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번호 거절에도 석달간 쫓아왔다 '이 남자의 정체는'
"저기요."
2년 전 여름 서울 성동구 길거리에서 한 남성이 집에 가던 이혜선씨(가명·29)를 불러세웠다. 이 남성은 이씨에게 호감이 있다며 전화번호를 물었다. 이씨는 거절했지만 남성은 집 문을 열고 들어갈 때까지 이씨를 쫓아왔다. 그 때부터 이씨는 3개월 동안 이 남성에게 스토킹을 당했다.
그날 이후 이씨는 밤 길을 걸을 때마다 인기척을 느꼈다. 이씨는 "집 근처에 누군가 따라오는 기분이 들었다"며 "나를 쫓아오는 사람이 누구인지 확인하려고 집 앞 편의점에 몇 시간 서 있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씨가 편의점에서 나오면 이 남성은 어둠 속에서 다시 나타나 이씨를 뒤쫓았다.
남성의 스토킹은 더 심해졌다. 1층 원룸에 살던 이씨가 창문을 열어두면 남성은 창문 틈으로 집 안을 들여다봤다. 또 이씨의 남자친구가 이씨와 팔짱을 끼고 걸을 땐 멀리서 둘을 노려보며 쫓아왔다고 한다. 이씨는 "매일 집 근처에 찾아와 지켜보고 있으니 밖에 나가기도 힘들었다"며 "항상 감시당하는 느낌이었고 트라우마가 생겼다"고 했다.
이씨는 경찰에 스토킹 피해를 신고했지만 이렇다할 도움을 받지 못했다. 경범죄 위반(지속적 괴롭힘)으로 처벌하려면 피해자가 3번 이상 명시적 거부 의사를 보여야 했기 때문이다. 이씨가 남성을 직접 만나 대화한 건 이씨의 번호를 물어봤던 첫 날이 유일했다.
'노원구 세 모녀 살인사건'도 스토킹에서 시작됐다. 피의자 김태현(25)은 지난해 11월 피해자 큰 딸 A씨를 온라인 게임에서 알게 됐다. 이후 지난 1월 A씨를 오프라인에서 만난 이후부터 스토킹했다.
A씨가 거부 의사를 보였지만 김태현은 집 주변을 맴돌았다. 김태현은 A씨가 계속 연락을 피하자 앙심을 품고 범행을 저질렀다. 경찰은 김태현에게 살인 혐의 외에도 스토킹(지속적 괴롭힘) 혐의도 적용했다.
경찰청에 따르면 최근 3년간 112로 들어온 스토킹 신고 가운데 사법처리된 건 12.6% 정도다. 지난해의 경우 스토킹 범죄 신고 10건 중 1건(10.8%) 정도만 사법처리로 이어졌다. 나머지 9명은 사법기관의 도움을 받지 못했다는 의미다.
스토킹 처벌법이 지난달 24일 국회를 통과했지만 스토킹도 범죄라는 인식은 아직 부족하다. 미디어에서는 스토킹을 순애보, 짝사랑 등으로 포장했다. 집이나 직장에 불쑥 찾아가는 드라마 속 주인공이 아름답게 포장됐다.
한국여성민우회가 2018년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지상파·종편·케이블 등에서 반영한 드라마 120개(총 2946편) 중 스토킹으로 볼 수 있는 것이 62건이 있었다.
전문가들은 스토킹이 피해자에게 정신적 고통을 초래하는 범죄라는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지적한다. '열 번 찍어 안 넘어 가는 나무 없다'는 이제 옛말이 됐다. 거절했는데도 '찍으면' 이젠 스토킹이다.
권김현영 여성현실연구소장은 "'노원구 세 모녀 살해사건' 피의자 김태현뿐만 아니라 다른 스토킹 범죄 피의자들은 공통적으로 피해자를 완벽하게 통제하고 싶은 욕구에서 비롯된다"며 "이제 스토킹을 과도한 구애 행위로만 보면 위험하다"고 했다.
그는 "상대방이 연락을 거부하면 연락 빈도가 줄어드는 게 정상이지만 스토킹하는 사람은 더 심해진다"며 "스토킹을 과도한 구애 행위로 보는 것이 문제를 키웠고, 스토킹을 사적 관계에서 벌어지는 해프닝으로 보는 건 대단히 위험하다"고 했다.
아울러 전문가들은 스토킹이 또다른 범죄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했다. 곽대경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스토킹은 심각한 범죄 행위로 방치하면 폭력, 살인 등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높다"며 "피해자들은 가해자들의 무리한 집착으로 창살 없는 감옥에 사는 것과 같다"고 했다. 이어 "스토킹 범죄에 대한 사회적인 인식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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