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드라마 따윈 볼 일 없을 거랬는데.. 빌어먹을, 내가 빠져버렸네"
혐한(嫌韓) 인사로 유명한 일본 작가 햐쿠타 나오키는 지난해 11월 트위터에 이런 글을 올렸다. “빌어먹을(クソ) 한류 드라마 따위 볼 리 없다고 외쳐왔는데, 넷플릭스로 ‘사랑의 불시착’을 보고 빠져들어 버렸다.” 이후 ‘김비서는 왜 그럴까’ 등 한국 드라마 시청 사실을 꾸준히 인증한 그는 최근 이런 소감도 남겼다. “재미있는 드라마는 어느 나라가 만들었든 재미있는 것이다.” 문화의 힘이 오랜 혐오의 감정마저 넘어선 것이다.
한국 대중문화 산업은 2000년대 초반까지 일본의 것을 모방(模倣)한다는 의혹을 끊임없이 받아왔다. 1992년 나온 한국 최초 트렌디 드라마 ‘질투’가 1년 전 일본에서 나온 ‘도쿄 러브스토리’를 표절했다는 말이 나온 이후 유사한 표절 시비가 장르를 불문하고 숱하게 일었다. 일본이 음악과 드라마, 영화 등 대중문화 산업의 거의 모든 영역에서 아시아 시장을 선도해왔던 만큼 일본의 선례(先例)를 벤치마킹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20여 년이 지난 지금, 양국의 입장은 완전히 뒤바뀌었다. 한국에서 만든 노래와 드라마가 일본 대중의 선풍적인 인기를 얻고, 혐한 작가마저 한국 드라마의 경쟁력을 인정한다. 일본뿐 아니라, 미국과 프랑스, 홍콩 등 우리 대중문화가 오랜 영향을 받아 온 세계 각국에서 한국 콘텐츠가 원조 그 이상의 평가를 받는다. 한마디로 청출어람(靑出於藍)하게 된 셈이다.
◇일본에서 배워 다른 길로 갔다
한·일 문화 산업의 뒤바뀐 입장은 수치에서부터 드러난다. 일본의 대표적 엔터테인먼트 기업 에이벡스(avex)의 매출은 2011년 1115억엔(1조1469억원)에서 2020년 1354억엔(1조3928억원)으로 21% 성장하는데 그쳤다. 반면 한국 대표 연예기획사인 SM엔터테인먼트의 매출은 같은 기간 1099억원에서 5799억원으로 427% 성장했고, YG의 매출은 625억원에서 2553억원으로 308% 늘어났다. 대중문화 산업의 규모는 일본에 크게 못 미치지만, 성장세만큼은 한국이 일본을 큰 차이로 따돌린 셈이다. 특히 한국 대중문화 기업의 매출 절반 가까이가 해외에서 발생하는 반면, 일본은 애니메이션을 제외하면 그 비중이 10% 미만으로 추산된다.
대중문화 콘텐츠의 질적 평가에서도 한국이 일본과 어깨를 나란히 하거나, 그 이상의 입장에 섰다. 지난해 말 일본 국민 아이돌 그룹 아라시(嵐)가 BTS의 빌보드 1위 기록에 도전하겠다며 데뷔 21년 만에 영어 노래를 발표했지만, 빌보드 싱글 차트 300위 안에도 들지 못했다. 원용진 서강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한국의 대중문화 산업이 일본 영향을 받은 것을 부인할 수 없지만, 현재 K팝 등 한국 대중문화의 세계적 성공은 일본과는 다른 길을 걸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한·일 대중문화 산업의 경쟁력은 어디서부터 차별화가 시작된 것일까. 원 교수는 “(대중음악의 경우) 팬덤과 고장난명(孤掌難鳴)의 유무”라고 했다. 예컨대 한국 아이돌 그룹은 시작부터 유튜브와 트위터 등 디지털 플랫폼(서비스)을 통해 국내외 팬과 적극적으로 소통하는 것이 기본이다. 반면 일본 기획사들은 실물 음반 판매 시장에 집착한 나머지 디지털에 대한 관심이 적고, 악수회 등의 기존 비즈니스 모델에 계속 매달리고 있다. 심두보 성신여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는 “한국 대중문화는 전반적으로 문화 소비자의 요구를 재빠르게 반영해 이른바 ‘취향 저격’ 콘텐츠를 만들어 내고 있다”면서 “이런 점은 기존 대중문화 강국을 뛰어넘는 점”이라고 했다.
◇글로벌리즘과 정치적 자유
해외시장을 겨냥한 글로벌리즘(globalism·세계화 추구) 역시 한국을 청출어람으로 이끈 요소로 꼽힌다. 지난해 말 일본 도쿄신문은 ‘4차 한류 붐’을 소개하며 “내용의 다채로움이나 참신함만이 아니라, 세계 시장을 의식한 판매 전략에 주목하고 싶다”고 썼다. 막강한 글로벌 팬덤을 확보한 한국 대중문화의 저력에는 세계를 향한 ‘맞춤형 마케팅 전략’이 있다고 짚은 것이다.
K팝은 준비 단계부터 해외 멤버와 작곡가를 영입하고 해외 팬을 공략하는 등 그 형식과 내용 모두 글로벌화했다. 한국 드라마도 세계 최대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인 넷플릭스와 손잡고 전 세계 시청자를 겨냥한 콘텐츠를 제작, TV나 영화관을 거치지 않고도 바로 전 세계 대중들에게 작품을 노출한다. 반면 일본은 내수 시장 집중 경향과 더불어 ‘쿨 재팬’ 같은 정부 주도 문화 프로젝트가 해외 공략을 위한 민간 부문의 역동성을 떨어뜨린다는 분석이 나온다. 양국 드라마 수출 실적에서 한국(2억4000만달러)이 일본(3200만달러)의 8배에 달하게 된 것이 단적인 예다.
자유롭게 콘텐츠를 제작하는 분위기가 한국 대중문화의 경쟁력을 끌어올린 결정적 요소라는 의견도 있다. 홍석경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는 “한국은 민주화 이후 다른 아시아 국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환경 속에서 콘텐츠를 만들어왔고, 이 점이 남들과 달랐다”고 했다. 중국이나 동남아는 말할 것도 없고, 일본조차 보수적 사회 분위기 때문에 원하는 주제를 마음껏 표현하기 어려운 경우가 있는 것과 비교되는 부분이다. 한국의 대중문화 약진에는 ‘정치적 요소’도 한몫 했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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