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 공연 때 다리 굳은 학생, 약물·인지행동치료로 개선
무대 서기 전 긴장 탓 현기증·복통
대중 앞에 서길 꺼리는 불안장애
유명 가수 스트라이샌드도 겪어
세로토닌 재흡수 차단제 복용 효과
'공포증은 불합리' 인식만 해도 호전
[아이 마음 다이어리] 무대 공포증
로마 웅변가 키케로 “연설 때 사지 떨려”
종민이는 어린 시절부터 겁이 많고 섬세한 아이였다. 타고난 운동신경이 좋았고 몸이 유연했던 종민이는 어릴 때부터 가족들 앞에서는 음악에 맞춰 춤추는 것을 좋아했다. 초등학교 6학년 학예회 연극 공연에서 자신의 대사를 잊어 반 친구들과 학부모들 앞에서 창피를 당했던 사건이 있었다. 이후 종민이는 남들 앞에서 발표할 기회를 의도적으로 피했다. 도저히 피할 수 없을 때는 발표 전 연습을 친구들보다 두세 배 많이 했다. 고전무용을 하던 누나의 권유로 중학교 2학년에 발레를 시작한 이후 무대를 피하는 것에 한계가 있었다. 무대를 앞두고 아무리 반복해 연습을 해도 무대 당일 긴장감을 이기지 못하고 크고 작은 실수가 자주 생겼다. 종민이의 자신감은 바닥으로 떨어졌다. 발레를 포기하기 직전에 병원을 찾은 것이다.
무대 공포증은 사회불안장애(social anxiety disorder)의 하위 유형 중 하나다. 사회불안장애란 다른 사람들 앞에서 실수하거나 당황한 일을 경험한 뒤, 여러 사회적 상황을 피하고 이로 인해 대인관계와 사회적 기능이 저하되는 불안장애이다. 대표적으로 연단에 서서 많은 사람 앞에서 이야기할 때, 낯선 사람이나 이성과 대화를 나눌 때, 무대에서 공연하는 상황에서 증상이 나타난다. 종민이처럼 사회불안장애 중 어떤 일을 수행하는 경우에만 국한해서 불안을 경험하는 경우를 수행불안, 무대 공포증이라고 부른다〈사회불안장애 DSM-5 진단기준 참조〉.
■ 사회불안장애 DSM-5 진단기준
「 ① 타인에 의해 주시되는 사회적 상황에 대한 심각한 불안과 공포를 느낀다.
② 자신의 행동이 부정적으로 평가되거나 혹은 불안이 남에게 노출될까 봐 두려워한다.
③ 사회적 상황에의 노출은 거의 예외 없이 불안을 유발한다.
④ 사회적 상황을 회피하거나 극도의 공포와 불안 상태로 견뎌 낸다.
⑤ 사회적 상황에 대해 통상적이거나 실제 위험의 정도를 훨씬 넘는 공포, 불안을 보인다.
⑥ 공포, 불안, 회피 행동이 6개월 이상 지속돼야 한다.
⑦ 사회 상황에 대한 불안, 공포, 회피로 인해 정상적인 일상생활, 직업, 학업 또는 사회적 활동에 심각한 장애와 고통을 유발한다.
※ 수행단독형: 사람들 앞에서의 수행(발표, 연주, 공연) 상황에서만 공포를 보이는 경우
」
올해 80세가 된 세계적 가수이자 영화배우인 바브라 스트라이샌드는 무대 공포증을 앓았던 유명인으로 자주 언급된다. 그녀는 1967년 어느 날 뉴욕 센트럴파크에서 12만 명이 넘는 대중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는 중, 연거푸 3곡의 가사를 잊어 우두커니 서 있었다고 한다. 그녀는 그 충격으로 27년 동안 자선 콘서트를 제외하고는 무대에서 라이브 공연을 하지 않았다.
역사적인 인물 중에도 예가 있다. 그리스와 로마 영웅들을 다룬 명작 『플루타르크 영웅전』에는 데모스테네스와 키케로가 나란히 등장한다.
고대 그리스의 최대 웅변가이자 정치가였던 데모스테네스는 처음부터 연설을 잘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연설 중 말을 심하게 더듬었고 긴장을 너무 많이 해서 한쪽 어깨가 올라갔는데 그것을 과도하게 의식하여 연설에 집중하지 못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연설을 앞두고 지하실에서 등잔불을 켜 놓고 반복적으로 연습했다고 한다. 입안에 자갈을 물거나 올라가는 어깨 한쪽에 칼을 매다는 등 지독하게 연습했다. 동료이자 경쟁자였던 웅변가도 “당신 연설에서는 지난밤 태운 촛불 냄새가 나는군요”라고 조롱할 정도였다. 로마 시대 정치가이자 변호사이면서 뛰어난 웅변가로 유명한 키케로 또한 연설 공포가 있었다고 한다. 미국 저널리스트이자 불안장애 환자인 스콧 스토셀은 자신의 저서 『나는 불안과 함께 살아간다(My age of anxiety)』에서 “나는 연설을 시작할 때 창백해지고 사지가 떨립니다”라는 키케로의 고백을 인용한다.
