고 예상했나요.
그렇지 않았어요. 운동하는 게 재밌었고 남들보다 크다 보니 유리하기도 했죠. 하지만 이렇게까지 농구라는 틀 안에서 오래 생활할 줄은 몰랐어요.

Q. 선수 시절에는 코트 안에서 보여줘야 했지만 은퇴 후에는 코트 밖에서 하는 일들이 많아졌습니다. 적응하기 쉽지 않았을 텐데요.
선수 시절에는 생활 자체가 규칙적이었어요. 근데 은퇴하면서 곧바로 리듬이 깨지더군요. 신체적인 어려움이 있었죠. 늦게까지 깨어 있어야 했으니까요. 컴퓨터를 잘 다루기 위해 학원을 다니기도 했습니다. 엑셀, 워드도 처음 배우기 시작했죠. 사무를 보기 위한 준비가 미흡했습니다.

Q.재밌었던 일들도 많았겠죠. 새로운 생활을 통해 오는 재미는 무엇이 있었을까요.
버나드 블런트가 야반도주한 일은 쇼킹했죠. 매니저 생활을 하면서 겪었던 모든 일들이 기억에 남아요. 선수들의 사생활도 자세히 알고 있었으니까요. 재미도 있었고 추억도 많지만 자세히 이야기를 하기는 참 어렵습니다.

Q. LG에서 보낸 14년이란 시간은 현재의 이상원 국장을 만든 시간일 것 같습니다.
그렇죠. LG에서 정말 많은 걸 배웠습니다. 대학농구연맹에서 자리를 잡고 일하는 것 역시 LG에서 많은 걸 배웠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죠. 한상욱 단장님, 손종오 국장 밑에서 업무적으로 많은 것을 배웠어요.
14년 LG 재직 후 대학연맹으로 이적

이상원 국장과 LG의 인연은 무려 14년이다. 그러나 이별의 순간은 찾아왔다. 창원에서 유소년 코치로 일하고 있던 그는 한상욱 단장과 당시 대학농구연맹 사무국장이었던 안덕수 현 KB스타즈 감독의 추천에 따라 새 보금자리로 몸을 옮겼다. 구단의 살림을 담당했던 그가 한국 대학농구의 살림을 책임지게 된 것. 이상원 국장의 치열한 삶이 본격적으로 시
작됐다.

Q. 대학농구연맹에 오게 된 계기는 무엇입니까.
제가 오기 전에 안덕수 KB스타즈 감독이 사무국장으로 있었어요. 전 창원에서 유소년 코치로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었고요. 그때 안덕수 감독이 샹송화장품 코치로 가게 되면서 대체자가 필요했습니다. 한상욱 단장님과 안덕수 감독이 저를 추천했더라고요. LG에서 정말 오래 있었고 새로운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은 돌아가신 故모창배 회장님과 박건연 전무님께서 도움도 주셨고요. 그렇게 자리를 옮기게 됐고 일주일 뒤 김천에서 열린 MBC배 대회를 지켜보기 위해 현장으로 갔습니다. 벌써 10년이 지난 일이네요.

Q. 구단과 연맹의 행정 업무는 분명 다를 것 같습니다. 어려움도 있었을 텐데요.
LG에 있을 때는 팀만 신경 써도 문제가 없었습니다. 근데 대학농구연맹으로 오면서 남자 대학 1, 2부, 여자대학까지 포함해 수십개 팀과 대화를 하다 보니 전혀 다른 일이더라고요. 다양한 사람을 만났고 또 많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힘들다는 느낌보다는 재밌다는 생각을 했어요.

Q. 누군가 이끌어주는 사람도 있었을까요.
보통 사수라고 하죠. 업무를 시작했을 때에는 실질적인 조언을 해주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런 부분이 힘들기도 했죠. 혼자 많은 자료를 찾아봐야 했고 자료 정리나 페이퍼 작업 등 여러 부분에서 애로사항이 있었죠. 어려움도 있었지만 그걸 해결해나가는 과정 역시 재밌었습니다.

Q. 2011년부터 대학농구연맹에 몸담았습니다. 대학농구리그가 출범한 지 불과 1년이 흘렀을 뿐이었죠. 업무량이 매우 많았을 것 같습니다.
대학농구리그 출범 초기에는 홈&어웨이 체제가 완전하지 않았습니다. 2011년부터 그 부분을 정착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죠. KBL의 최준길 전 운영팀장에게 조언을 구하기도 했습니다. 경기일정을 만드는 데 도움을 받았죠. 가장 중요한 건 예산이었는데 문화체육관광부와 이야기를 많이 했습니다. 또 일을 하다가 막힐 때에는 모창배 회장님과 박건연 전무에게 조언을 구하기도 했습니다.

