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진화사는 1400종 감염균과의 1만년 투쟁사 [책과 삶]

이혜인 기자 2021. 4. 16.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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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감염병 인류
박한선·구형찬 지음
창비 | 360쪽 | 2만원

땅콩, 복숭아, 게, 우유…, 먹으면 행복해지는 이 맛난 것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바로 흔한 알레르기 유발 물질이라는 점이다. 특정 물질에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들의 면역계는 독성이 없는 물질을 항원으로 여겨 재채기, 콧물, 가려움 등 과민 면역 반응을 보인다. 인간의 면역계는 진화 과정에서 수많은 미생물의 침입에 대응하기 위해 아주 다양한 항원에도 반응할 수 있도록 복잡하게 진화됐다. 그러다보니 가끔은 무해한 물질에도 면역 반응을 보이는 ‘오작동’을 일으킨다.

우리의 감정이나 사고도 알레르기 반응과 같이 유해하지 않은 것에 대해 ‘면역 오작동’을 일으키곤 한다. 무슨 말인지 쉽게 와닿지 않는다면, 갓 나온 따끈따끈한 똥 모양으로 만들어진 초콜릿을 마주했다고 상상해보자. 맛있겠다는 감정보다는 약간의 역겨움이 첨가된 거부 반응이 일어날 것이다. 생김새뿐 아니라 냄새마저 똥과 유사한 초콜릿이라면, 헛구역질을 유발할 수도 있다. 이 같은 감정의 거부반응은 행동면역체계라는 진화의학적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다. 생존에 필수적인 양식이 될 수 있는 것이라도 비위생적으로 보이는 냄새나 형태를 띠고 있다면 우선 경계하고 보는 행동이다.

인간의 몸과 마음은 외부 위협에 대응해 살아남기 위한 투쟁을 하면서 진화해왔다. 외부의 위협은 사자, 독수리 같은 맹수일 수도 있으나 균, 바이러스와 같이 아주 작은 미생물일 수도 있다. 중세의 콜레라균부터 현대의 코로나19 바이러스에 이르기까지 오히려 제일 작은 것들이 인류에게 가장 큰 위협이 됐다.

<감염병 인류>는 인간이 감염병과 투쟁하고 공존하며 진화해온 역사를 다루고 있다. 1800년대 초 에드워드 제너가 백신을 처음 개발할 당시 백신을 둘러싼 분쟁을 담은 아이작 크룩생크의 만평. 창비 제공
우리는 늘 팬데믹 지구에서 살았다
역사에서 감염병은 변수 아닌 상수
수억년 걸쳐 인간을 공격한 미생물
무려 100조 마리가 우리 몸에 남아
병원균 침입 막아주며 인류와 공생

<감염병 인류>는 인간 진화의 핵심에 ‘감염병’이라는 키워드를 놓고 이야기를 풀어간다. 기원전 약 1만년 전부터 현재까지를 뜻하는 홀로세 내내 1400여종의 감염균이 인류를 괴롭혔다. 지금까지 지구상에 살았던 사람 수를 모두 합치면 500억명 정도로 추산되는데, 그중 절반 이상이 감염병으로 죽었다고 한다. 책은 “우리 조상들은 인류사 내내 감염병을 피하고 살아남으려고 분투”했다며 “인류의 진화사는 곧 감염병의 진화사”라고 말한다. 감염병으로 인한 진화는 유전자 단위에서 그치지 않고 나아가 인간의 정서, 인지, 행동패턴부터 종교적 관습, 사회문화적 금기, 성관계에 대한 도덕적 기준 등까지 영향을 미쳤다는 설명이다. 신경인류학자인 박한선 박사(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와 인지종교학자인 구형찬 박사는 생물학, 의학, 인문학, 인류학의 경계를 넘나들며 흥미로운 이야기를 전한다.

책에서는 미생물총·기생충·박테리아·바이러스 등 미생물을 공(功)으로, 미생물로부터 자신을 지키려는 인간은 수(守)로 두고 설명한다. 공과 수의 관계는 기생체와 숙주의 관계이기도 하다. 미생물과 인간은 수억년에 걸쳐 다투며 공진화했다. 미생물 중 일부는 인간 몸속에서 살아남아 자리 잡았다. 세균, 고세균, 진핵생물, 바이러스 등 99%가 세균인 장내 미생물총은 인간 장 속에서 일정 영역을 차지하고 있다. 장내 미생물총은 병원균의 침입을 막고, 산성 물질을 분해해 소화작용도 돕는다. “우리 몸에는 무려 100조마리의 미생물이 살고” 있는데, “신체의 세포 수는 37조개니까 더부살이하는 미생물이 더 많”다. 태초 이래 기생충과 숙주 중 어느 한쪽만이 압도적으로 강력했었다면, 결국 둘 다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미생물이 널리 퍼져 인간을 공격하는 ‘감염병’이라는 형태로 공과 수의 균형이 깨진 것은, 인간이 모여 살기 시작해 문명이 발달하면서부터다. 수렵채집을 하며 떠돌던 인간은 신석기 시대에 농사를 시작한다. 농장과 축사 주변에는 “쥐와 모기, 파리가 찾아오고 박테리아와 바이러스도 반갑지 않은 동거를 감행”한다. 책은 현생인류인 호모사피엔스 이전의 구석기 인류는 ‘대체로’ 감염병에 걸리지 않았다고 설명한다.

