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세기만에 열린 덕봉산··· 이젠 ‘오지’ 아니고 ‘꽃보다 삼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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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경 찾아 여행
‘강원도 바다’라 하면 속초나 강릉부터 떠올렸다. 서울 도심에서 비교적 가까이 있고 쉽게 닿을 수 있었으니까. 코로나 시대엔 얘기가 좀 달라졌다. 북적이는 곳 대신 한적하고 깨끗한 바다를 찾는 이들의 레이더에 포착된 곳이 있으니 강원도 해안선 최남단 도시, 삼척이다.
삼척은 도심에서는 멀어 한때 동해와 함께 오지(奧地)로 오해받기도 했지만, 지난해 3월 강릉선 KTX 중 일부가 동해·묵호까지 연장 개통하면서 당일치기 여행지로 떠올랐다. “이렇다 할 즐길 거리가 없다”는 것도 옛말. 반세기 만에 개방한 ‘덕봉산 해안 생태 탐방로’를 비롯해 최근 1년 사이 곳곳에 새로운 즐길 거리가 추가됐다. 완연한 봄날, 꽃놀이 인파에 발걸음 보태는 게 부담스럽다면 올봄엔 ‘꽃보다 삼척’이다.
◇軍 철책 허물고 53년 만에 개방한 덕봉산
지난 1일 삼척에 조금 특별한 해안 탐방로가 열렸다. 1968년 11월 2일 ‘울진·삼척지구 무장공비 침투 사건’ 이후 군 경계 시설로 활용되며 장장 53년 동안 일반인 출입을 금지했다가 해안 생태 탐방로로 개방한 근덕면 맹방관광지 내 덕봉산 얘기다. 삼엄했던 408m가량의 경계 철책과 철책 출입문 3개를 철거한 대신 산 둘레를 따라 데크를 설치해 해양 생태 탐방로로 꾸몄다. 입구엔 ‘접근 금지’ 푯말 대신 ‘탐방로 안내판’이 탐방객을 맞고 있었다.
‘바다 위의 산’이라고 불리는 덕봉산은 언뜻 보기에 산 같기도, 섬 같기도 하다. 엄밀히 말하면 섬이었다가 산이 된 곳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덕산도(德山島)는 삼척부 남쪽 23리인 교가역(交柯驛) 동쪽 바다 위에 있다”고 기록돼 있다. ‘해동여지도’와 ‘대동여지도’에도 섬으로 묘사돼 있다. 이후 조선 후기 인구가 증가하면서 삼림이 밭으로 개간되던 시기에 육계도(陸繫島·육지와 섬 사이의 얕은 바다에 모래가 퇴적돼 육지와 연결된 섬)로 변모한 것으로 보고 있다. 산 같기도, 섬 같기도 하기에 잠시나마 등산하는 재미와 섬 여행을 하는 기분을 두루 만끽할 수 있다.
해안 생태 탐방로 총 길이는 943m로 1㎞가 채 안 된다. 기암괴석을 조망할 수 있는 해안 코스 626m와 대나무숲을 따라 정상 전망대로 올라가는 내륙 코스 317m가 서로 이어져 있는 형태다. 코스가 무난한 편이어서 남녀노소 누구나 30분 정도면 큰 힘 들이지 않고 한 바퀴 둘러볼 수 있다. 코스 사이 바다 전망대, 나무 벤치에선 기념사진을 찍거나 쉬었다 갈 수 있다. 해발 53.9m의 덕봉산 정상 전망대에 서면 ‘명사십리’ 맹방해변을 비롯해 덕산해변, 마읍천, 근덕면 시가지 풍경이 360도로 펼쳐진다. 전망대에 설치된 망원경 너머로는 봉황산 일대가 가까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코스 중 ‘천국의 계단’이라고 쓰인 구간이 요즘 말로 ‘뷰 맛집’이다. 이제 막 초록빛이 돌기 시작한 대나무숲 사이로 푸른빛 맹방해변이 천연색 경쟁이라도 하듯 대비를 이룬다. 계단을 내려가다 만나는 나무 벤치는 파도 소리 들으며 ‘물멍(물 보며 멍 때리기)’하기 최적의 장소다. 덕봉산 해안 생태 탐방로는 개방 이후 가족 단위 여행객뿐 아니라 인근에 사는 주민들의 발길도 꾸준히 이어지는 중이다. 이세우(71) 덕산리 이장은 “유년부터 청년 시절까지 자주 찾았던 덕봉산에 철책이 설치되고 50여 년이 흐른 지금, 노인이 되어 다시 오르니 감회가 새롭기만 하다”며 “덕봉산은 대나무가 많은 곳이라 옛날엔 동네 사람들이 산에 올라 대나무를 베다가 빗자루도 만들어 쓰곤 했다”고 회상했다. 맹방해변에서 마읍천 하류를 건너는 지점과 덕산해변 모래사장을 가로지르는 외나무다리 두 개는 젊은 층 사이에서 ‘인생샷 명소’로 주목받고 있다. 아슬아슬 걷는 재미뿐 아니라 덕봉산을 배경으로 기념사진 찍기 좋다.