Q. 10년이란 세월 동안 많은 일들을 해왔습니다. 그중 가장 고민했고 또 고민하고 있는 부분은 무엇인가요.
먼저 대학농구리그가 완전히 자리를 잡은 것이 가장 기쁜 일입니다. 경기수도 많아졌고 이를 통해 경기력을 끌어올리며 시즌에 대한 의미를 더 높이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찾아보기 힘들었던 일이지만 지금은 하위권대학 팀도 프로 선수를 배출하고 있습니다. 단일 대회가 아닌 시즌제를 확립하며 얻은 성과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고민이 되는 부분은 많아요. 대학농구는 현재 정체기이자 과도기에 놓여 있습니다. 공부하는 선수라는 것이 사실 어떤 시선으로 바라봐야 하는지 굉장한 고민을 주게 하거든요. 엘리트 육성과 스포츠 대중화는 정반대의 개념입니다. 방향을 잘 잡아야 하죠. 개인적으로는 선수가 원하는 방향대로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지 않나 싶습니다. 미국과 비교하는 건 어려워요. 공급과 수요 모든 면에서 차이가 큽니다. 물론 일선에서 고생하시는 분들이 많다는 건 알고 있지만 시스템의 변화가 필요하지 않나 싶습니다.

Q. 그렇다면 대학농구연맹은 어떤 역할을 맡아야 할까요.
대학농구리그에 참가하는 대학을 지원하는 것, 그리고 선수들이 좋은 모습을 보여줄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문화를 바꾸려고 노력했습니다. 부정적인 부분이 짙었던 과거와 달리 이제는 응원하는 분위기가 지배적입니다. 우리가 주인공이 될 수는 없습니다. 대신 주인공이 더 멋져 보일 수 있도록 옆에서 조연 역할을 하는 것이 대학농구연맹의 책임입니다.
모두 경쟁하며 즐기는 대학농구를 위해

대학농구는 현재 큰 위기를 맞고 있다. 스타 선수들이 즐비했던 초창기에 비해 현재는 팬과 미디어의 관심이 덜한 상황이다. 고교 선수들의 대학 진학은 이제 당연한 일이 아니다. 더불어 환경이 열악한 여자 대학농구의 쇠퇴까지 더해지면서 조금씩 흔들리고 있다. 그럼에도 이상원 국장은 긍정적인 마인드를 잃지 않았다. 과거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 포기하지 않고 달리겠다는 다짐 역시 잊지 않았다.

Q. 대학농구리그 출범 초기에는 올스타전이 열릴 정도로 스타 선수들이 많았습니다. 그때와 비교했을 때 지금은 조금 주춤하고 있지 않나 싶은데요.
시기가 좋았던 것 같아요. 국민은행의 후원으로 3년간 좋은 분위기를유지할 수 있었죠. 중요한 건 스타 선수들이 있었다는 겁니다. 모든 스포츠가 그렇듯 스타가 있는 곳에는 언제나 인기가 쫓아오기 마련이죠. 또 현재의 상황이 모두 대학만의 문제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대학농구연맹에서도 나름 노력을 하고 있죠. 연세대와 고려대의 라이벌전은 물론 단국대와 상명대의 천안 더비, 예전에는 단국대와 건국대, 동국대를 일컬어 삼국지 대전이라 부르기도 했습니다. 이런 부분들이 적극적으로 노출되고 관심을 산다면 현재의 아쉬움을 조금씩 지울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Q. 어쩌면 코로나19로 정상 진행이 불가능했던 2020년은 이러한 어려움이 심화된 시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농구만이 아닌 다른 모든 스포츠가 위기를 맞이했다고 생각합니다. 대학 감독님들과 수차례 대화를 나누며 어떻게든 대회를 치르려고 노력했습니다. 선수들을 위해서라면 어떻게든 대회를 열어야 했죠. 감독님들이 협의를 잘해줬고 LG와 WKBL에서 이천 챔피언스파크 체육관 그리고 서수원 칠보체육관 대관에 도움을 줬습니다. 상황은 어려웠지만 주변의 도움으로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Q. 올해는 정상적인 시즌을 기대해봐도 좋을까요.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 플랜 A를 준비하고 있지만 수동적일 수밖에 없는 구조 같아요. 현실적으로 홈&어웨이가 어렵다고 느끼기에 4, 5, 6월에 대회를 열 계획입니다. 6강에 진출한 모든 팀을 9월 왕중왕전에 초청, 챔피언을 가리는 방식입니다. 올해는 서수원 칠보체육관에서 열릴 가능성이 높지만 100%라고 말하기에는 어렵습니다.

