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착하지 않으면서 얻게 되는 더 큰 세계
<노매드랜드>노매드랜드>
먹고살던 마을이 사라진 사람들
조그만 밴에 몸 싣고 유목 생활
물류센터, 사탕무농장, 조리실..
일자리 떠돌며 일종의 '차박'
자본주의 극단에 선 21세기 미국
그들 정신 밑바닥 '서부개척 정서'
광활한 풍광 명상적 롱숏 돋보여
정착할 것인가 다시 떠날 것인가
노매드(nomad, 혹은 RVer), 즉 지표면에 고정된 부동산이 아닌 자동차라는 동산을 집 삼아 살아가는 삶을 다루고 있는 영화 <노매드랜드>에 대해서는 일단, 다름도 아닌 프랜시스 맥도먼드가 주연과 제작을 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차박의 낭만과 여유를 예찬하는 설탕물맛 관광 무비가 아님은 충분히 짐작하실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영화는 ‘2011년, 석고보드 수요 감소로 88년 된 석고보드 공장이 문을 닫고, 그 직원들이 살던 ‘엠파이어’라는 마을 역시 소멸됐다’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자막으로 서두를 연다. 이어 엠파이어의 오랜 주민이었던 주인공 ‘펀’은 조그만 밴에 몸을 싣고 눈 쌓인 황야의 한 줄기 길을 따라 엠파이어를 떠난다. 그렇게 영화는 시작된다.
결정적 한가지가 없는 서부개척 영화
펀이 당도한 곳은 연말연시 시즌을 맞아 노매드들을 임시고용해 일손을 채우는 아마존의 거대 물류센터. 펀은 그곳에서 노동자로서 일을 시작한다. 하지만 이 영화는 노매드들의 노동 현실을 고발하는 영화도 아니다. 물류센터는 펀이 노매드 생활을 위한 자금을 벌고 지나가는 곳일 뿐이다.
영화는 추위를 피해 남쪽으로 향한 펀의 동선을 따라, 사막 한가운데 마련된 노매드들의 ‘신병훈련소’부터 길가 주유소 주차장까지를 아우르는 차박 장소들, 그리고 사탕무 농장부터 레스토랑 조리실까지 두루 섭렵하는 임시직 일터 등의 공간들을 훑어간다.
그 여정을 단단하고 묵직하게 이어주는 것은 드넓은 사막 초원부터 파도 몰아치는 해안까지를 아우르는 미국 대륙 곳곳의 광활한 자연 풍광이다. 그 명상적 롱숏들은 이 영화의 감독(겸 각본 겸 제작 겸 편집) 클로이 자오가 존경해 마지않는 테런스 맬릭의 영화들을 곧바로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의 중심에는 펀이 공들여 개조한 낡은 흰색 밴이 있다.
하여, 이 영화의 장르명으로 한가지만 꼽으라면 그것은 단연 웨스턴이다. 물론 이 영화에서 말떼, 양떼, 카우보이, 선술집, 총잡이 등등이 뛰노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영화의 뿌리에는 미국인들 정신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서부개척’의 정서가 원형 그대로 깔려 있다.
펀과 다른 노매드들의 밴은 그 서부개척 시대의 짐마차에 다름 아니다. ‘노매드들이 하는 일은 서부개척자들이 한 것과 다르지 않다’는 펀의 언니 ‘돌리’의 대사대로 그들은 미국 중서부의 광활한 대지를 뚫고, 갖은 척박하고 열악한 조건을 극복해가면서 길 위의 삶을 멈추지 않는다. 그들은 황혼이 깔리는 대지 위에서 취한 듯 경치를 바라보고, 하늘과 대지가 모두 파랗게 물드는 어스름이 깔린 사막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컨트리송을 부른다. 그러고 보니 이 영화엔 말, 버펄로까지 흡사 카메오인 듯 등장하고 있다.
다큐와 극영화의 하이브리드
다만 이 웨스턴에는 결정적인 한가지가 없다. ‘개척’을 기다리는 ‘서부’다. 그러므로 <노매드랜드>는 자본주의가 극단으로 치닫고 있는 지금 21세기에서 ‘서부개척 정신’의 생존 가능성을 탐색하는 영화가 된다. 노매드들이 어떻게 생존에 필요한 돈을 벌고, 먹고, 자고, 볼일을 보는지, 그리고 그 비좁은 공간을 어떻게 활용하는지 등등에 박물학적 관심을 기울이는 태도는, 따라서 단순한 호기심의 발로가 아니다. 또한 동명의 책을 읽은 프랜시스 맥도먼드가 클로이 자오의 첫번째 장편 <로데오 카우보이>(2017)를 보고 난 뒤, 그와 의기투합해서 이 영화를 만들게 된 것도 우연이 아니다.
아시다시피 <로데오 카우보이>는 이야기의 모델이 된 실제 인물들이 자기 자신의 캐릭터를 연기하는 극영화, 말하자면 다큐와 극영화의 ‘하이브리드’다. <노매드랜드> 역시 대부분의 인물들은 직업 배우가 아닌 실제 노매드들이 자기 자신의 캐릭터를 연기하고 있다. 하지만 <노매드랜드>는 한가지 결정적인 부분에서 <로데오 카우보이>와 다르다. 주연 배우가 직업 배우라는 점이다. 더구나 그 배우는 할리우드의 거물 배우 프랜시스 맥도먼드다. 그러니까 <노매드랜드>는 <로데오 카우보이>가 ‘진짜’ 로데오 선수를, 더불어 그의 가족과 친구 그리고 지인들까지도, 주연으로 기용함으로써 얻을 수 있었던 야생적 에너지를 희생하고 들어가는 것이다.
