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삶은 편편이 곡절 많은 눈물이었고..이제는 사라져가는 '점방'의 풍경

문학수 선임기자 2021. 4. 16. 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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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구멍가게 이야기

박혜진·심우장 지음|책과함께|488쪽|2만8000원

<구멍가게 이야기>는 두 저자가 전남 지역 시골의 구멍가게 50여곳을 직접 돌아다니며 쓴 구멍가게 답사기다. 사진은 전남 나주의 금성슈퍼. 책과함께 제공


마을 어귀에 점방이 있었다. 때로는 마을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와 있는 경우도 있었다. 어린 시절, 그곳에 가면 없는 게 없었다. 눈깔사탕을 비롯한 각종 과자와 조악한 장난감부터 라면, 소주, 담배, 곽성냥 등등. 지금 생각하면 보잘것없는 진열이었지만 어린 눈에는 세상 모든 물건들이 놓여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제법 규모가 있는 읍내 점방에서는 버스 차표를 팔거나 우편물을 보관해주기도 했다. 물론 기억 속 풍경은 세대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이 책의 지은이들이 말하는 “1983년, 우리 동네 구멍가게”의 추억은 이렇다. “새로 나온 컵라면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골목 안 구멍가게는 컵라면을 후후 불어 먹는 꼬맹이들로 득실거렸다. 우리만의 폼나는 점심문화였다.”

한국표준산업분류에 따르면 구멍가게는 165㎡(50평) 이하의 “음식료품 위주 종합 소매점”이다. 하지만 저자들은 “우리 기억 속의 구멍가게”는 이보다 훨씬 작았다고 말한다. “대체로 33제곱미터(10평)를 넘지 않았던 것 같고, 크게 잡아도 66제곱미터(20평) 언저리에 머물렀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코딱지만 한’ 가게였다. 이렇듯이 ‘작은 규모’와 더불어 중요한 것은 “가게가 놓인 자리”였다. 저자들은 말한다. “구멍가게는 우리의 일상에 깊숙이 들어와 있었다. 가게 주인은 가게를 기반으로 살림을 꾸리면서 동네 주민들과 하루하루를 공유했다. 구멍가게는 단순히 물건만 파는 곳일 수 없었다. 끊임없이 일상적 교류가 이어지고 그 속에서 수많은 이야기판이 형성되었다.”

두 저자가 발로 쓴 구멍가게 답사기다. 2011년부터 2014년까지, “전남 지역 22개 시·군에 있는 구멍가게 100여곳을 방문했고 그중에서 50여곳을 추려 주인들을 인터뷰”했다. 때로는 단골손님들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문화사적 서술도 간혹 등장하지만 본령은 ‘사람 사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구멍가게를 바라보는 시선은 크게 두 가지다. 그중 하나는 “몰락해가는 골목상권의 일부”로 보는 경제적 관점이다. 또 하나는 “따뜻했던 행복이 서려 있는 곳”으로 여기는 감성적 관점이다. 한데 그 모두가 “구멍가게를 관찰하고 기억해온 타자의 시각”인 까닭에, “주인공인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싶었다”는 것이 저자들이 밝힌 집필 의도다.


주인공들의 이야기는 편편이 곡절 많은 드라마다. 웃고 울리는 이야기 속에, 잊고 있었던 옛 풍경들이 되살아나기도 한다. ‘삼태상회’ 할머니는 “우리집에 제일 먼저 전화, 그 머시기냐, 공중전화 나오기 전에, 수락회선인가 뭣인가 이름도 잊어버렸는디”라며 전화기를 추억한다. 온 마을에 달랑 한 대 있던 전화였다. “어디서 누구 집에 전화 왔습니다”라고 방송하면 “쩌그 밑에서 여기까지” 허겁지겁 달려와 전화를 받곤 했다. 그러다가 1962년 9월 무인공중전화가 등장했는데 불미스러운 일들이 종종 일어났다. 전화기를 부수고 동전을 훔쳐가는 일들이 있었던 것이다. ‘운농수퍼’ 아주머니는 “엣날엔 쩌그 바깥”에 전화를 놨는데, 그런 일들이 자꾸 일어나다 보니 “안에서 했제”라고 증언한다. 저자들이 돌아본 구멍가게들 중에는 지금도 그때의 공중전화기들이 남아 있는 곳들이 종종 있었다. 하지만 “수화기를 들면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연산상회’ 할머니는 “아담한 체구에 곱상한 외모”를 지녔는데, 저자를 처음 만난 날 “굵은 눈물을 흘리면서” 살아온 얘기를 쏟아냈다. 홀아버지 밑에서 자라다가 결혼했으나 한국전쟁 때 첫남편과 헤어지고 재혼해 정착한 곳이 전남 장성이었다. 마음의 상처가 많았던 할머니에게 구멍가게는 “해방구 같은 곳”이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할머니의 삶은 아무도 만날 수 없는 컴컴한 동굴과 같았는데, 가게를 시작하고부터 달라졌다”는 것이다. 역시 장성군에 자리한 ‘아곡상회’ 아주머니는 대구 출신인데 장성으로 시집와 “다 쓰러져가는 주막을 인수해 아곡상회”를 열었다. 하지만 병으로 거동이 불편한 남편을 돌보고 자식 셋을 키우기에는 충분치 못해 “손님이 뜸할 때는 농사를 지으러 다녔고, 한 푼 두 푼 모은 돈으로 소도 사서 키웠다”. 저자는 “마을사람들이 가게에 모여 있을 때 아주머니는 유난히 밝고 활기차다”면서 “고단한 삶을 그나마 달래준 것이 구멍가게였다”고 말한다.

곡성 근촌리의 점방. 책과함께 제공


물론 구멍가게가 꼭 삶의 해방구이거나 위로이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곳은 “어쩔 수 없이 선택한 마지막 길”이었으며, 주인들이 겪어야 하는 일상과 감정은 고단함 그 자체였다. 구멍가게 주인은 타지에서 온 이들이 적지 않았으며 대부분 여성이었다. 동네 이웃이기도 한 손님들을 상대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때로는 진상 취객에 시달렸고 외상값을 떼였다. ‘죽마리 구판장’ 아주머니는 “술 이야기만 나오면 몸서리를 친다”. “진상 술꾼들을 부지기수로 겪으면서 오만 정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경남 거창에서 태어나 “손재주 뛰어난 구례 목수와 중매로 결혼”했는데, 남편은 어린 자식들만 남긴 채 병으로 세상을 등졌다. 먹고살려고 구멍가게를 시작한 이후, “이문도 얼마 안 남는 술 몇 병 내주고 온갖 술버릇을 군말 없이 받아내는” 고역을 날마다 치렀다. 22년간 그렇게 살아온 아주머니는 “장사하는 사람 중에서도 젤로 말단”이라고 한탄한다.

책 마지막 페이지에는 저자들이 4년간 답사한 구멍가게들 목록이 수록돼 있다. 모두 58곳이다. 장흥 부산면 ‘문흥수퍼’가 운영기간 65년으로 가장 나이가 많고 여수 화양면 ‘명수점방’이 60년으로 두번째다. 저자들은 지난해 이 가게들의 현황을 다시 살폈는데, 24곳이 사라졌다고 밝히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사라져가는 구멍가게들의 비망록이기도 하다.

문학수 선임기자 sachi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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