사회불안장애, 여성이 남성보다 많아
2012년 흥미로운 연구가 있었다. 미국 네브래스카대학의 두 연구원은 815명의 대학생에게 자신에게 가장 큰 공포가 무엇인지를 묻는 설문 조사를 했다. 결과는 ‘대중 앞에서 말하는 공포’가 1등을 차지했다고 한다. 죽음에 대한 공포보다도 순위가 높았다. 국내에서 사회불안장애는 1000명당 5명 정도로 발생하고 여성이 남성보다 빈도가 높다. 연주자를 대상으로 시행된 한 대규모 연구에서는 약 25%의 연주자들 무대공포를 경험한다고 발표했다.
인간은 왜 대중 앞에서 이토록 불안한 것일까? 다른 정신장애와 마찬가지로 기질적으로 타고난 성향, 즉 유전적 특성과 환경적 요소가 상호 작용해서 나타난다. 어린 시절 많은 사람 앞에서 경험했던 당황스러운 사건이 트라우마가 되어 영향을 미치기도 하나 모든 경우가 그런 것은 아니다. 종민이의 경우 초등학교 시절 연극 대사를 잊어버린 사건이 트라우마가 됐을 수 있다. 게다가 종민이 아버지는 공황장애를 앓았던 적이 있었다. 불안장애를 지닌 가족 구성원이 있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한 위험 요소다. 엄마와의 면담에서도 아이의 어린 시절 또 하나의 위험 신호를 파악할 수 있었다. 종민이가 집에서와는 달리 유치원에서 선생님과 친구들에게 말을 거의 하지 않는 모습이 있었던 것이다. 기간이 그리 오래가지 않았기에 부모는 그 일을 잊고 있었다. 아이가 그저 소심하고 수줍음이 많아서 그런 것으로 여겼다. 게다가 종민이는 매사에 자기 일을 완벽하고 꼼꼼하게 처리했기에 더욱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종민이는 겁이 많고 늘 실수에 대한 걱정이 많은 아이였다. 특히 발레를 전공하기로 결심하고 예고에 진학하면서 완벽하게 춤을 춰야 한다는 생각이 깊게 자리 잡고 있었다. 근간에는 공연 때마다 찬사를 받고 입상하는 누나에 비해 자신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깔려 있었다.
종민이는 약물치료에 대해 전혀 거부감이 없었다. 오히려 반겼다. 이미 약을 복용할 마음을 지니고 방문한 것 같았다. 항불안제인 세로토닌 재흡수 차단제(SSRI)를 복용하며 공연 전의 현기증이나 빈뇨, 복통과 같은 신체적인 증상은 많이 완화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연을 앞두고 실수에 대한 두려움, 완벽에 대한 강박은 쉽게 개선되지 않았다.
인지행동치료를 시작했다. 종민이는 무대에만 서면 입학 실기 시험에서 실수했던 일이 저절로 떠올랐다. 공연 전에 조금이라도 소변이 마려우면, ‘지난번처럼 무대에서 소변을 지리고, 다리가 굳어 회전도 점프도 제대로 못 할 거야’라는 생각으로 연결됐다. 약물치료를 통해 여러 신체적 증상이 완화됐음에도 약간의 신체적 반응에도 최악의 결과를 상정하여 걱정했다. 이를 ‘재앙화 사고(catastrophic thinking)’라고 한다. 치료는 탈재앙화 사고를 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즉, 아이에게 소변이 마려운 신호에서 공연의 실패라는 결과로 이어지는 생각의 흐름이 비합리적이라는 것부터 인식시켰다. 종민이가 직접 A4 용지에 생각의 고리를 도식화하도록 했다. 본인도 이러한 예측이 과도한 것은 막연히 인식하고 있었다. 자신의 몸에서 일어나는 신호와 결과 사이를 연결하는 합당한 증거들이 거의 없음을 확인해 가면서 불합리한 사고들이 점차 합리적으로 변해 갔다. 대부분의 환자는 자기 생각이 불합리하다는 것만 인식해도 호전된다. 인식하면 자기 생각을 통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노출 기법 또한 흔히 사용되는 인지행동치료이다. 불안한 상황을 점진적이고 반복적으로 접하게 해서 그 불안이 점차 줄어들게 만드는 것이다.
종민이는 치료에 대한 의지가 강했고 문제에 대한 통찰이 뛰어났다. 덕분에 빠르게 호전됐다. 미성년 시절에 만났던 종민이가 이제는 무대 공포증을 극복하고 세계무대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을 것으로 굳게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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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8년 영국 국제인명센터(IBC)가 ‘세계 100대 의학자’로 선정. 저서로는 『아이는 언제나 옳다』, 『엄마 나는 똑똑해지고 있어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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