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재의 식사(食史)] 2000년 전 폼페이 식당 메뉴판엔 닭과 오리가 그려져 있었다
편집자주
※이용재 음식평론가가 격주 토요일 흥미진진한 역사 속 식사 이야기를 통해 ‘식’의 역사(食史)를 새로 씁니다.
#한쪽에서 거나하게 취한 남자 둘이 한 잔의 술을 놓고 실랑이를 벌이기 시작한다.
“이리 가져오시오.”
“아닌데, 내 술인데.”
하루이틀 일도 아니고. 술을 가져온 여급은 지겹도록 겪어온 상황에 또 말려 들고 싶지 않은지 엉뚱한 제3의 손님에게 술을 권한다.
“오케아누스, 와서 이 술 마셔요!”
어쨌든 둘 중 한 사람에게 나온 술임은 분명한데, 아예 다른 손님에게 술을 주려 들다니. 여급도 나름 대단하다.
#다른 쪽에서는 거나하게 취한 남자 둘이 주사위 게임을 하고 있다. 술에 취해서 경쟁하니 문제가 안 생길 수 없다.
“내가 이겼지?”
탁자 위에 앉은 남자가 소리치자 상대 남자가 받아친다.
“아니야, 내가 이겼어. 그건 셋이 아니라 둘이라고!”
술도 취했겠다, 좋은 주먹을 놓아두고 왜 말로 문제를 해결하려 드는가? 참으로 그러하다. 이제 두 사람은 서로 욕을 하며 치고 받는다.
“쓰레기 같은 놈아, 셋이잖아. 내가 이겼어.”
“무슨 소리야, 더러운 자식아. 내가 이긴 거야.”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진 주인이 드디어 나서 두 사람을 밖으로 내쫓는다.
“싸움은 나가서 하라고요!”
그때였다. 조짐이 좋지 않았던 베수비오 화산이 본격적으로 폭발하기 시작했다. 시커먼 연기와 화산재가 날리고 용암이 뿜어 나오는 등 나름의 장관이었지만 폼페이의 주민 어느 누구도 즐길 수는 없었다. 일단 이 막강한 자연재해가 바로 자신들을 직격한 데다가, 그 모든 참사가 너무나도 순식간에 벌어졌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도시를 떠나려고 짐을 꾸렸다. 절망 속에서도 여자들은 자신의 아이들을 구하려고 애썼다. 노예들은 주인 곁을 따라가며 떨어진 기왓장으로 비처럼 쏟아지는 불씨를 막으려고 헛된 노력을 기울였다. 재는 한없이 쌓여 창문과 출입문을 막아 버렸고 순식간에 지붕 밑까지 차 올랐다. 두려움은 죽음 속에서 꺼지고, 사람과 동물은 마침내 광물의 세계와 하나가 되었다.’
1987년 출간된 ‘폼페이 최후의 날(시공사, 국내 출간 1995년)’을 펼치자마자 나름 상세하게 그린 멸망의 서사가 등장한다. 읽다 보면 폼페이 주민들의 비참한 운명에 통탄을 금할 길이 없지만, 이제 허구라 보아도 무방하다. 바로 올해 3월 22일 영국 일간 가디언의 보도에 의하면 이탈리아와 영국의 공동 연구진이 화쇄류(Pyroclastic Flow)의 지속 시간을 단 15분으로 추정했기 때문이다.
화쇄류는 화산에서 분출된 용암 및 화산재, 화산가스를 일컫는다. 바로 폼페이를 폐허로 만들고 주민 2,000~1만5,000명의 삶을 앗아간 원흉이다. 화쇄류의 지속 시간이 15분이었다는 건, 지금까지의 추정보다 참사가 훨씬 빠르게 벌어졌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폼페이 주민들은 대피의 시도조차 제대로 못하고 화산재에 파묻혀 버렸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덕분에 그들의 모습은 최후의 순간을 맞는 형국 그대로 굳어져 오늘날까지 남아 있게 된 것이다. (참고로 폼페이의 대표 유적이라 할 수 있는 주민상은 실제 사람의 시신이 아니다. 화산재에 파묻힌 시신은 세월이 흐르며 부패했으니 파묻혔던 잔재가 틀처럼 남았다. 여기에 석고를 부어 굳혀 상을 만든 것이다.)
