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인터뷰 걱정에 집중력 잃어버려 역전패 당한 적 많아"

정영재 2021. 4. 17. 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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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남자 테니스 첫 메이저 16강
경험·언어가 걸림돌 안 됐으면
세계랭킹 36위 이상 올라갔을 것
테니스 프로화 돼야 좋은 선수 나와
즐기면서 운동, 헝그리 정신도 필요
큰 꿈 가지되 목표는 디테일 해야

[스포츠 오디세이] 테니스의 전설 이형택
유튜브 방송사인 중앙UCN의 강남 스튜디오에서 이형택이 당당한 표정으로 사진을 찍었다. 테니스 라켓과 조명을 이용해 색다른 앵글을 만들었다. 이형택은 촬영 중간중간에 사진을 보며 “와, 느낌 좋네요”라고 감탄했다. 전민규 기자
이형택(45)은 대한민국 남자 테니스 사상 최초로 메이저 대회 16강에 오른 레전드다. 2000년 US오픈 16강전에서 당대 최강 피트 샘프라스(미국)와 멋진 승부를 펼쳤지만 아쉽게 패했다. 2003년에는 ATP(프로테니스협회) 투어에서 첫 단식 우승과 복식 우승을 차지했다. 2007년에는 세계랭킹 36위까지 올랐다.

은퇴 후 미국으로 이주해 팬들의 기억에서 잊혀져 가던 이형택을 다시 불러낸 건 JTBC 인기 예능 프로그램 ‘뭉쳐야 찬다’였다. 2002 월드컵 스타 안정환 감독 아래 각 종목 레전드들이 모여 좌충우돌 조기축구팀을 만들어 가는 이야기다. ‘뭉찬’ 녹화를 위해 이형택은 매주 미국 LA에서 비행기를 타고 오는 정성을 쏟았다. 뛰어난 축구 실력 뿐만 아니라 주장으로서 듬직한 리더십을 보여준 이형택은 ‘뭉찬’ 종방 후 이어진 농구 예능 ‘뭉쳐야 쏜다’에도 출연하고 있다.

이형택은 테니스 라켓과 공으로 갖가지 묘기를 보여주는 것으로도 화제를 모았다. 자신의 별명을 딴 ‘머드리TV’ 유튜브 방송도 진행하고 있다. 미국에서 돌아와 경기도 시흥에 사는 이형택을 유튜브 방송사 중앙UCN의 강남 스튜디오에서 만났다.

테니스 묘기 촬영하다 손바닥 물집 잡혀

JTBC ‘뭉쳐야 찬다’ 멤버들. [중앙포토]

Q : ‘뭉찬’ 녹화를 위해 매주 태평양을 왕복하셨다면서요?
A : “각 종목의 내로라하는 선후배들과 어울리며 운동하는 게 좋았어요. 비행기 타고 다니는 건 워낙 습관이 돼서 편했고, 옛날 선수 때 느낌이 나서 마음도 새로웠죠. 뭉찬을 통해 테니스를 몰랐던 사람들도 이형택을 알게 되니까 전 좋았죠.”

Q : 기부 프로그램 ‘슛포러브’에서 묘기를 보여 주셨는데요.
A : “태권도 스타 이대훈과 함께한 홈플러스 편은 이틀에 걸쳐 촬영했고, 하나 성공하는 데 몇 시간씩 걸렸어요. 프라이팬으로 공을 쳐 걸어가는 사람 머리 위 컵에 집어넣는 장면은 하도 공을 많이 쳐서 손바닥에 물집이 잡힐 정도였으니까요. 기부 차원에서 하는 거라 힘들다고 말도 못했지만 모두가 한마음이 되어서 즐겁게 촬영했습니다.”

Q : 스포츠 스타들의 예능 출연이 자연스러운 흐름이 됐죠?
A : “한 분야를 오래 파고들어 레전드가 됐지만 다른 종목 가면 금방 잘 하지는 못하잖아요. 하지만 집중해서 열심히 하다 보면 실력이 느는 속도는 일반인보다 훨씬 빨라요. 모두들 승부욕이 있다 보니 지고 나면 정말 화가 나거든요. 말도 안 하고 씩씩거리는 게 짜고 하는 게 아니에요. 그런 모습이 더 리얼하고 재밌게 비치는 것 같습니다.”

Q : 세계적인 선수로 성장하게 된 남다른 훈련법이 있었나요?
A : “저는 초등학교 때까지 여자 선수한테도 졌어요. 운동 능력은 있는데 공 치는 시간이 많지 않았거든요. 중학교 때 어머니가 서울로 돈 벌러 가시고 할머니 밑에서 컸습니다. 고된 훈련이 끝나고 누우면 ‘이 시간에도 엄마는 식당에서 일하고 있는데 이렇게 쉬어도 되나’ 생각이 들었어요. 밤중에 라켓 들고 나가서 연습 했는데 그때 실력이 확 는 것 같아요.”
휴지통에 공 집어넣는 묘기 성공

