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살장 앞에서 마주한 '어떤 명령'
“이런 일이 일어났는데 어떻게 사회가 멀쩡히 굴러갈 수 있는거지?” 7년 전 오늘,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불과 두 달 뒤, 교복을 입지 않은 내 자신에 적응하던 중이었다. 처음에는 전원 구조 보도를 믿고 관심을 껐다. 그런데 갈수록 이해하기 힘든 소식들이 들려왔다. 금 간 마음이 우르르 무너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여전히 열심히 살고 있었다.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지만 달리 뭘 할 수 없었다. 구멍이 나버린 가슴을 덮고 나도 일상을 견디기 시작했다.
4월, 도살장에 갔다
‘가만히 있으라.’ 침몰하는 세월호 내에 울려 퍼진 안내 방송이라고 한다. 안내라고 하지만, 어쩌면 숱하게 들어와 익숙한 ‘명령’이었다. 이를 믿은 학생들은 허무하게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배신당했다. 안내 방송을 한 선장과 직원들은 학생들을 버려둔 채 곧바로 탈출했고, 그 뒤 배가 완전히 침몰할 동안 국가는 나서지 않았다. 이 일련의 사실들은 내가 살아가는 불의한 사회를 극적으로 느끼게 해주었다.
그로부터 5년이 지난 2019년 4월의 쾌청한 봄날. 나는 도살장 앞이었다. 서울애니멀세이브에서 진행하는 ‘비질(vigil), 진실의 증인되기’라는 활동에 처음으로 참여한 것이다. 약간의 걱정, 긴장과 함께 버스를 타고 도착한 그곳은 그저 평범한 공장 지대였다. “도살장이라니. 물론 이런 곳이 있는 게 당연하겠지….” 바로 옆에는 도살장에서 갓 나온 ‘고기’를 구워 먹을 수 있는 식당도 있었다.
도착해서 주위를 둘러보는데 갑자기 벽 너머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찢어지는 고음, 처음 듣는 낯선 소리에 나를 포함해 많은 이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몇몇 이들은 증거를 수집하듯 핸드폰의 녹음 버튼을 눌렀다. 난 우연히 범죄 현장에 있게 된 사람처럼 몸이 얼어붙었다. 낯선 그 소리가 살려달라는 고통의 절규임을 이내 알아챘기 때문이다.
당신에게도 이 소리가 들릴텐데…
우린 비명에 놀랐다지만, 도살장 경비 노동자는 어디선가 무더기로 몰려온 우리를 보고 놀란 것 같았다. 곧 연락을 받고 나온 사무실 직원들은 우리에게 고압적으로 협박했다. “당장 지워! 남의 회사 벽 찍는 것도 불법이야!” 그것이 불법이 아님에도 몇몇은 당황하여 영상을 지웠다. 명령에 대한 복종, 그렇게 배워온 탓이었다. 여기서 당장 사라지라고 고함치는 그들과 한참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사이, 트럭 몇 대가 우리 앞을 지나 도살장으로 들어갔다.
수십 명(命)의 동물들을 빽빽하게 가둔 이층 트럭도 있었고, 엄마 돼지인지 덩치가 아주 큰 동물이 홀로 외롭게 갇혀있는 작은 트럭도 지나갔다. 비명은 계속 들려왔고 곧 사이렌이 반짝이며 경찰차가 도착했다. 그러나 비명이 난무하는 현장 속 ‘피해자’를 구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비명을 들은 우리가 가해자 취급을 받고 있었다. “회사가 위력을 느끼면 업무방해에요. 돌아가세요.”
분명 그곳엔 고통에 몸부림치는 절규가 난무했다. 그들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는 듯, 자신이 맡은 일에 충실하게 복무하고 있었다. 내가, 우리가 지금 듣고 있는 것이 가짜가 아닌데? 심지어 당신들의 귀에도 들릴텐데. 직원, 경찰, 식당 주인 모두가 우리에게만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 사회가 어떻게 멀쩡히 굴러갈 수 있었던 건지 순진한 내가 5년 만에 답을 얻는 순간이었다.
도살장에 가기 일주일 전 진도에 갈 일이 있었다. 세월호 참사 5주기가 다가오고 있었기에 가는 길에 목포신항에 들러 처음으로 세월호의 앙상한 선체를 보았다. 녹슨 선체는 비현실적으로 거대하게 느껴졌다. 항구의 펜스에는 노란 리본들이 개나리처럼 피어있었다. 바쁘게 돌아가는 사회에 비해서 너무나도 고요한 풍경에 나는 말을 잃었다.