서기 79년에 최후를 맞은 폼페이이지만 발굴 및 연구는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최근의 발견 덕분에 폼페이 주민의 최후 순간뿐만 아니라 삶에 대한 세부사항도 드러났다. 2020년 12월, 2019년부터 연구를 시작했던 간이식당 터모폴리움(termopolium)’이 공개된 것이다. 터모폴리움을 우리 식문화에 비유하자면 분식집쯤 될까? 와인과 함께 따뜻한 음식을 제공하는 일종의 패스트푸드점으로, 인부 혹은 하층민의 끼니를 위한 음식을 미리 준비했다가 내놓았으리라 추정한다. 터모폴리움은 이미 80곳 이상이 발굴된 바 있다. 하지만 이처럼 전체가 훌륭한 보존 상태로 발굴된 건 처음이다.
터모폴리움에서는 어떤 음식을 내놓았을까? 메뉴가 보존된 덕분에 식재료는 추정할 수 있다. 조리대이자 매대로 추정되는 ‘카운터’의 벽에 청둥오리 두 마리(뒤집혀 있다)와 수탉 한 마리가 프레스코 기법으로 그려져 있다. 마침 터모폴리움에서 발견된 식재료의 잔해 또한 일치해 벽화가 메뉴임을 인증해 주었다. 콩가루와 와인이 묻은 도기 항아리와 더불어 오리의 뼈, 염소, 돼지, 물고기, 달팽이 등의 동물 잔해가 발견된 것이다. 개 또한 조리대에 그려져 있지만, 사납게 생긴 데다가 매어 놓은 목줄로 미뤄 볼 때 식용보다 분위기를 잡는 경고용으로 쓰였을 가능성이 높다.
터모폴리움으로 인부 혹은 하층민의 음식문화를 엿볼 수 있다면, 나머지 계층들을 위해서는 어떤 실마리가 남아 있을까? 상류층 유적으로는 겨울잠쥐(Glirulus) 비육을 위한 단지가 있다. 1950년대 중반, 폼페이 원형 경기장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주택에서 도기 한 점이 발굴됐다. 안쪽 벽면을 따라 소용돌이 형태의 골이 나 있으니, 겨울잠쥐가 오르락내리락하는 통로였다. 이와 더불어 입구 가까운 안쪽 벽면에는 먹이를 채워주는 수납 공간도 붙어 있다. 뚜껑을 열면 밝으니 겨울잠쥐가 동면에 들어가지 못한다. 한편 뚜껑을 덮으면 겨울잠쥐를 가둠과 동시에 내부가 어두워진다. 그 결과 생체시계를 혼란시켜 폭식을 유발시키면 비육이 이루어졌다.
마침 기원전 1세기의 겨울잠쥐 비육에 대한 기록도 남아 있다. “많은 이들이 집에 단지를 두고 겨울잠쥐를 키웠다. 내부에는 도토리, 밤, 호두 등을 넣어 둘 수 있으며, 뚜껑을 덮어두면 어둠 속에서 살이 오른다”고 한다. 현존하는, 서기 5~6세기에 편찬된 요리책에는 겨울잠쥐를 활용하는 레시피가 실려 있다. “돼지고기와 고추, 견과류, 실피움(멸종된 식물, 회향의 일종이라 추정한다), 가룸(발효액젓, 케첩의 선조)과 함께 다진 겨울잠쥐 고기를 빚어 만든 요리”이다. 한편 페트로니우스의 소설 ‘사티리콘’의 중심 소재인 트리말키오의 화려한 연회에서도 “꿀을 얹고 양귀비 씨를 뿌린 겨울잠쥐”가 전채로 등장한다.
