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생한 7년 전 그날.. 세월호가 남긴 것은 [심층기획]

김유나 2021. 4. 16. 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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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70대 70명에게 물었다
공포·불안감 높아지고 안전에 민감해져"
"국가시스템에 참담함·분노 동시에 느껴"
"아무런 영향 미치지 않았다"는 6명뿐
"정쟁 대상으로 만든 이들 반성해야"
"노란 리본 달고 항상 기억하려고 해"
세월호 참사 7주기를 하루 앞둔 지난 15일 오전 전남 진도군 임회면 팽목항(현 진도항)에을 찾은 추모객들이 노란리본을 바라보고 있다. 뉴스1
“쉬는 시간이었어요. 오전 10시쯤이었는데, 친구가 ‘제주도에 수학여행 가는 배가 가라앉았다’고 해서 깜짝 놀랐죠. 교실 분위기가 금세 시끌시끌해졌어요. 수업 중에는 휴대전화를 쓰지 못하니 수업하러 온 선생님들한테 계속 ‘어떻게 됐냐’고 물어봤어요. 그러다 전원 구조됐다는 소식이 들려서 안심했는데…”

대학생 김모(25)씨에게 ’그날’은 여전히 생생하다. 2014년 4월16일의 기억을 묻자 그는 마치 며칠 전 일을 말하듯 세세한 장면을 줄줄 이야기했다. “학생회 활동을 할 때라 안산 합동분향소에 학교 대표로 추모하러 갔는데 분향소에서 나던 향냄새까지도 기억나요. 한쪽 벽면에 또래 아이들 사진 몇백개가 걸려있는 장면을 보고 압도됐어요.” 

당시 고등학생이던 김씨에게 세월호 참사는 ‘죽음’이 가까이 있음을 알려줬다. 그는 “나도 언제든지 사고를 당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매 순간 의미있게 살아야 한다는 다짐을 했다”고 말했다. 4월이 다가오면 여전히 세월호 생각이 난다. “만일 제가 안산에 살았다면 죽은 아이들이 제 친구였을 수도 있잖아요. 앞으로도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대학생 홍윤기(26)씨는 재수학원에 다니던 중 소식을 접했다. “처음엔 ‘구할 수 있겠지’라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는데 밤늦게 집에 가니 가족들이 뉴스를 보고 있더라고요. 그때서야 심각한 상황인 걸 알고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어요. 그 기분이 아직도 생각나요.” 세월호 참사는 그의 진로 선택에도 영향을 줬다. 그는 “한국은 세월호 전과 후로 나뉜다’는 글을 봤는데 전적으로 공감한다. 세월호 사건을 계기로 집회에도 나가고 사회 현상에 적극 나서게 됐다”며 “유가족들을 보면서 타인을 위한 삶을 살고 싶어졌다”고 말했다. “사람들이 지겹다고 하는 건 정치권과 언론의 잘못이 크죠. 더 적극적으로 기억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세월호 참사 7주기를 이틀 앞둔 지난 14일 전남 목포시 목포신항에 세월호 선체가 세워져 있다. 연합뉴스
다시 4월이다. 과거 4월은 완연한 봄기운이 느껴지는 따뜻한 이름이었다. 하지만 7년 전 세월호가 가라앉은 뒤 한국사회에서 4월은 또다른 슬픔의 상징이 됐다. 누군가는 바다만 바라봐도 눈물 짓고, 누군가는 낡은 노란 리본을 가방에서 떼지 못한다. 또다른 누군가는 지겹다고, 이제 그만 하라고 말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세월호 참사가 우리 모두에게 크고 작은 흔적을 남겼다는 것이다. 계속 기억하려는 사람도, 잊으려는 사람에게도 여전히 마음속에는 2014년 4월의 기억이 있다. 그해 봄을 살아낸 이들에게 세월호는 그저 흘러간 기억이 아니다.

우리는 세월호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20∼70대 70명에게 각자 저마다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세월호를 물었다. 이중 14명은 2014년 봄, 팽목항에 머물렀던 자원봉사자나 공무원이다. 