Q. 고교 선수들의 잇따른 프로 도전, 대학 선수들의 조기 프로 진출 등 대학농구에 대한 시선이 과거와 같지 않습니다. 그 부분은 어떻게 바라보고 있나요.
선수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로 인해 대학농구의 가치가 떨어진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수많은 대학 지도자들이 피와 땀을 흘리며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선수 육성을 위해 힘을 쏟고 있습니다. 이제는 오로지 운동만 생각할 수 없는 구조이기 때문에 예전보다 더 어려워졌습니다. 양으로 승부했던 과거와 달리 지금은 체계적인 시스템을 갖췄다고 볼 수 있죠. 팀 훈련이 부족하다고 느낀 선수들은 개인 훈련을 통해 보완하고 있습니다. 프로 도전 역시 존중받아야 할 선택이지만 그 부분으로 인해 대학농구가 부정적인 시선에 노출되는 건다소 아쉬운 일입니다. 대학농구만이 가질 수 있는 특별한 무언가가 없다면 현재의 흐름은 계속 유지될 것 같습니다. 프로 생활을 가장 적게 하는 스포츠가 무엇인지 찾아봤습니다. 농구와 배구더라고요. 축구와 야구는 고교 졸업 이후 프로 진출이 어느 정도 잡혀 있는 상황이지만 농구와 배구는 그렇지 않습니다. 4년의 시간이 줄어드는 것, 최소 1년의 시간이 줄어드는 건 사실입니다. 다만 장기적으로 봤을 때 선수 본인에게 있어 대학을 경험한다는 건 큰 메리트가 될 수 있다고 자신합니다. 고교 때까지 틀에 박혀 있는 선수들이 대학 진학 이후 많은 걸 접하며 스스로를 완성한다는 측면에서 농구 외 사회적 부분까지 배울 수 있습니다. 물론 본인 스스로가 그렇게 판단해야만 가능한 일이기도 하죠.

Q. 10년간 몸담은 대학농구연맹이지만 앞으로 10년 이상 더 있어야 할 곳 이기도 합니다. 이곳에서 꿈꾸는 무언가가 있을까요.
10년이란 시간이 결코 짧지 않죠. 개인적으로 전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좋아하는 일을 20년 넘게 하고 있다는 것도 복이니까요. 여기서 더 큰 꿈을 꾸는 건 욕심이라고 생각합니다. 과분한 일이죠. 그저 지금은 대학농구연맹이 발전하고 남자, 여자 대학팀이 20개 이상 늘어났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활성화가 되어 모두가 경쟁하고 즐기는 무대를 만드는 것이 제가 바라는 일입니다. 본인 역시 사람들의 평가에 자유로울 수 없는 자리에 있습니다.

Q. 먼 훗날 이상원이란 사람은 어떻게 기억되고 싶은가요.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게 일을 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고 싶습니다. 중립적으로 성실히 일을 했던 사람도 좋습니다. 또 그렇게 하려고 노력중이에요. 학연, 지연, 그리고 각 학교들의 인식 차이 등 다양한 부분이 있지만 그럼에도 어느 쪽에 서 있지 않고 가운데에서 묵묵히 제 일을 한 사람으로 기억됐으면 합니다.

Q. 마지막으로 이상원 국장의 새해 소원은 무엇입니까.
모두의 바람처럼 코로나19가 빨리 끝나서 정상적으로 일을 진행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뻔할 수도 있는 소원이지만 그래야만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으니까요. 선수들은 물론 그들을 지켜보는 모든 사람들까지 행복하게 체육관을 출입하는 걸 옆에서 지켜보고 싶습니다. 또 대학농구 사정이 좋지 않다는 이야기가 외부에서 많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또 지난해에는 고졸 선수가 전체 1순위로 지명되면서 더욱 많아졌죠. 하지만 대학농구 역시 엄청나게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전처럼 좋아질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올해에 대학농구가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모두가 힘을 합쳐 노력하겠습니다.

이상원 국장은...

1974년 출생. 대방초, 용산중, 용산고, 명지대를 거쳐 1997-1998시즌 LG의 창단 멤버였다. 허리 부상으로 인해 일찍 현역에서 물러난 뒤 LG 매니저, 전력분석원, 유소년 코치로 활동했다. 2011년 6월, 안덕수 감독의 뒤를 이어 대학농구연맹 사무차장이 됐다. 이후 사무국장으로 승진, 대학농구의 전반적인 살림을 책임지고 있다.

 

#사진_박상혁 기자

 

점프볼 / 민준구 기자 minjungu@jumpbal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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