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피처] '그는 신의 아들이었다' 식민지배 받은 부족이 왜 눈물을
(서울=연합뉴스) 지난 9일(현지시간)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남편 필립공이 99세를 일기로 별세했습니다.
영국 공영방송 BBC는 이 소식이 전해지자 정규방송을 중단하고 국가를 틀었으며 정부는 필립공 장례식 다음 날까지 조기를 게양하기로 했죠.
버킹엄궁에는 조기가 내걸렸고 수많은 영국 국민이 버킹엄궁과 윈저성 등을 찾아 필립공을 추모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을 비롯해 각국 수반도 애도를 표했고 프란치스코 교황까지 위로 메시지를 보냈을 만큼 필립공 별세는 세계적인 뉴스입니다.
그런데 영국과 멀리 떨어진 데다 휴대전화 등 문명의 이기도 사용하지 않는 섬나라 부족사회 사람들이 필립공 별세로 깊은 슬픔에 잠겼다는 소식이 이목을 끌고 있습니다.
BBC 등 외신에 따르면 화제가 된 사람들은 남태평양 바누아투 타나섬에 거주하는 두 개의 부족민들인데요.
영국인들과 각국 사람들이 영국 여왕의 남편을 잃었다는 사실에 슬퍼하고 있지만, 이 부족민들은 자신들이 모시던 신적인 존재를 잃었다며 슬퍼하고 있다는 점이 특이합니다.
약 반세기 동안 필립공을 신과 같은 영적 인물로 추앙해온 '야켈'과 '유나넨' 부족은 타나섬의 정글 지대에서 원시 부족사회 문화를 유지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들이 믿고 있는 이른바 '필립공 신화'의 바탕은 타나섬이 세상의 중심이며 세계 평화 증진의 사명을 가지고 있다는 믿음입니다.
그리고 약 반세기 전, 1960년대부터 이 믿음의 중심에 필립공이 등장했습니다.
부족민들 신화에 따르면 필립공은 신붓감을 찾아 섬을 떠난 산신의 아들이며, 여왕과 함께 영국을 통치하면서 세계에 평화를 가져왔습니다.
만약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면 필립공은 타나섬으로 돌아왔어야 하지만 백인들의 무지와 탐욕, 끝없는 싸움이 '신의 귀환'을 막았다고 부족민들은 주장합니다.
부족민들과 접촉해 온 언론인 댄 맥게리는 이 신화가 "목적을 가지고 떠나 공주와 그 왕국을 차지하는" 영웅 서사의 모습을 띤다고 분석했습니다.
영국 왕실에서 수십 년 동안 생활한 필립공이 뜬금없이 남태평양 섬의 신적인 존재가 되어 신화에 등장하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요.
이 신화가 정확히 언제, 왜 등장했는지는 정확하지 않습니다.
가설 중 하나는 부족민들이 우연히 엘리자베스 여왕과 필립공의 사진을 보고 그를 숭배하게 됐다는 내용인데요.
바누아투는 1980년 독립해 공화국이 되기 전인 70여 년 동안 '뉴 헤브리디스'라는 이름으로 영국과 프랑스의 공동 통치를 받는 곳이었는데, 이때 필립공에 대한 잘못된 믿음이 시작됐다는 설이죠.
식민지배의 부당함 등에 대한 심리적 반응으로 부족민들이 통치자의 바로 옆에 있는 사람과 자신들을 연관 지었다는 가설도 있습니다.
전문가들은 신화가 어떻게 시작됐든 1974년 필립공이 뉴 헤브리디스를 방문해 부족민들의 전통주 시음 행사에 참여한 것이 이들 신앙심을 공고하게 했다고 설명합니다.
필립공도 생전 이 낯선 섬사람들이 자신을 숭배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2007년엔 한 방송사의 리얼리티 프로그램을 통해 부족민 일부가 영국까지 가서 필립공을 만나고 선물을 바치며 언제 타나섬에 '돌아올 것인지'를 물었죠.
필립공은 이들에게 "날씨가 따뜻해지면 연락하겠다"는 아리송한 답을 했지만 부족민들은 그것으로도 만족했다고 합니다.
영국과의 시차 등으로 인해 필립공 별세 소식을 뒤늦게 전해 들은 부족민들은 충격에 빠졌고, 이들 중 다수는 눈물을 흘리며 슬퍼했는데요.
이들은 앞으로 수 주간 신성한 춤을 추고 행진을 하며 필립공과 관련된 물건을 전시하는 등 나름의 방법으로 성대한 추모행사를 열어 필립공을 떠나보낼 계획입니다.
이 같은 부족민들의 사연이 알려지자 "(식민지배)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반하는 '스톡홀름 신드롬'이냐"는 등 안타깝거나 한심하다는 반응이 나오고 있습니다.
게다가 필립공은 생전 다른 인종과 문화에 대한 이해와 존중이 부족한 언사로 여러 차례 구설에 올랐는데요.
필립공은 2003년 나이지리아를 방문해 전통 복장을 한 당시 나이지리아 대통령에게 "자러 가는 사람 같다"고 평했고, 1986년엔 중국에서 유학 중인 영국 학생들을 만나 "여기 오래 머무르면 여러분도 전부 눈이 쫙 찢어진 모양이 될 것"이라는 몹쓸 농담을 했습니다.
자신들의 땅을 식민통치한 나라 여왕의 남편, 문화적으로 무감각하고 부적절한 발언을 서슴지 않았던 필립공.
그런 그를 신의 후손으로 모셨다가 추모하는 작은 섬나라 사람들의 '지나친 순수함'이 필립공 별세 소식과 함께 주목받고 있습니다.
이은정 기자 김지원 작가 주다빈 한영원 인턴기자
mimi@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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