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수저 여성 3인의 '코인 열차 존버기' [책과 삶]

선명수 기자 2021. 4. 16.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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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달까지 가자
장류진 지음
창비 | 364쪽 | 1만4000원

“J. 이거였다. 내게 절실히 필요한 것. 그래서 내가 기다려왔던 것은 다른 게 아니라 바로 이런 모양, 이런 곡선이었다는 진실을 그 순간 섬광처럼 깨달았다.”

제과회사에 다니는 ‘다해’는 직장 동료 ‘은상 언니’의 태블릿에서 “뭐라도 뚫을 기세로, 급하게 우상향하고 있는” 그래프를 보게 된다. ‘J커브’였다. 어쩐지 주체할 수 없이 기분이 좋아보이는 은상 언니는 가상화폐 이더리움에 투자해 큰돈을 벌고 있다고 털어놨고, “우리 같은 애들”에겐 이 방법밖에 없다며 투자를 권한다. 그는 가상화폐 투자를 1990년대 초반 방영된 만화영화 <시간탐험대>에서 주전자 ‘돈데크만’이 주문을 외며 만들어내는, 다른 세계로 향하는 “터널 같은 포털”에 빗댄다. “난 이게 우리 같은 애들한테 아주 잠깐 우연히 열린, 유일한 기회라고 생각해.”

첫 책 <일의 기쁨과 슬픔>으로 평단과 독자의 주목을 동시에 받은 소설가 장류진이 첫 장편소설 <달까지 가자>로 돌아왔다. 소설은 가상통화 투자를 소재로 저성장 시대를 통과 중인 젊은층의 서글픈 ‘코인열차 탑승기’를 경쾌하게 그린다. ⓒ강민구
원룸 머물며 미래 없는 회사 생활
가상화폐 폭등의 ‘J커브’에 끌려
“더 늦기 전에” 전 재산을 건 이들
“모든 게 유려하고 우아한” 세계로
월급으로는 도약할 수 없는 시대
발버둥치는 세태를 경쾌하게 그려
‘존버’로 성공한 결말, 현실이 될까

장류진의 장편 <달까지 가자>는 그 제목이 말해주듯 가상화폐에 전부를 건 이들의 투자 모험담이다. ‘투더문(To the moon)’은 차트 급상향을 바라는 투자자들의 은어다. 소설은 “흙수저 여성 청년 3인의 코인열차 탑승기”(한영인 문학평론가)로 요약할 수 있는데, 현 세태를 예리하게 포착해 이를 경쾌하고 산뜻하게 펼쳐내는 작가의 재능이 돋보이는 책이다.

‘초코밤’이란 히트 상품으로 누구나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회사에 다니지만, 인물들이 처한 현실은 그다지 밝지 않다. 연말 송년회에서 ‘올해의 야근왕’으로 뽑힐 만큼 죽어라 일해도 인사평가는 몇년째 ‘무난’ 등급을 넘지 못하고, 공채와 비공채 사원에 대한 은근한 사내 차별도 존재한다. 노력한다 해도 삶은 크게 달라지지 않겠지만 그렇다고 절망을 단언할 수 없는 상태, 그저 “전진과 뒷걸음질을 반복”하며 제자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일상이다.

비슷한 시기 비공채로 입사한 다해, 은상, 지송은 첫날부터 “우리가 같은 ‘부류’ ”라는 것을 직감하며 가까워진다. 같은 월급을 받으며 회사에 다녀도 나와 다른 세계에 사는 듯한 안온한 동료들과 달리, 이들은 “여러가지 이유들로 집안에 빚이 있고, 아직 다 못 갚았으며, 집값이 싸고 인기 없는 동네에 살고, 주거 형태가 월세이고 5평, 6평, 9평 원룸에 살고 있다는 공통 정보”가 있다.

“매일매일 모래알처럼 작고 약한 걸 그러모아 알알이 쌓아올리고 있었지만 그걸 쌓고 쌓아서 어딘가에 도달하리라는 기대도 희망도 가져본 적이 없었”던 어느날, 은상 언니가 보여준 ‘J커브’는 마치 돈데크만이 내뿜는 한 줄기 섬광처럼 새로운 세계를 열어젖힌다. “들어와. 더 늦기 전에.” “은상 언니는 ‘들어오라’라는 표현을 썼고, 그 때문인지 나는 내가 무언가로 통하는 입구에 서 있는 것만 같았다. 아등바등의 세계로부터 고공 행진의 세계로 넘어가는 문턱을 밟고서. 그 안쪽을 자신없이 기웃대면서.”

그렇게 이들은 ‘은상 장군’을 따라 ‘코인 열차’에 동승하고, 이른바 ‘떡상’과 ‘떡락’의 풍파를 함께 겪는다. 월급만으론 “모든 게 유려하고 우아”한 세계로 진입할 수 없고, 그러니 그것이 허황되고 속된 욕망일지라도 한 번쯤 인생의 ‘고공 행진’을 꿈꿔보는 것. 작가는 청년들이 도약을 꿈꾸기 어려운 시대, 복잡다단한 자본주의의 그물망 속에서도 더 나은 삶으로 나아가려는 보통 사람들의 분투를 짠하면서도 경쾌하게 그린다. 읽는 이의 공감을 이끌어내는 사실적이면서도 유머러스한 직장 묘사, 정확한 자기인식과 현실감각으로 무장한 인물들은 장류진의 첫 소설집 <일의 기쁨과 슬픔>에 이어 이번 소설에서도 빛을 발한다.

전 재산을 쏟아부은 이들의 다사다난했던 투자는 ‘존버’ 끝에 결국 큰 성공을 거두며 마무리된다. 이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고 설파했던 은상 언니는 33억원의 자산가가 됐고, 다해와 지송도 그만큼은 아니지만 평범한 직장인이 쉽사리 손에 쥐기 힘든 액수의 돈을 벌며 ‘코인 열차’에서 내린다. 소설 말미, 세 친구가 새로 뽑은 세 대의 차로 고속도로를 시원하게 내달려 해안절벽까지 가는 장면은 이들의 롤러코스터와 같은 모험담에 몰입해온 독자에게 대리충족감을 선사하는 일종의 ‘성공 클리셰’다. 장류진은 “나는 이 이야기를 마지막엔 꼭 설탕에 굴려서 내놓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고 ‘작가의 말’에서 밝혔거니와, 판타지에 가까운 달달한 결말이다.

“우리가 어디까지 간다고?” 소설에서 여러 차례 반복되는 주문과 같은 말, “달까지 가자”는 그 말이 그저 희망가로만 들리지 않는 이유는 소설이 의도적으로 누락한 것처럼 보이는 그 이면의 세계 때문이다. ‘존버’와 ‘엑싯’의 기로에서 현명하게 빠져나와 이윽고 달까지 간, 상큼한 해피엔딩에도 달달함과 함께 씁쓸한 맛이 남는다. 장류진이 설계한 롤러코스터에서 내렸을 때, 당연하게도 ‘고공 행진’의 세계로 사뿐히 넘어갈 수 없는 ‘아등바등’의 세계가 계속되리라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소설가 정이현은 장류진의 첫 소설집 <일의 기쁨과 슬픔>을 “오늘의 한국 사회를 설명해줄 타임캡슐을 만든다면 넣지 않을 수 없는 책”이라고 평했다. 이 평에 걸맞은 또 한 권의 소설이 세상에 나왔다는 것은 자명해 보인다.

선명수 기자 sm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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