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무 고개, 수많은 이야기 <6> '울고 넘는..' 가사와 달리 시랑산에 노래 발표 뒤 박달-금봉 설화 탄생설 영남서 한양으로 가기 위한 길목 고려 김취려 장군, 거란 제압한 곳
“영차, 영차, 세워! 고정!”
때아닌 노동. 거대한 목각을 일으켜 세운다. 남정네 넷이 힘을 모은다. ‘아니, 내가 왜.’ 말하려는 순간, 성각 스님과 정법 스님은 “여기 오면 일해야 하는 거요”라며 웃는다. 여기는 박달재. 박달은 노래 이름 일부분이다. 박달은 고려 시대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곳이다. 박달은 사람 이름이다. 박달은 나무 이름이다. 충북 제천 박달재의 봄은 늦게 찾아온다. 뒤섞임과 되새김의 고개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 오백나한 새겨진 1000년 느티나무
성각 스님은 박달재 목굴암의 주지다. “허, 주지라뇨. 지역 문화를 위해 뼈를 깎는 사람이올시다.” 그는 뼈가 아니라 나무를 깎는다. 박달재 목각공원에 그의 작품들이 들어섰다. 근데, 그게 싹 사라졌다. “마음 아프죠. 일부에서는 외설적이라고도 하고요.”
그의 작업실에 들어갔다. ‘때아닌 노동’은 이때 벌어졌다. 촘촘한 나뭇결이 살결로 변한 덩치 큰 목각 인형을 들어 올렸다. “어이구야, 스님 조심하세요.” 박달재 꼭짓점에서 작은 카페를 꾸리는 조운행(67)씨가 걱정했다. 그는 100m 정도 달려 내려와 일을 거들었다. 박달재는 휴게소·안내소·카페 등 건물 몇 채와 사람들이 모인 작은 동네다.
“저기 조각은 제법 큰 비뇨기과에서 부탁이 들어왔어요. 바지를 내려야 하는 환자들이 마음을 열고 웃으며 진찰받을 수 있게 해달라고요. 재료비만 200만원입니다.”
성각 스님이 해인사 등 여러 사찰을 거쳐 이곳에 온 게 20여 년 전이다. 2005년 1000년을 살다 죽은 느티나무를 충주에서 가져와 자르고, 파고, 새기길 3년 2개월. 목굴암(木窟庵)을 완성했다. 말 그대로 ‘나무 굴 암자’다. 애초에 살로 충만했던 느티나무는 야위어가며 밑동에 공간을 내줬다. 그곳에 한 사람이 들어갈 만한 작은 법당을 만들었다. 목굴암 옆 '전각'에는 오백나한의 표정을 새기고 삼존불을 모신 다른 1000년 느티나무가 있다. 제천시에서는 문화적 가치가 있다고 판단해 전시관을 만들었다. 스님은 박달재에서의 15년 넘는 움막 생활을 벗어났다.
“365달마 작업도 끝났습니다. 관람객들의 생일에 해당하는 달마가 누굴까, 그렇게 365분의 달마를 조각한 겁니다. 전시 공간 확보만 남았습니다.”
스님이 목굴암을 만든 배경에는 박달과 금봉의 러브 스토리가 있다. 내세에서나마 둘이 사랑을 이루도록 부처의 힘을 빌리자는 게다. 불교와 설화의 뒤섞임이다.
# 노래가 박달-금봉 러브스토리 띄워 노래가 설화를 만들었다는 주장이 있다. 대개 설화가 노래를 만드는데, 그게 뒤집어졌다는 게다. 그 노래는, 30년 넘게 진행 중인 한 가요 프로그램에서 가장 많이 불렀다는 ‘울고 넘는 박달재’다. 1946년, 가수 겸 작사가인 반야월은 남대문악극단을 이끌고 박달재를 넘으며 충주에서 제천으로 향하고 있었다. 버스 타이어가 터졌다. 성황당 앞에서 이별을 앞둔 젊은 남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렇게 태어난 노래가 ‘울고 넘는 박달재’다. 박재홍이 1948년에 불러 뭇 사람의 가슴을 쥐어짰다.
설화가 먼저였는지, 노래가 먼저였는지는 불분명하나 노래가 나오자 박달-금봉 스토리가 떴다. 과거 보러 가는 영남 선비 박달. 그는 현재의 박달재인 이등령을 넘다 마을 처녀 금봉과 연분을 쌓는다. 과거에 낙방한 박달은 미안함에 금봉을 찾을 수 없었다. 그를 기다린 금봉은 죽고, 얼마 후 박달은 금봉의 환영을 쫓다가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죽음을 맞이한다.