1349년 흑사병 유행 시기의 유대인 학살을 그린 삽화.창비 제공
문명의 상징인 불과 옷의 발명으로
‘사회적 거리’ 좁아지며 감염병 발생
종교·음식·성적 행동 등 각종 규범
감염 예방책에서 나온 문화적 코드
혐오와 배제 같은 사회적 문제는
우리 몸의 ‘면역 오작동’과도 같아

문명의 상징인 ‘불’과 ‘옷’의 발명은 감염병을 키웠다. 불 주변으로 사람들이 모이면서 물리적 거리가 줄어들었다. 인간이 짐승의 털을 옷으로 입기 시작하면서, 발진티푸스의 매개체인 이가 인간 몸에 기생하며 병을 옮겼다. 산업화와 도시화로 인해 한 지역의 인구밀도가 높아지면서 기초감염재생산지수(R0·첫 감염자가 평균적으로 감염시킬 수 있는 2차 감염자의 수)도 크게 증가한다. “단선적 진보 모델에 의하면 인류는 미천한 동물의 위치에서 지금처럼 높은 인류의 위치로 발돋움했죠…낭만적으로 들립니다만 사실이 아닙니다.” “우리는 늘 팬데믹 지구에서 살아왔습니다. 코로나19 유행으로 팬데믹이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수많은 팬데믹에 낯선 목록이 하나 더해진 것뿐이죠.” 그러니까 인류 역사에서 감염병은 ‘변수’가 아니라 ‘상수’였다.

‘똥 모양 초콜릿’으로 돌아오자. 행동면역체계는 균이 인간 몸 안에 들어오기 전 단계에서 감염 가능성을 회피하기 위해 발달했다. 그 중심에는 더러운 것을 보고 혹시 감염이 될까 두려워하는 정서인 역겨움 또는 혐오가 있다. 혐오의 대상은 더러워 보이는 음식에서 계속 확장된다. “배설물, 해로운 곤충이나 더러운 설치류, 감염된 사람이 보이는 기침이나 구토, 설사, 부자연스러운 행동이나 피부의 발진” 등까지 적용되고, “분노와 배척의 문화적 코드로 발전”한다. “성관계에 대한 도덕적 기준, 음식에 대한 금기, 외국인 터부와 소수집단에 대한 편견, 종교와 정치, 문화에 대한 입장” 등이 그런 문화적 코드에 해당한다.

종교적 영역으로만 여겨져왔던 음식에 대한 금기는 감염예방에서 시작됐을 가능성이 높다. 음식 관련 금기는 식물성보다 동물성 먹거리에 관한 것이 더 많은데, 질병을 일으키는 세균과 곰팡이가 식물보다는 동물 사체에서 더 잘 번식하기 때문이다. 아이가 태어난 집은 대문 앞에 새끼줄을 느슨하게 쳐서 외부인의 출입을 한동안 조심하는데, 이 같은 옛문화는 일종의 사회적 거리 두기다. 성적 행동에 대한 갖가지 강력한 규범과 금기가 만들어진 것은 여러 사람과의 성적 행동이 실제로 감염 위험을 키우기 때문이다. 여러 장례 풍습 중에서도 수장이나 자연장보다 시신을 땅에 묻거나 화장하는 형태가 일반적이 된 것도 감염 위험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혐오와 배제는 감염병에 맞서 싸우며 인류가 체득하게 된 진화적 산물이다. 문제는 이 진화적 산물은 인류의 긴 역사 속에서 수많은 요인들이 작용하면서 생성된 것이기 때문에, 현대에 와서는 오작동을 할 때가 많다는 것이다. 혐오와 배제의 감정은 “감염이나 오염의 위험이 있는 대상에 대해서만 작동하는 게 아니라 비슷한 조건만 갖춰지면 사실상 전혀 위험하지 않은 대상에 대해서도 작동”하거나, “위험하지 않은 상황을 위험하다고 판단하는” 오류를 시시때때로 범한다. 책은 “감염병이 돌면 오염강박(오염을 피하려는 강박적인 사고)만이 아니라 타인에 대한 혐오와 배제 같은 사회적 문제도 심해”진다고 말한다. 낯선 것을 두려워하고 피하려는 진화적 산물은 “세계 곳곳에서 이주민, 성소수자, 장애인, 감염인 등에 대한 혐오가 사회문제로 대두”되는 상황을 만든다.

감염병을 둘러싼 인간의 지난한 투쟁을 볼수록 “우리가 목도하는 것은 ‘우리 안의 원시인’ ”이다. 전 세계 모든 사람이 코로나19 백신 접종을 마치고, 코로나19가 사실상 ‘종식’될지라도 여태까지의 역사를 보면 감염병은 주기적으로 우리를 찾아올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그때마다 혐오와 배제의 물결은 더 거세질 것이다. 저자는 “절대 놓치지 말아야 할 과제”는 “우리 자신, 즉 인간에 대한 더 투명하고 정직한 이해를 공유”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타자에 대한 무조건적인 혐오와 배제는 지금 이 시대에는 ‘면역 오작동’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이혜인 기자 hyei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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