빵 좋아하는 ‘빵 덕후’라면 덕봉산에서 차로 3~5분 거리에 있는 문화제과를 지나칠 수 없다. ‘삼척 빵지순례’ 필수 코스다. 담백하게 쓴 낡고 허름한 간판과 80년대 분위기의 외관, 가게 안 손 글씨로 쓴 ‘주의 사항’에서 내공이 느껴진다. 매일 9시에 문을 열어 도넛(5000원) 30봉지만 팔고 바로 문 닫는다. 봉지 안엔 쫀쫀한 식감의 꽈배기, 찹쌀·팥 도넛, 생도넛 등이 골고루 들어 있다. 기본에 충실한 ‘옛날 꽈배기’가 연상된다. 식감이 폭신하기보다 쫀쫀하다. 꽈배기보단 찹쌀과 팥 도넛이 한 수 위!
◇소박함 간직한 나릿골 감성마을
덕봉산 해안 생태 탐방로에서 차로 10분 거리, 삼척을 대표하는 항구인 삼척항(정라항) 주변 언덕 마을은 나릿골 감성마을로 변신했다. 슬레이트 지붕에 시멘트 담, 미로처럼 이어진 골목과 마을 텃밭 등 1960~70년대 어촌 마을의 정취를 간직하고 있다. 한동안 시간이 멈춘 듯 옛 모습 그대로 있다가 단장 후 테마가 있는 마을로 옷을 갈아입었다. 동해 ‘논골담길’이나 경남 통영 ‘동피랑마을’과 비슷해 보이기도 하지만 나릿골 골목을 구석구석 누비다 보면 인위적이지 않고 소박한 삼척항 어촌만의 숨은 매력을 발견하는 재미가 있다.
골목 담장엔 빨간 등대나 물고기 벽화가, 골목 어귀엔 친절한 이정표가 탐방객을 안내한다. 낯선 이의 발걸음에 놀란 개들이 이 집 저 집에서 짖는 소리, 항구 위를 빙빙 돌며 끼룩끼룩 우는 갈매기 소리가 정겹게 느껴진다. 걸어서 언덕 오르기가 벅차면 차로 정상부에 있는 바람주차장이나 전망주차장까지 진입할 수 있다. ‘마을전망대’에 서면 나릿골 감성마을을 수놓은 색색깔의 지붕과 삼척항을, 반대편인 ‘솔향기 전망대’에 서면 산비탈에 촘촘하게 자리 잡은 집과 동해의 수평선을 한눈에 담을 수 있다. 마을 내 문어 해물 칼국수와 장칼국수 등을 파는 ‘할머니의 부엌’과 ‘카페 나리 꽃담장’은 영업 중이나 ‘그리go 작은 미술관’ ‘작가의 집’ 등 개방 시설은 코로나 대응 상황 등으로 휴관하거나 탄력 운영 중이다.