박달재는 제천 봉양읍과 백운면을 잇고 시랑산(혹은 주론산-시랑산)을 가로지른다. 천등산은 제천에서 충주 쪽으로 6㎞ 가야 만나고 그곳에는 다릿재라는 다른 고개가 있다. 그렇다면 노래 가사 중 ‘천등산 박달재’는 엄밀히 따지면 틀린 걸까. 권태희 제천시 문화관광해설사는 “박달재는 넓게 보면 천등산 자락에 들어간다”고 의문을 해소해 줬다.
지난달 31일 박달재 성황당. 치성이 한창이었다. 1997년에 재현했다니, 반야월이 본 그 성황당은 아니다. 명패에 이렇게 쓰여 있다. ‘박달성황지신.’ 박달은 산신이 됐다. 그렇다면 금봉은? 금봉은 백운면 인물로 묘사된다.
백운면 구학산 자락의 경은사는 석가탄신일을 앞두고 공사 중이었다. 이 경은사 앞, 뾰족하게 곧추선 단애가 있다. 도덕암이라 한다. 그 꼭대기에 탑이 있다. 탑은 건너편 박달재 옛길을 바라보고 있다. 이보연(66) 경은사 신도회장은 “경은사에서 금봉을 기리기 위해 세운 탑”이라며 “음력 9월 9일 금봉이 위령제를 연다”고 말했다. 신화와 설화의 뒤섞임이다.
# 영남서 한양 가기 위해 거치는 고개
박달재는 경상도 사나이 박달이 한양에 과거를 보러 꼭 거쳐 가야 할 곳이었다. 길목이라는 말이다. 고려 때 거란이 이곳 박달재에 들이닥친다. 고려 고종 3년(1216년) 8월, 금나라가 첩보를 보낸다. 거란족의 침략에 대비하란다. 거란의 금산·금시 두 왕자가 아아·걸노 두 장수를 먼저 내려보냈다. 곳곳을 난입했고 도륙했다(고려사절요 권14).
거란의 침공은 선발대와 후발대, 투 트랙으로 펼쳐졌다. 병력은 그들의 처자를 포함해 10만 명으로 추정됐다. 고려군은 평북 향산에서 거란 선발대를 꺾는다. 선발대가 북쪽으로 물러설 무렵 금산·금시가 이끄는 후발대가 내려온다. 청천강·대동강 방어선이 뚫리고 이듬해 3월에는 개경 등 경기 일대가 위협받는다. 거란군은 방비가 탄탄한 개경을 에둘러 넘어가고 5월에 원주를 점령한다. 충주와 제천이 눈앞이었다. 이곳이 거란군에게 넘어가면 경상·전라·충청도에서의 후방 지원이 끊긴다.
박달재 전투는 분수령이 됐다. 김취려(1172~1234) 장군이 있었다. 1차로 7월 5일 원주 근처 맥곡에서 거란군을 제압한다. 적은 충주로 넘어가지 못하고 제천으로 방향을 틀었다. 박달재를 넘을 수밖에 없다. 김취려가 박달재 높은 곳을 선점했다.
고려사절요가 전한다. ‘김취려가 말하기를…“만약 적이 먼저 고개에 웅거하면 우리가 아래에 있게 될 것이니, 적이 들이친다면 날쌘 원숭이라도 지나지 못할 것인데 하물며 사람임에랴” … 적이 크게 무너져 노약한 남녀와 병기·치중(輜重·군수물자)을 낭자하게 버리고 달아났다. 적이 이로 말미암아 남쪽으로 내려가지 못하고 모두 동쪽으로 달아났다(권15 고종 4년 7월).’
박달재에는 김취려의 후손이 세운 ‘김취려 장군 역사관’이 있다. 20여 년의 세월 속에 빛이 바래고 있고 무너지고 있다.
배기관 소리 우렁차게 울리며 달려온 할리데이비슨 라이더들. “아따, 휴게소에서 '울고 넘는 박달재'를 허벌나게 틀어대는구먼." 노래와 장소는 서로 되새김하고 있었다. 군산에서 왔다는 이 라이더는 "소양강 갔을 때 ‘소양강 처녀’, 만리포 갔을 때 ‘만리포 사랑’ 귀 따갑게 들었는디 말여”라고 말했다. 이 노래들은 모두 반야월의 작품이다. ‘박달재 노래비’ 옆에는 반야월의 친일 행적을 지적하는 푯말이 세워져 있다.
박달재는 외형상으로는 다소곳하다. 라이더들은 "아늑하다"고 표현했다. 백두대간의 숱한 고개들에 비하면 자전거로라도 순하게 오를만하다. 하지만 들여다보면, 박달재는 종교와 역사, 설화와 신화, 예술과 통속, 옛것과 새것이 뒤섞인 복잡한 공간이다.
“이젠 웃고 넘어가자!” 시원하게 뚫린 ‘새’ 박달재터널을 마다하고, 라이더들은 ‘옛’ 박달재 넘어 봉양으로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