◆7년 지났지만… 어제 일처럼 생생한 그날

“사무실에서 친한 동기랑 메신저로 점심 메뉴를 얘기하고 있는데 갑자기 속보 떴다고 알려주더라고요. 나중엔 뉴스 틀어놓고 직원들 다 같이 봤어요. 그때 사무실 공기까지도 생생하게 기억나요.”(30대 직장인 이모씨) 

“대입 준비 중이었는데 그날 늦잠을 자서 학원에 안 갔어요. 엄마랑 집에서 아침을 먹다 뉴스를 봤어요. 종일 뉴스 틀고 있던 적은 그날이 처음이었던 것 같아요.”(20대 직장인 김모씨)

세월호 참사 7주기를 하루 앞둔 15일 오전 전남 진도군 임회면 팽목항(현 진도항)에서 추모객들이 방파제를 둘러보고 있다. 뉴스1
세계일보가 인터뷰한 이들 대부분은 세월호 참사를 처음 접했던 순간을 비교적 명료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70명 중 그 순간이 기억나지 않는다는 사람은 7명뿐이었다. ‘학생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었다’, ‘휴가 중이었어서 집에서 TV를 봤다’ 등 저마다 비보를 들었던 장소와 상황을 상세히 이야기했다. 바로 며칠 전처럼 생생한 기억을 풀어놓는 이들도 많았다. 우리 모두가 목격자였던 셈이다. 

참사를 목격한 이들은 모두 저마다의 아픔을 느꼈다. 교사 서모(56)씨는 “나 역시 아이들을 데리고 수학여행을 많이 갔기에 세월호 참사는 피부에 와 닿는 공포였다. 수개월간 우울감을 떨치기 힘들었다”고 전했다. 전남 해남에서 미용실을 운영하는 김은정(50)씨는 수련회에 가는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주고 돌아오는 차에서 라디오로 사고 소식을 접했다. 그는 “그날 저녁에 바로 팽목항에 갔다. 내가 뭐라도 할 수 있는게 있을까 고민하다가 나중에 미용봉사를 하러 갔다”며 “사고 당사자는 아니지만 그 순간을 생각하면 항상 마음 아프고 먹먹하다”고 말했다.

여전히 많은 이들이 종종 세월호를 떠올린다. 김모(29)씨는 “책을 읽다가 ‘상실’이란 단어만 마주해도 생각이 난다. 바다를 보면 기쁘다가도 문득 세월호 생각에 기분이 가라앉기도 한다”고 말했다. 박모(25)씨는 “교복 입은 학생들이 모여 즐겁게 떠들고 있는 것을 봐도 문득 생각이 난다. 사고 당시 나 역시 고등학생이었기에 충격이 더 크게 와 닿았었다”고 말했다. 신모(58)씨도 “아들 생일이 4월 16일인데 미역국을 끓일 때마다 세월호 희생자들을 위해 기도한다”고 전했다. 

노지운(24)씨는 세월호 사고를 ‘흉터’에 비유했다. 그는 “세월호는 다른 사고와 다르다. 전 국민이 생중계로 배가 가라앉는 것을 지켜봤다”며 “아이들을 지켜내지 못했다는 무력감이 모두에게 깊은 상흔을 남긴 것 같다”고 말했다. 

세월호 참사 7주기를 하루 앞둔 15일 오전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4.16민주시민교육원 단원고 4.16기억교실에서 한 유가족이 교실을 살펴보고 있다. 뉴시스
◆세월호가 남긴 것은… 공포 그리고 또다른 삶

세월호는 어떤 흔적을 남겼을까. 세월호 참사가 자신의 인생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는 사람은 6명뿐이었다. 특히 ‘바다와 배에 대한 공포가 생겼다’, ‘안전에 대한 불안감이 높아졌다’는 이들이 많았다. 강미숙(59)씨는 “바다가 아름답게만 보이지 않는다. 배 타는 게 무섭다”고 말했다. 40대 박모씨도 “배뿐만 아니라 비행기도 무서워졌다. 세월호 당시 아이가 아주 어렸는데도 나중에 커서 수학여행을 가고 여행을 갈 미래가 덜컥 겁이 났다”며 “여행을 가서도 행동 하나하나에 조심하게 된다. 지난해 제주도에 갔을 때도 배를 한번도 안 탔다”고 회상했다.

교사 김모(26∙여)씨는 “학교 현장에서는 어쩌면 항상 함께 하는 것 같다. 세월호 참사 이후 학교에서는 '안전'을 굉장히 민감하게 생각한다“고 전했다. 그는 “개인적으로는 현장체험학습 등으로 학생들을 학교 밖으로 데리고 나가는 상황에 대한 불안감이 생겼다. 가기 전에 너무 걱정돼서 잠을 못 잔 적도 있다”며 “학생들에게 하는 안전교육이 충분한지, 세월호 참사와 비슷한 상황이 왔을 때 내가 잘 대처할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고 털어놨다.