나릿골 감성마을에서 하산하면 삼척항을 따라 대게, 홍게 등을 파는 직판장, 식당과 회·해산물을 판매하는 삼척항 활어회 센터가 모여 있다. 비릿한 바다 냄새 맡으며 각종 수산물을 구입하거나 맛볼 수 있다. ‘삼척’ 하면 대게와 곰치국이 유명하지만, 의외의 메뉴로 맛집 반열에 오른 곳도 삼척항 가까이 포진하고 있다. 정상동 성원닭갈비(033-575-7677)는 삼척 3대 닭갈비 맛집 중 하나로 ‘태백 스타일 물 닭갈비’(1인분 9000원)를 선보인다. 육수를 자작하게 붓고 닭갈비 위에 미나리와 부추를 수북하게 얹어낸다. 닭갈비라 하기엔 국물이 많고, 닭 볶음탕이라고 하기엔 국물 맛이 ‘닭 매운탕’에 가깝다. 닭갈비를 다 먹고 난 뒤 국물에 볶아 먹는 볶음밥(2000원) 필수.
◇부남해변서 ‘작품 감상’, 삼척해변서 ‘곰치 빙수’
삼척의 크고 작은 해변의 변화도 눈에 띈다. 군사 지역에 포함돼 일 년 중 7~8월에만 한시적으로 문 여는 ‘비밀 해변’ 근덕면 부남리 부남해수욕장마을 길 초입엔 지난 1일 부남 미술관(033-575-8885)이 문 열었다. 오래전 수녀원이었던 곳을 환경운동가 하태성씨와 록페라 성악가로 해외에서 더 유명한 서민정씨 부부가 ‘보고, 듣고, 즐기는 맛있는 미술관’으로 직접 꾸몄다. 430㎡(130평) 공간에선 서씨 아버지인 서양화가 서박이 작가의 작품과 서씨가 이탈리아, 과테말라 등에서 거주하며 수집한 작품 100여 점, 오랜 시간 모아온 각종 빈티지, 앤틱, 레트로 소품 등을 만나볼 수 있다. 엄선한 차, 커피, 와인을 비롯해 서씨가 직접 만든 라자냐, 파스타, 티라미수, 치즈케이크 등도 선보인다. 삼척과 해외를 오가며 생활하는 서씨는 “남편이 수년 전 한 공기업 삼척 지사로 파견 오며 삼척이라는 도시를 알게 됐다”며 “부남 미술관은 앞으로 공연도 여는 등 문화 충전소로 꾸미고 싶다”고 했다. 저녁 식사는 예약 필수.
강원도 양양에 서퍼들의 천국인 ‘서피비치’가 있다면 삼척엔 서프키키가 있다. 서퍼들을 위한 시설과 해변을 배경으로 한 이국적이면서도 아기자기한 포토존은 여행객에게 인기다. 인근 피크닉 테마 카페 피크닉 키키(033-575-6599)는 음료를 주문하면 피크닉 매트, 파라솔 대여가 가능하다. 빈손으로 가서 해변 피크닉을 실컷 즐길 수 있다. 모양뿐 아니라 맛에 재미까지 첨가한 대표 메뉴 ‘삼척 곰치 빙수’(1만3000원)는 반으로 자른 붕어 모양 아이스크림 사이에 곱게 간 눈꽃 빙수를 소복하게 쌓아준다. 흑임자 가루와 국내산 팥, 맞춤 주문한 미니 인절미가 그야말로 ‘꿀 조합’이다. 색색깔 초콜릿 알갱이인 ‘곰치 알’도 깨알같이 들어가 있다. 피크닉 키키를 나와 삼척 해수욕장 입구에서부터 정라항까지 4㎞ 이어지는 해안도로 이사부길(새천년해안도로)은 봄바람 맞으며 드라이브 즐기기에 제격이다. 해안도로 중간엔 잠시 해안 절경을 감상할 수 있는 쉼터가 있다.
◇금강송 군락지서 힐링, 삼척 활기 치유의 숲·휴양림도 문 열어
삼척은 바다뿐 아니라 내륙 여행의 매력도 간직한 여행지다. 지난해 7월엔 미로면 활기리 금강송 군락지인 ‘준경묘’ 인근에 삼척 활기 치유의 숲(033-571-2600)과 삼척 활기 자연 휴양림(033-574-0032)이 개장했다. 25㏊의 대규모 힐링 숲이자 문화·휴양·체험 공간이다. 각각 관리 주체는 다르지만 숙박이 가능한 한옥 네 동, 트리하우스 네 동을 포함해 숲 체험장, 40㎞ 치유의 숲길 등이 한데 어우러져 있다. 계곡 물소리를 들으며 산책로를 따라가면 복합 건물 형태의 치유 센터와 만난다. 치유 센터에선 족욕 테라피, 온열 치료, 다도 체험 등이 기다린다. 인터넷 또는 현장 접수를 통해 산림 치유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산책로는 백두대간 등반 코스와 이어져 등산객도 즐겨 찾는다. 전체를 둘러보려면 한나절도 부족하다.