프랜시스 맥도먼드라는 배우의 존재가 가장 빛을 발하는 대목은 바로 이 부분이다. 그는 이 에너지의 공백을 거의 느끼지 않도록 한다. 그리 일반적이지는 않은 삶을 살아가는 비전문 배우들의 한가운데에서 그들의 일부분이 되어 연기한다는 것은, 말하고 보여주는 능력뿐 아니라 들어주고 받아주는 능력까지 갖춰야 가능한 것이라는 건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그것은 ‘연기력’ 이전에, 그들의 삶에 대해 호기심 이상의 관심을 강하게 유지해야만 가능한 것이라는 것 또한.
그런데 혹시 이 대목에서, 거의 모든 출연자가 실제 노매드라는 사실을 이야기한 것은 스포일러가 아닌가 하는 독자가 계실지도 모르겠다. 흠, 그럴지도. 하지만 사실, 이는 특별한 사전지식 없이도 눈치채기 어렵지 않다. 예컨대 영화 초반 아마존 물류센터의 식당에서, 또는 영화 중반 사막 한가운데에 피운 모닥불 주위에서 각자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노매드들을 담은 장면들은 지극히 다큐멘터리스럽다. 또, ‘12살부터 일했지만 연금은 고작 월 550달러’라고 말하는 린다 메이, ‘호수 수면에 비친 제비떼를 보면서 내 삶은 완전해졌다고 느꼈다’고 말하는 스왱키의 모습도 역시. 그 장면들이 극영화의 대화 장면에서 전형적으로 쓰이는 컷 분할을 쓰고 있음에도, 또 지극히 시적인 순간을 이야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동시에 이는, 맥도먼드를 제외한 유일한 유명 직업 배우인 데이비드 스트러세언(제이슨 본 시리즈의 ‘노아 보슨’ 역, <굿나잇 앤 굿럭>의 ‘머로 기자’ 역 등)의 존재를 더욱 두드러져 보이게 한다.
땅보다도 더 큰 지도 한장
펀은 오랫동안 함께했던 직장과 이웃과 마을, 그리고 사랑하는 남편까지 모두 잃고 난 뒤, 노매드의 삶을 선택하게 된다. 펀은 극중에서 “난 집 건물이 없을(houseless) 뿐, 집이 없는(homeless) 건 아니야”라고 말하지만 사실 펀은 가정도 자아도 상실한 상태다. 사랑하는 남편도, 그와 오랫동안 공유했던 ‘개척지’도 잃었으므로.
그 상태에서 그는 또 다른 노매드인 ‘데이비드’(데이비드 스트러세언)를 만난다. 그리고 그와 친구, 또는 친구보다는 좀 더 나아간 어떤 사이가 된다. (이하 스포일러 있습니다.) 그리고 얼마 뒤, 데이비드는 펀에게 정착을 제안한다. 그에겐 그림 같은 집(house)과 펀을 환영해주는 좋은 가족이 있다. 그는 심지어 아름다운 피아노 연탄을 할 수 있는 지적 소양까지 갖췄다. 셰익스피어의 소네트를 암송하고 플루트를 불 줄 아는 펀에게 데이비드만큼 편하게 머물 수 있는 집(home)은 또 없을 것 같다.
하지만 펀은 정착을 선택하지 않는다. 그리고 엠파이어에 있던 마지막 ‘정착민’으로서의 흔적마저 정리하고는 다시금 길 위의 삶을 향해 떠난다.
영화는 펀의 선택에 대해 뚜렷한 이유를 말하지 않는다. 우리에겐 ‘난 평생 너무 기억만 하면서 산 것 같아요’ 같은 펀의 대사 정도가 주어질 뿐이다. 하지만 이때쯤 우리는 이미 답 같은 것은 원하지 않고 있다. 우린 그저 우리를 어디로 데리고 갈지 알 수 없는 길과 그 길에서 만나게 될 누군지 모를 사람들, 그리고 인간과 길이 생기기도 전부터 있었고 그들이 사라진 뒤에도 여전히 있을 자연의 존재를 새삼 느낄 뿐이다. 그렇게 영화는 그것이 가리키고 있는 땅보다도 더 큰 지도 한장이 된다.
▶ 한동원 영화평론가. 병아리감별사 업무의 핵심이 병아리 암수의 엄정한 구분에 있듯, 영화감별사(평론가도 비평가도 아닌 감별사)의 업무의 핵심은 그래서 영화를 보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에 대한 엄정한 판별 기준을 독자들께 제공함에 있다는 것이 이 코너의 애초 취지입니다. 뭐, 제목이나 취지나 호칭 같은 것이야 어찌 되었든, 독자 여러분의 즐거운 영화 보기에 극미량이나마 보탬이 되자는 생각만큼은 놓치지 않으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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