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결남] "경찰이 고소 사실 알려 살해당했다"..법원 판단은?
대법원까지 올라가는 사건은 많지 않습니다. 우리 주변의 사건들은 대부분 1, 2심에서 해결되지만 특별한 사건이 아니면 잘 알려지지 않는 게 현실이죠. 재판부의 고민 끝에 나온 생생한 하급심 최신 판례, 눈길을 끄는 판결들을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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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 숙려기간 도중 아내가 자신을 형사 고소한 사실을 알게 된 남편이 흉기로 아내를 살해했습니다. 유족들은 '경찰관이 법을 어긴 채 피해자의 고소 사실을 가해자에게 알려 살인이 벌어졌다'고 주장하며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냈습니다. 법원의 판단은 어땠을까요.
■이혼 숙려기간 중 아내가 고소하자 살해
2016년 결혼한 A 씨. 사업에서 손해를 본 후 자주 술을 마시며 아내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영업상 접대를 한다는 명목으로 유흥주점을 수시로 출입하면서 부부 사이는 점점 벌어졌습니다.
이후 A씨가 아내를 흉기 등으로 위협하며 강제로 성관계를 맺는 일이 벌어지자, 아내는 집을 나오면서 이혼을 요구했습니다. 2017년 말 둘은 가정법원에 협의이혼을 신청했고 2018년 2월까지 숙려기간을 부여받았습니다.
이 기간 도중 A 씨는 자녀를 보러 온 아내의 휴대전화에서 다른 남성이 보낸 메시지를 발견했고, "같이 살지 않으면 죽어버리겠다"고 흉기를 들고 위협하며 성관계를 맺었습니다. 아내는 새벽 A 씨가 잠든 틈에 도망나와 서울 서초구의 한 병원을 찾았고, 병원 안내로 112 신고를 했습니다.
이후 아내는 경찰병원 해바라기센터에서 상담을 받았는데, 해바라기센터 담당 경찰관은 이후 수사 담당 경찰관에게 △피해자의 쉼터 입소 거부 내용 △A 씨가 아내에게 연락하는 내용 △A 씨의 인적사항 및 연락처 등을 알려주고 아내의 진술서, 피해 사진, 국선변호인 신청서 등을 메신저로 보냈습니다.
이를 받은 수사 담당 경찰관은 다음날 오전 A씨에게 전화해 "피해자에게 문자 보내거나 욕을 하거나 찾아가서는 안 된다"고 고지하고, 피해자에 대한 접근 및 연락이 수사절차에서 불리한 자료가 될 수 있다고 안내했습니다. A 씨는 이 과정에서 아내가 자신을 폭행과 성폭행 혐의로 신고한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A 씨는 같은 날 자신의 집에서 흉기를 챙겨 아내가 있는 아파트로 향했습니다. 저녁 무렵 아내가 아파트 현관을 나서는 것을 붙잡아 흉기를 휘둘렀고, 아내가 쓰러지자 112에 "아내가 바람을 폈다, 내가 찔렀다"고 신고했습니다. 아내는 그 자리에서 숨졌습니다.
살인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A 씨는 우울증과 분노조절장애 등 성격적 결함으로 발생한 것이라며 범행 당시의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주장했습니다.
법원은 그러나 A씨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대담하고 무자비하며 잔혹한 범행수법 △피해자가 느꼈을 고통과 공포를 가늠하기 어려운 점 △계획 살인 △피해자 유족들로부터 용서를 받거나 합의하지 못한 점 등을 들어 1,2,3심에서 내리 징역 25년형을 선고해 형이 확정됐습니다. 신상정보 등록과 위치추적 전자장치 부착 15년도 함께 명령했습니다.
■유족 "경찰이 피해자 고소 알려 살해당해" 국가 상대 소송
이후 아내의 유족들은 2019년 말 국가를 상대로 정신적 손해를 배상하라며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냈습니다.
유족들은 "경찰관이 A씨의 신병이 확보되지 않은 상태에서 전화를 걸어 고소 사실을 알렸고, A 씨의 범행으로 이어졌다"며 "경찰의 행위는 특정범죄신고자 등 보호법과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을 위반한 위법한 직무집행으로 불법행위에 해당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특정범죄신고자 등 보호법 제8조는 "이 법에 규정된 경우를 제외하고는 누구든지 이 법에 따라 보호되고 있는 범죄 신고자등이라는 정황을 알면서 그 인적 사항 또는 범죄 신고자 등임을 미루어 알 수 있는 사실을 다른 사람에게 알려주거나 공개 또는 보도하여서는 아니 된다"고 정하고 있고,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은 "수사기관이 성폭력범죄의 피해자, 성폭력범죄를 신고한 사람을 증인으로 신문하거나 조사하는 경우에는 특정범죄신고자 등 보호법제7조부터 제13조까지의 규정을 준용한다"고 정하고 있습니다.
■법원 "가정폭력 행위자에 대한 긴급 임시조치…경찰 위법 없어"
법원은 "수사 담당 경찰관이 경찰청의 가정폭력 대응 업무매뉴얼에 따라 긴급임시조치로 '전기통신을 이용한 접근금지'를 고지함에 따라 A 씨가 아내의 폭행 및 성폭행 신고 사실을 알게 되었으며, 이후 아내를 살해한 사실을 인정할 수 있고, 이러한 사실에 비춰보면 당시 A 씨가 아내의 생명·신체에 대한 위해를 가할 잠재적 추상적 위험이 있었다고 볼 여지가 있다"고 인정했습니다.
하지만 법원은 경찰관의 행위가 위법행위에 해당한다거나, 경찰의 행위와 유족의 정신적 손해 사이에 인과관계가 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며 유족의 청구를 기각했습니다.
법원은 "피해자가 폭행 및 성폭행 피해를 입은 후 서울 소재 병원으로 가서 병원 안내를 받아 112 신고를 하였는 바, 피해자는 A 씨로부터 장소적으로 격리되었을 뿐 아니라 범행 발생으로부터 상당한 시간이 경과하였다"며, "당시 목 부위에 멍든 흔적이 발견되는 이외에 외견상 중대한 상해나 폭행 흔적은 확인되지 않았고, 경찰이 쉼터 입소를 권유했지만 피해자는 지인이 도와줄 것이고 일을 하고 있다며 쉼터 입소를 거부하고 병원에서 약을 받아 지인과 함께 귀가했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러면서 "당시 A 씨에 대한 현행범 체포 내지 긴급체포 사유가 있다고 단정하기 어렵고, A 씨의 신병을 바로 확보하여야 할 필요성을 인정하기 어렵다"고 판단했습니다.
법원은 아울러 경찰의 행위가 특정범죄 신고자 등 보호법과 성폭력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을 위반한 위법한 직무집행으로 불법행위에 해당한다는 주장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법원은 "사법경찰관은 가정폭력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에 의해 가정폭력 범죄가 재발될 우려가 있고, 긴급을 요해 법원의 임시조치 결정을 받을 수 없을 때는 직권에 의해 가정폭력 행위자에게 피해자에 대한 전기통신을 이용한 접근금지에 해당하는 긴급임시조치를 할 수 있는 점 등에 비춰보면 경찰청의 가정폭력 대응 업무매뉴얼에 따른 경찰의 가정폭력 행위자에 대한 긴급 임시조치로 봄이 상당하고, 이를 '범죄신고자의 인적 사항 또는 범죄신고자임을 미뤄 알 수 있는 사실을 다른 사람에게 알려준 경우'에 해당한다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설명했습니다.
이 사건은 유족이 더 이상 항소하지 않아 1심에서 확정됐습니다.
백인성 기자 (isbaek@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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