도살장 앞 노란 리본
그리고 일주일 뒤, 그곳에 피어있던 노란빛 애도를 옮겨 심었다. 바쁜 사회에서 누구도 찾지 않는 고요한 도살장 앞으로 말이다. 사람들은 포스트잇 쪽지를 도살장의 담에 써 붙였고, 새하얀 국화꽃을 앞에 놓아두고 그곳을 빠져나왔다.
그날 도살장 앞에서 나는 죽음을 어떻게 애도 해야 하는지 어렴풋이 깨달았다. 나는 그날부로 매주 비질에 참여하여 도살장 앞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세월호가 단순한 ‘교통사고’라고 말하는 이들과 축산업이 ‘자연의 섭리’라고 말하는 이들이 겹쳐지기 시작했다. 도살장 앞 트럭 철창에 머리를 박는 돼지들의 몸부림, 줄줄이 들어갔다 금세 텅 비어 나오는 트럭들, 이것은 다름 아닌 우리 사회였다. ‘가만히 있으라.’ 온 사회가 비명을 감추는 도살장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그때가 아기 돼지 ‘새벽이’가 종돈장 분만사(엄마 돼지들이 갇혀 분만을 하는 곳)에서 구조되어 우리 사회에 오기 3개월 전이었다. 마취도 없이 고환이 뜯기고 꼬리와 생이빨이 잘린 후 6개월 뒤 고기가 될 운명들. 구조할 수 없음에 절망하던 우리는 더이상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러자 우리 사회에 새벽이가 왔다.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한해 1천억 동물들의 행렬에서 새벽이가 우리 사회에 홀몸으로 온 것이다.
새벽이는 직접행동 디엑스이(DxE) 활동가들이 공개구조(Open Rescue)를 통해 구조한 한국 최초의 농장 동물이다. 열악한 농장 내부, 구조 과정을 기록하여 공개하는 직접행동인 공개구조는, 고통에 처한 누구나 마땅히 구조될 권리가 있다는 것을 당당히 드러낸다. 그렇게 농장을 나온 동물들이 비로소 삶으로써 증언하며 우리의 공고한 인식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다시는 가만히 있지 않겠다
우린 다시는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가만히 명복만 빌고 있지 않을 것이다. 먼저 간 이들을 짓밟고 있는 이가 다름 아닌 우리였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새벽이는 남탓만 하던 나에게 이 쓰라린 답을 알려주었다. 구조할 수 없는 구조, 나는 다름 아닌 가해자의 대오에 서 있던 것이었다. 세월호와 도살장, 이 연결은 내가 동물해방 운동을 시작한 계기가 됐다. ‘명복을 빌지 말라’ 재일조선인 시인 김시종이 일본에서 5·18 광주항쟁을 목도하며 쓴 시다. 마지막 구절을 인용한다.
“억울한 죽음은 / 떠돌아야 두려움이 된다. / 움푹 팬 눈구멍에 깃든 원한 / 원귀가 되어 나라를 넘쳐라. / 기억되는 기억이 있는 한 / 아아 기억이 있는 한 / 뒤집을 수 없는 반증은 깊은 기억 속의 것. / 감을 눈이 없는 죽은 자의 죽음이다. / 매장하지 마라 사람들아, / 명복을 빌지 마라.”
글·사진 섬나리 디엑스이·서울애니멀세이브 활동가
*참고 글 : [세상 읽기] 명복을 빌지 마라 / 후지이 다케시(▶칼럼읽기)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 일 ‘오염수’ 정화설비 3개 중 2개, 최종허가도 없이 가동했다
- 현금 불법 선지급 ‘대토 패닉’…투기판 먹잇감 된 3기 신도시
- 미얀마 울린 한국 ‘위로의 노래’…“에브리싱 윌 비 오케이”
- “거짓 초과근무 동참 거부하자 왕따”…노원구청 직장괴롭힘 논란
- 송영길 “공수처 내실있는 진용 구성부터” 검찰개혁 속도조절 주장
- ‘고덕동 택배대란’ 3주…대안없는 ‘차량 출입 반대’ 무엇이 문제였나
- ‘나쁜 관종’들은 왜 끊임없이 도발할까
- “페미 지원불가” 편의점 알바 모집 공고…본사 “점포 제재 검토”
- 미, 화이자·모더나 3차 접종 선언…‘백신 악재’ 돌파할 카드는
- 정규직 입사했는데 계약직 근로계약서 내미는 ‘입사 갑질’ 회사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