삼척 활기 자연 휴양림에 갔다면 차로 20분 거리에 있는 도경리역도 지나칠 수 없다. 지금은 폐역이 된 간이역이지만 영동선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驛舍)다. 일제강점기인 1935년 5월에 지어져 1940년 보통역으로 개통 후 2007년 폐역이 될 때까지 70년 가까이 운영됐다. 지금의 모습은 2009년 지붕과 창호를 원래 모습대로 복원한 것. 산속 작은 마을 안쪽에 있는 시골 간이역의 소박한 멋을 지니고 있다.
도계읍 통리 협곡 내 미인폭포는 최근 인스타그램 등에서 큰 인기를 끄는 중. 미국 그랜드캐니언과 지질학적 특성이 비슷해 ‘삼척의 그랜드캐니언’이란 별칭이 붙었다. 석회질 성분으로 인해 물빛이 신비로운 에메랄드 빛을 띤다. ‘여래사’ 주차장에서 300m 떨어진 곳에 있어 ‘산린이(등산을 시작한 어린이의 줄임말·등산 초보)’일 경우 최소 20분간 극한의 트레킹을 경험해야 닿을 수 있다는 건 참고할 것.
[ 영화 ‘봄날은 간다’의 그곳… 맹방해변·신흥사도 가보세요 ]
지난 2월 삼척시가 앰비규어스 댄스컴퍼니의 ‘범 내려온다’를 패러디해 유튜브로 공개한 ‘범 내려온다-삼척 편’은 4월 중순 현재 12만뷰를 앞두고 있다. 영상 속엔 코로나 속 비대면, 랜선 여행을 즐길 수 있는 삼척의 명소들이 음악과 함께 차례로 등장한다. ‘울진·삼척 지구 무장 공비 침투 사건’ 후 53년 만에 개방한 ‘덕봉산’을 시작으로 오전 5시부터 9시까지 번개처럼 잠깐 열리는 중앙로 ‘삼척 번개시장’, 기암괴석을 감상하며 아슬아슬하게 바다로 난 산책로를 걸어볼 수 있는 근덕면 초곡리 ‘초곡 용굴 촛대바위 길’, 관동팔경 중 제1경으로 꼽는 성내동 ‘죽서루’, 깨끗한 해변을 품고 있는 데다 시설이 깔끔해 ‘7성급 캠핑장’으로 통하는 근덕면 장호리 ‘장호비치캠핑장’과 교동 ‘삼척해수욕장’을 소개했다. 덕봉산을 드론으로 촬영해 상공에서 내려다보거나 촛대바위를 근접 촬영해 실제 탐방으로는 다가갈 수 없는 곳까지 가 더욱 자세히 보는 듯하다. 죽서루는 내외부뿐 아니라 또 다른 감상 포인트인 ‘오십천’ 건너편에서 바라본 전경도 담았다. 당장 여행을 할 수 없더라도 잠시나마 랜선 여행을 즐길 수 있다. 삼척시 관계자는 “영상 공개 후 실제로 해당 여행지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고 전했다.
이번 영상뿐 아니라 삼척은 그동안 영상미가 특히 아름다웠던 영화, 드라마 속 배경으로 ‘열연’했던 곳이다.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라는 명대사를 남긴 이영애·유지태 주연의 영화 ‘봄날은 간다’에선 드넓게 펼쳐진 ‘맹방해변’과 동막리 ‘신흥사’는 또 다른 주인공이었다. ‘봄날은 간다’에 등장 후 아직도 영화를 추억하며 찾는 이들이 꾸준히 있다.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마지막 회 기차 터널 및 배경으로 나온 곳은 도계읍 ‘하이원 추추파크’ 레일바이크 운행 구간이다. 영화 ‘옥자’ 속 신비한 분위기의 이끼 폭포도 도계읍 ‘무건리 이끼 폭포’에서 촬영한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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