김의섭(27)씨는 “한국 사회의 안전불감증에 대해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안전 문제를 중시하게 돼서 집에서도 창문을 잘 확인한다든가 전기장판, 인덕션 등 위험할 수 있는 요소들을 더 신경 써서 보게 됩니다.” 이밖에 전지원(26)씨도 비상구를 체크하는 습관이 생겼다고 전했다. 

세월호 참사 7주기를 하루 앞둔 15일 서울 광화문광장 세월호 기억공간에서 현장 관계자가 희생자들의 명단 앞에 화분을 올리고 있다. 뉴스1
많은 이들은 국가에 분노를 느꼈다. 고병찬(24)씨는 “세월호 참사 다음 주에 우리도 제주도로 배 타고 수학여행을 갈 예정이었어서 남의 일 같지가 않았다”며 “국가 시스템이 작동되지 않은 것을 보면서 참담함과 분노를 동시에 느꼈다”고 말했다. 황모(30)씨도 “한국의 안전 불감 시스템을 보여준 사건 같다”며 “‘가만히 있으면 안되겠다’, 순순히 지시에 따르면 손해라는 인식이 생겼다”고 말했다. 권모(27)씨는 “‘내가 운이 좋아서 살아있는 거구나’란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는 “나 역시 고등학교 때 배를 타고 수학여행을 갔었다. 나도 피해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이라고 말했다. “운이 좋으면 살고 없으면 죽는 사회가 아니라 위험에 처하면 바로 구조될 수 있는 사회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부정적 인식만 남긴 것은 아니다. 팽목항에서 시신 확인 관련 업무를 했던 보건복지부 공무원 A씨는 근무하던 책상과 시신 보관 장소가 천 하나로 가려져 있어 유가족이 오열하는 소리를 가까이에서 들었다. 그는 “표현할 수 없는 슬픔을 느꼈지만 동시에 삶과 죽음이 멀리 있지 않다는 생각에 내 삶을 되돌아보게 됐다”며 “가족들을 더 사랑하고 지금 상황에 최선을 다하자는 생각을 했다”고 기억했다. 이은경(59)씨는 “나라가 안전망을 잘 갖춰야 한다는 생각에 죽을 때 국가에 기부하고 떠나야겠다는 다짐을 했다”고 말했다.

세월호 참사 7주기를 하루 앞둔 지난 15일 서울 광화문광장 세월호 기억공간을 찾은 참사 당시 생존자가 희생자들의 사진을 둘러보고 있다. 뉴스1
◆여전히 기억하는 사람들

세월호가 정치적인 사안으로 흘러가는 데 대한 반감도 컸다. 김모(25)씨는 “매년 추모하는 것을 넘어 정치적 이슈가 되는 것을 보면 싫증이 나기도 한다“고 털어놨다. 임모(57)씨도 “세월호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사람들 때문에 지겹다는 말도 나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김도균(29)씨는 “참사를 정쟁 대상으로 소비하게 만든 장본인들이 반성해야 한다”고 꼬집었다.

하지만 계속 기억하려는 이들도 많다. 9개월간 실종자 가족을 돕는 봉사활동을 했던 조왈현씨는 옷과 차에 노란 리본을 달고 다닌다. 이유를 묻자 “기억하려고. 당연한 거야”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는 “수많은 생명이 사라졌는데 지겹다고 할 수 없다”며 “또다시 이런 참사가 되풀이되지 않으려면 세월호 참사를 잊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유성준(28)씨도 가방에 노란 리본을 달고 다닌다. 유씨는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노란 리본을 달고 또 그런 사람들을 보며 항상 잊지 않고 상기시키는 것이 또다른 세월호 참사를 막을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모(39)씨에게 노란 리본은 위로를 건네는 방식이다. “지나가는 사람 중에 세월호 유가족이 있을 수 있잖아요. 그 사람들이 노란 리본을 보고 힘을 냈으면 좋겠어요. 나도 당신처럼 아직 잊지 않았다, 여전히 아프다. 같이 힘을 내서 살아가자는 인사예요.” 

김유나·김병관·이정한·구현모·조희연 기자 yoo@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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