Q : 해외 투어에도 진출하게 됐죠.
A : “외국 나가서 보니까 나한테 졌던 선수들이 세계랭킹 100위권이더라고요. 우리는 200~300위권인데요. 우리는 우승할 수 있는 대회만 나간 반면 그 친구들은 상위 클래스에 갈 수 있는 대회에 도전하는 거였습니다. 그 후 퓨쳐스 대회보다 한 단계 높은 챌린저 대회에 나갔죠. 공 파워나 스피드가 확실히 다르더라고요. 한 경기 뛰고 나면 온몸이 쑤시고 근육통이 오는 겁니다. 웨이트 트레이닝을 체계적으로 하니까 체력이 좋아지고, 자신감도 생기고, 성적 나고, 랭킹도 올라가는 선순환이 생겼죠.”
2003년 아디다스 인터내셔널 우승 당시 이형택. [중앙포토]
이형택은 “세계적인 선수들과도 해볼 만했어요. 문제는 경험이고, 언어 문제도 컸죠”라고 했다. “메이저 대회에서는 경기 끝난 뒤 바로 마이크 들고 들어와 승리한 선수와 인터뷰를 합니다. 경기 막판 이기고 있으면 ‘끝나고 영어로 인터뷰해야 하는데’ 하는 걱정에 집중력을 잃고 역전패 한 경우가 꽤 많아요. 그것만 아니었어도 세계랭킹 36위 이상 갔을 겁니다.”

Q : 운동을 잘 하려면 헝그리 정신이 꼭 있어야 하나요?
A : “당연하죠. 요즘 젊은 선수들은 자기 라이프를 즐기면서 운동하기를 원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면 금메달을 못 따도 행복하냐, 억울해 하지 않겠냐고 물어보고 싶어요. 유럽 선수들은 배고픔을 알아요. 이거 아니면 성공 못한다는 생각이 뼛속까지 박혀 있어요. ‘즐기면서 하라’는 건 힘든 훈련을 하면서도 ‘내가 실력이 느는 과정이구나’ 라고 즐겁게 생각하라는 거지 놀면서 하라는 건 아니죠.”

Q : 테니스는 참 어려운 운동인데요.
A : “테니스는 의사결정이 많아 판단이 빨라야 합니다. 몸싸움은 없는데 격렬하고, 해야 할 게 너무 많아요. ‘이거 봐라. 될 거 같은데 안 되네’ 하면서 자꾸 하다 보면 매력에 빠지는 거죠. 프로는 미스 한 개를 줄이려고 연습하고, 동호인은 한 개의 나이스 샷을 위해 연습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멋진 샷을 성공했을 때 쾌감이 너무 좋은 겁니다.”

Q : 앞으로 테니스는 어떻게 발전할 것 같습니까?
A : “프로화로 가야죠. 우리나라만 전국체전 중심의 실업팀 시스템인데 세계적인 추세와는 맞지 않아요, 국내에 안주하려는 경향이 생기거든요. 프로화가 되면 스포츠토토 종목에 들어갈 수 있고, 좋은 환경에서 경기를 하게 되면 뛰어난 선수가 더 많이 나오겠죠.”
이형택은 후배들을 향한 당부도 잊지 않았다. “꿈나무 선수들에게 목표를 물으면 ‘세계 10위요’ ‘세계 1위요’ ‘그랜드슬램이요’ 라고 당차게 대답합니다. 큰 꿈을 달성하기 위한 목표는 디테일해야 합니다. 작은 목표를 이루게 되면 성취감과 자신감이 생겨 다음 목표를 향해 재미있게 도전할 수 있거든요.”

인터뷰가 끝난 뒤 중앙UCN 강남 스튜디오 테라스에서 특별한 시간을 가졌다. 라켓으로 공을 쳐 휴지통 세 개에 집어넣는 퍼포먼스였다. 큰 통, 중간 통은 쉽게 통과했지만 작은 통에 집어넣는 건 쉽지 않았다. 이형택은 진지한 자세로 최선을 다했고 이내 미션을 달성했다.

■ 샘프라스와 대결 때 생애 유일 네트터치 범실

피트 샘프라스
이형택과 피트 샘프라스(사진)의 2000년 US오픈 16강전 영상이 뒤늦게 화제가 되고 있다. ‘예능인’ 이형택만 알던 사람들이 영상을 보고 “이형택이 저렇게 테니스를 잘 했나”라고 깜짝 놀란다.

이형택은 “내가 조금만 더 일찍 ATP 투어를 시작했다면, 경험이 쌓인 상태에서 더 좋은 경기를 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듭니다”라고 말했다.

“전날 밤에 잠을 거의 못 잤어요. 주위에 샘프라스와 붙어본 사람이 있어야 간접 비교라도 할 것 아닙니까. 한 게임도 못 따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에 심장이 벌렁벌렁해서 잠을 잘 수가 없었어요.”

막상 붙어보니 어땠는지 물었다. “첫 공을 받았는데 무슨 돌덩이가 날아오는 것 같았어요. 그런데 첫 게임을 내가 따고 나니 ‘됐다. 육빵(6-0)은 면했다’는 생각에 편해지더라고요. 첫 세트 타이브레이크에서 상대의 중심을 완전히 무너뜨린 뒤 스매싱을 성공했는데 발이 네트를 살짝 건드렸어요. 내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 네트 터치였죠. 상대가 샘프라스니까 다 받아낼 것 같아서 서두르다 생긴 일이죠. 아차 싶어서 주심을 쳐다봤더니 심판이 반칙을 지적했어요. 샘프라스도 못 본 것 같았는데 태연하게 돌아섰다면 그 세트를 이길 수도 있었죠. 하하”



정영재 스포츠전문기자/중앙콘텐트랩 jerry@joongang.co.kr

※인터뷰 전문은 월간중앙 5월호 〈정영재 전문기자의 레전드를 찾아서〉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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