다만 대다수 폼페이 주민의 일상 음식은 전혀 화려하지 않았다. 빵, 올리브, 와인, 치즈, 과일, 콩류, 텃밭의 채소가 거의 전부였다. 그나마 치즈도 파르미지아노, 레지아노 같은 숙성 제품이 아닌, 리코타에 가까운 생치즈였다. 산을 활용해 데운 우유에서 단백질만 막 분리해낸 수준 말이다. 동물성 단백질은 나폴리만에서 잡은 생선이나 돼지고기, 그것도 소시지나 블랙푸딩처럼 자투리를 활용한 가공육이었다. 여기에 양이나 염소고기, 닭이나 계란으로 가끔 식단에 변화를 주는 수준이었다. 이나마도 규모가 제법 큰 저택의 발굴 과정에서 추정한 결과이다. 1년 동안 ‘베스타 여사제의 집’을 조사하며 250점의 동물 뼈를 발견했는데, 70%인 175점 정도가 돼지뼈였다.
남아 있는 기록도 폼페이 주민의 이러한 일상 식단을 뒷받침해 준다. 주점과 연결된 도심지의 주택에서 메모 형태의 기록이 발견됐다. 일자는 특정할 수 없지만 8일간의 식품 및 생필품 지출 내역이 가격과 함께 정리된 목록이다. 지출 규모 순으로 살펴보면 일단 ‘빵’, ‘거친 빵’, ‘노예들에게 줄 빵’의 세 종류로 이루어진 빵이 1위, 그 뒤를 각각 기름과 포도주가 2, 3위로 잇는다. 이후로는 치즈, 양파, 서양대파(리크), 뱅어, 소시지, 부위를 특정할 수 없는 소의 고기나 내장이 등장하지만 지출 금액은 빈도에 비해 한참 떨어진다. 따라서 일반적인 폼페이 주민의 식사는 빵, 기름, 포도주, 치즈를 바탕으로 양념처럼 간을 맞춰주는 역할의 육가공품류가 가세했으리라고 추정된다.
포도주와 치즈는 요즘까지도 건강식의 일부로 받아들여지는 음식이다. 따라서 폼페이의 일반 주민들이 건강한 삶을 누렸으리라 생각하기 쉬운데, 속단은 금물이다. 무엇보다 이러한 메뉴 혹은 식재료의 선택이 자발적이기보다 계급을 기준 삼은 강제의 결과물이라 보기 때문이다. 로마의 시인들은 이러한 식단의 미덕을 찬미했지만 실제로 선택하지는 않았다. 당장 폼페이의 다른 벽화에서 드러나는 호화로운 양상 또한 일반적 주민들의 식생활과는 거리가 멀었다.
폼페이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영화 ‘폼페이: 최후의 날’과 책 ‘폼페이, 사라진 로마 도시의 화려한 일상’
이번 화 원고는 영화 ‘폼페이: 최후의 날’과 책 ‘폼페이, 사라진 로마 도시의 화려한 일상’을 참고했다. 칼럼을 읽은 뒤 폼페이에 대해 좀 더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든 이들에게 영화와 책을 권한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영화는 모든 면에서 엉망이지만 나름의 미덕을 지니고는 있다. 철저한 고증을 위해 지금까지 발굴된 유적 위에 영화 속 도시를 세웠으니 구조와 규모 등 폼페이라는 도시의 면면을 들여다볼 수 있다. 왓챠, 네이버 시리즈온, 웨이브, 유튜브, 구글 플레이에서 볼 수 있다.
한편 그리스 로마 연구자 가운데 가장 유명하고 독창적인 메리 비어드의 저서 ‘폼페이, 사라진 로마 도시의 화려한 일상(글항아리 발행)’은 600쪽에 이르지만 특유의 쉽고 친절한 문체 덕분에 술술 넘어간다. 역사부터 도시, 오락 등등 폼페이의 면면을 빠짐없이 담았다.
음식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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