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미월의쉼표] 시보다 시적인 일

남상훈 2021. 4. 16. 2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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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책방 앞을 지나갈 때였다.

출입문에 어느 시인의 낭독회 포스터가 부착된 것이 눈에 띄었다.

낭독회의 주인공인 시인이 예전에 시집을 훔친 적이 있거든요.

그 인연이 마침내 시인으로 성장한 소년이 첫 시집 낭독회를 여자의 서점에서 여는 오늘에까지 이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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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책방 앞을 지나갈 때였다. 출입문에 어느 시인의 낭독회 포스터가 부착된 것이 눈에 띄었다. 시집을 훔친 시인. 포스터의 문구에 호기심이 일었다. 그것을 물끄러미 보고 있는데 문이 열리더니 책방 주인 여자가 고개를 내밀었다. 코로나로 낭독회가 취소되었다면서 여자는 내게 눈인사를 했다. 전에 아이 그림책을 사느라 몇 번 들렀던 것을 기억하는 모양이었다.

차나 한잔 하고 가시라는 여자의 제안을 거절하지 못하고 얼떨결에 서점으로 들어갔다. 손님이 아무도 없었다. 코로나 때문에 힘드시지요, 하고 물었더니 동네 책방 어려운 거야 코로나 전에도 그랬지요, 하는 답이 돌아왔다. 다만 낭독회가 취소된 것이 못내 아쉽다는 말에 나는 얼른 포스터의 문구에 대해 물었다.

문자 그대로예요. 낭독회의 주인공인 시인이 예전에 시집을 훔친 적이 있거든요. 나는 어떻게 반응할지 몰라 고개만 끄덕였다. 여자는 이십여 년 전에 시내 한복판 대형서점의 직원으로 일했다고 한다. 그때만 해도 폐쇄회로(CC)TV가 보편화되기 전이라 책 도둑이 적지 않았단다. 잡고 보면 미성년자인 경우가 특히 많았다. 용의자를 잡으면 일단 매장의 다른 층에 있는 직원실로 데려간다, 신상을 캐묻고 부모에게 전화하여 일의 전말을 고한다, 부모가 와서 사죄한다, 이것이 끝이었다. 용의자를 경찰서에 넘기는 경우는 없었다. 더러 혼 좀 나봐야 한다며 아이를 경찰서에 보내라고 종용하는 부모도 있었지만, 그런 경우 서점 쪽에서 오히려 부모를 진정시켰다고 하니 요즘과 비교하면 참으로 인정 넘치는 세상이었다.

어느 날 여자는 시집 코너에서 한 소년을 잡았다. 점퍼 안쪽에서 시집이 나왔다. 소년을 직원실로 데려갔다. 그는 고등학생이었고 연락할 부모가 없었다. 여자는 그를 돌려보냈다. 책값은 여자가 대신 치렀다. 그 대목에서 여자는 내게 변명하듯 말했다. 훔친 물건이 다른 것도 아니고 시집이잖아요. 더 ‘시적인’ 일은 그 후에 일어났다. 이듬해 소년이 서점을 찾아왔다. 감사 편지와 책값이 든 봉투를 들고. 그렇게 인연이 시작되었다. 그 인연이 마침내 시인으로 성장한 소년이 첫 시집 낭독회를 여자의 서점에서 여는 오늘에까지 이른 것이다.

뭐랄까, 앉은자리에서 시집 한 권을 통째 읽은 기분이었다. 그래도 뭔가 미진해서 나는 그 시집을 샀다. 그리고 서점을 나오며 여자에게 낭독회 일정이 다시 잡히면 꼭 알려달라고 신신당부했다.

김미월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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