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집에서 내 말을 듣기 시작했다"

곽아람 기자 2021. 4. 17.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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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드 출신 변호사 워킹맘, 가사노동 분담하는 게임 만들어
남편이 100개 중 21개만 맡아도 부부의 결혼 생활 만족도 높아져
"중요한 건 '평등'이 아니라 '공정'"
페어 플레이 프로젝트./메이븐

페어 플레이 프로젝트

이브 로드스키 지음|김정희 옮김|메이븐|352쪽|1만6000원

LA에서 시애틀로 당일치기 출장을 간 저자. 공항 출국장에 막 차를 세우는데 남편에게서 문자메시지가 왔다. “어떤 놈이 우리 집 잔디밭에 외투랑 맥주병을 놓고 갔어.” 그로부터 16시간 뒤 집에 도착했을 때 진입로에 들어서자마자 잔디밭에 나뒹구는 외투와 맥주병이 눈에 들어왔다. 속이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결국 남편이 보낸 문자는 “이게 믿어져?”가 아니라 “난 시간 없어. 당신이 치워”라는 뜻이었던 것.

하버드 로스쿨 나온 변호사로 세 아이의 엄마인 저자는 ‘외투와 맥주병 사건’을 겪고 난 후 절실히 깨닫는다. ‘남편은 내 시간의 가치를 자기 시간과 동등하게 생각하지 않아.’ 남편은 썩 괜찮은 남자였지만 아이가 태어나자 모든 것이 달라졌다. 육아 때문에 ‘꿈의 직장’을 그만두고 파트타임으로 전환했는데, 집에 있다는 이유로 육아도 가사 노동도 모두 저자 몫이 됐다. 미국 연구에 따르면 여성이 엄마일 때와 엄마가 아닐 때의 임금 격차는 남녀 임금 격차보다 크다. 저자는 “아이가 한 명 태어날 때마다 승진이나 명예로운 임무, 월급 인상, 인센티브 기회를 놓침으로써 수익력이 5~10%씩 감소하는 ‘엄마세’를 고려해 보면, 비로소 엄마가 되는 것의 진정한 비용을 이해할 수 있다”고 적었다.

분노하다 저자는 생각한다. ‘가사 노동의 가치가 폄하되는 건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야. 집안일 하나하나에 이름을 달고 명확하게 정의해 책임을 측정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 적용하면 어떻게 될까?’ 피터 드러커는 말했다. “측정할 수 있어야 관리할 수 있다.” 10년 동안 자산가들의 가족 간 갈등을 중재해 온 저자는 이제 자기 가정을 ‘관리’하기로 결심한다. 커플 500쌍을 인터뷰하고 각종 자료를 연구해 부부가 가사 노동을 ‘공정’하게 분담하는 ‘페어 플레이 프로젝트’라는 게임을 만든다.

가사노동을 분담하고 있는 남성. 저자는 “부부가 모두 정규직으로 일하고 아내가 남편보다 더 많이 버는 가정에서도 여성들이 육아와 가사노동을 떠안고 있다”고 말한다. /게티이미지코리아

게임의 규칙은 이렇다. 카드 100장에 설거지, 청소, 장보기 등 ‘집 안의 일’, 자동차 관리 등 ‘집 밖의 일’, 갑작스러운 불운과 관련된 ‘불모지’ 등으로 세분한 가사일을 적어 넣는다. 부부가 협상하며 카드를 나눈다. 핵심은 카드를 가지고 간 사람이 카드의 ‘CPE’를 통틀어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다. CPE란 업무를 완전히 인지(Conceive), 계획(Plan), 실행한다(Execute)는 뜻.이를테면 ‘장보기’엔 냉장고에 부족하거나 유통기한이 지난 재료는 없는지 확인하고 떨어졌다는 걸 깨닫기 전에 미리 장을 보는 임무가 포함된다.보통 남편은 아내가 시키는 일만 할 때가 많은데 이는 CPE 중 실행(E)만책임지는것이라 온전한 책임감을 가지기 어렵다.

각 카드의 유효 기간은 부부의 상황에 따라 정하며 기간이 지나면 카드를 재거래한다. 또한 부부는 각자 ‘유니콘 스페이스’ 카드를 한 장씩 가지고 가 부모나 아내, 남편이 아닌 ‘한 인간’으로서 자신의 열정을 되살릴 수 있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저자가 ‘유니콘 스페이스’를 기획한 건 엄마들의 59%가 자신의 정체성을 ‘엄마’라 인식하지만 막상 남편들에게 “엄마나 아내로서의 역할 말고도 그녀가 자랑스러운가요?”라고 물으면 선뜻 긍정의 답을 내놓지 못한다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

프로젝트는 성공적이었다. ‘왜 안 해줘?’라며 무언의 제스처만 보낼 때 응답 없던 남성들 대부분이 직접적으로 명시적으로 도와달라고 하면 긍정적으로 반응했다. 저자는 “가사 노동을 반반으로 나누는 것이 이 프로젝트의 목적이 아니다. 중요한 건 ‘평등’이 아니라 각 가정의 상황에 맞는 ‘공정’”이라고 말한다. 이를테면 실직이나 질병 같은 ‘불모지’ 카드를 파트너가 갖고 있다면 나머지 카드는 상대가 더 많이 부담하는 것이 ‘공정’인 것이다. 실제로 카드의 숫자는 중요하지 않았다. 남편이 맡은 일을 얼마나 능숙하고 신중하게 해 내느냐가 아내들의 만족도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다. 게임을 시도하는 커플들이 광범위하게 늘어나면서 ‘매직 넘버’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남편이 적어도 21장 이상의 카드를 가져간 여성들은 대부분 남편의 지지를 받는다 느꼈고 원망이나 피로도 사라졌다. 저자는 말한다. “50대50을 기대하거나 요구하지 마라. 그가 어제보다 한 장이라도 카드를 더 맡으면 그게 이득이다.”

유쾌하고 위트 있는 문장 덕에 즐겁게 읽히는 책. 저자는 남편을 여러 유형으로 나누는데, 직장에서는 유능한 리더지만 집 문턱을 넘는 순간 냉장고 속 버터도 찾지 못해 아내의 도움을 구하는 “버터 어딨어?” 유형의 남편에 대한 묘사에서 특히 웃음을 참지 못했다. 책을 읽다 보면 결국 부부간 가장 중요한 것은 ‘신뢰’와 ‘배려’라는 걸 깨닫게 된다. 남편을 게임에 참여시킬 가망이 없다며 포기하는 여성들에게 저자는 노라 에프론의 말을 들려준다. “자기 삶의 피해자가 되지 말고 주인공이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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