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석의 게임인(完)] 게이머가 더 존중받는 세상이 되려면
(서울=연합뉴스) 이효석 기자 = 게이머는 늘 억울했다.
게이머들이 게임이라는 취미를 마음 편하게 즐긴 순간이 얼마나 있었을까?
1990년대 초반 사실상 우리나라에 게임이라는 것을 처음 퍼뜨린 가정용 전자오락기는 일단 있는 집이 별로 없었다.
잘 사는 친구 집에나 있었고, 오락기가 집에 있어도 아버지가 퇴근하시고 리모컨을 쥐면 순식간에 그림의 떡이 됐다.
'바람의 나라', '리니지' 같은 온라인 게임은 접속 요금, PC방 요금, 정액제 회원비 등 돈 때문에 마음껏 즐길 수 없었다.
기성세대와 미디어는 게임을 악마화했다.
한 방송국 기자는 PC방 전기를 갑자기 차단하고는 아이들이 분노하자 게임의 폭력성 탓이라고 했다. 방송 토크쇼에서는 프로게이머를 불러놓고 게임 중독자 취급했다.
살인 사건이 일어나면 폭력적인 게임 탓 같다는 추측성 기사가 따라붙었다.
부모들에게 게임이라는 것은 이유 불문 나쁜 것이었다.
"무슨 게임을 하니? 그 게임이 왜 재미있니?"라고 묻는 부모는 없었다. 아이들에게 게임은 그저 '그만해야 하는 것'이었다.
게임은 취미로 존중받지 못했고, 게이머는 소비자 집단으로 대우받지 못했다.
남자들은 그나마 게임 커뮤니티에서 분노를 해소했지만, 여성 게이머는 목소리를 낼 곳조차 없었다.
온라인 게임이나 커뮤니티에서 여성임을 드러내면 숭배 당하거나 힐난당했다.
남자들은 여자가 게임을 잘하면 '여신'이라며 대상화했고, 게임을 못 하면 '여자라서 못 한다'고 매도했다.
결국 여성 게이머들은 정체성을 감췄다. 여성 게이머는 빠르게 늘었으나 게임 커뮤니티는 갈수록 남초(男超)로 굳어졌고 혐오 언어로 오염됐다.
그런데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분위기를 바꿨다.
게임 중독을 질병으로 공식화하려고 힘쓰던 세계보건기구(WHO)가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라며 게임을 권했다.
코로나19 이전에도 게임 인구가 남녀노소로 늘어나는 추세는 있었지만, 역병은 대번에 게임을 최고의 취미로 만들었다.
여성도 드디어 게이머의 '절반'으로 인정받는 모양새다.
공신력 있는 통계마다 모바일게임은 여성이 더 많이 한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이제 '동물의 숲', '쿠키런:킹덤'처럼 '국민 게임' 소리를 듣는 게임들은 여성이 주요 소비자로 전면에 나선 게임들이다.
게이머들은 얼떨떨하다.
위정자들과 언론이 "게임이 미래 먹거리"라고 떠들지만, 게이머들 일상에서 바뀐 것은 별로 없다.
국내 게임 시장을 지배하는 대형 게임 개발사들이 하나도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코로나19 이후 글로벌 IT 기업과 게임사들은 비대면의 일상화로 부쩍 앞당겨진 미래에 환호하며 앞다퉈 혁신을 선보였다.
글로벌 게임 시장에서는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처럼 가상현실(VR)·증강현실(AR)·웨어러블 등 신기술을 활용한 새로운 사용자 경험(UX)이 빠르게 현실이 되고 있다. 이른바 '메타버스'의 시대다.
그동안 국내 게임사들은 뭘 했을까?
게이머들이 보기에는 '확률형 아이템' 고도화에만 총력을 기울인 것으로 보인다.
어떻게 하면 이용자들을 더 즐겁게 할지 고민한 게 아니라, 어떻게 하면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을지 고민한 것이다.
게임사들은 소비자의 알 권리를 존중한다며 확률을 공개한다더니, 이중·삼중 구조의 아이템 뽑기로 '진짜 확률'은 꽁꽁 감추고 있었다.
어떤 게임은 이용자들이 가장 바라던 최고 등급의 아이템은 아예 나오지 않도록 설계돼 있었다.
몇억∼몇십억 원을 쓴 고객이 회사에 찾아오면 유통 기업이나 백화점은 레드카펫을 깔았을 텐데, 게임사들은 문을 걸어 잠그고 "고객센터로 가라"며 돌려보냈다.
게이머는 여전히 억울하다.
취미로 존중받지 못하며, 소비자로 대우받지 못하고 있다.
결국 게이머들은 횃불을 들었다. 십시일반 모금해 게임사들 앞에 시위 트럭을 보내고, 자신이 사랑하는 게임의 문제가 무엇인지 언론에 투고했다.
전 세계 게임 산업이 축제를 벌이는 중에 한국에서는 유례없는 게이머 시위가 커지고 있다.
작금의 움직임이 훗날 게임 민주화(民主化) 운동으로 기록될 수 있을까?
기자는 그럴 수 있다고 본다.
언젠가는 우리 게임도 우리 게이머들의 힘으로 전 세계적인 인기를 구가하며 '올해의 게임'(GOTY·Game Of The Year)을 석권할 날이 올 것이다.
남성의 시선으로 만들어진 8등신 미녀가 아닌, 다양한 외양·성격의 여성이 전장을 누비고 모험하는 국산 게임이 등장할 것이다.
게임사들이 시혜적으로 푼돈을 써서 만드는 '장애인용 게임'이 아니라, 장애인이 처음부터 끝까지 비장애인과 똑같이 즐길 수 있는 대작 게임도 나올 것이다.
정부도 언젠가는 제대로 된 예산을 투입해, 국내 게임사들이 확률형 아이템에만 매달리지 않고 다양한 게임을 만들도록 실효성 있게 지원하고, 중국 못지않게 e스포츠를 육성해 우리나라가 전 세계 e스포츠의 패권을 놓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상상이 현실이 되려면 그 어느 때보다 지금이 중요하다.
게이머들이 더 연대하고, 더 목소리를 내고, 게임사를 더 감시하고, 언론을 더 활용하기를 바란다.
세상에 억울한 게이머는 없어야 한다.
모든 게이머는 언제나 주인공이므로.
[※ 편집자 주 = '이효석의 게임인' 연재를 종료합니다. 그동안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hy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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