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선생님"을 불러보는 작은 용기 / 장동원

한겨레 2021. 4. 15. 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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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이야기지만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이 참 많았지요. 학자금 못 내는 아이, 교복값이 부족한 아이, 수학여행 경비 걱정하는 아이, 물론 장학금으로 지원되기도 했지만 모두 감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담임이었을 때 가끔 부족한 액수를 슬쩍 도와주곤 했었는데, 지금은 아쉬움이 큽니다. 그런 아이는 졸업하고 나면 거의 못 만나게 되더라고요. 졸업생 모임이 있어도 안 나타나고, 다른 친구들이 간혹 찾아오는 모교 방문도 오질 않거든요."

평생 교직에 몸담고 이제 정년을 앞둔 교감 선생님과 얼마 전 같이 차를 타고 가면서 나눈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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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ㅣ장동원 수도전기공업고등학교 교장

“옛날이야기지만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이 참 많았지요. 학자금 못 내는 아이, 교복값이 부족한 아이, 수학여행 경비 걱정하는 아이, 물론 장학금으로 지원되기도 했지만 모두 감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담임이었을 때 가끔 부족한 액수를 슬쩍 도와주곤 했었는데, 지금은 아쉬움이 큽니다. 그런 아이는 졸업하고 나면 거의 못 만나게 되더라고요. 졸업생 모임이 있어도 안 나타나고, 다른 친구들이 간혹 찾아오는 모교 방문도 오질 않거든요.”

평생 교직에 몸담고 이제 정년을 앞둔 교감 선생님과 얼마 전 같이 차를 타고 가면서 나눈 이야기다.

사실 나눈 이야기라기보다 필자가 궁금해서 물은 이야기였다. 필자는 30여년을 기업에서 근무하다가 공모제 교장으로 지금의 학교에 왔다. 학교에 오자마자 교감이라는 자리가 얼마나 바쁘고 중요한지 알게 됐다. 학생들을 지도하는 모든 선생님을 총괄 관리하는 일이라서 챙겨야 할 일도 많고 고민해야 할 일도 많다. 수많은 선생님의 의견을 일일이 반영할 수 없게 되면 으레 욕(?)을 먹는 일도 교감의 역할이 되곤 한다. 교장은 경영자적 시각에서 아우르지만 교감은 직접 선생님을 상대하고 부대껴야 하는 고충이 크다.

그러니 교장이 수시로 교감을 격려하고 위로하는 게 중요하다. 그 방법으로 필자가 생각해낸 것이 교감의 교직 생활 듣기다. 학교와 학생들에 대해서 경험이 녹아 있는 소중한 이야기를 듣는 시간이면서, 교감에게는 무용담(?)을 쏟아내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때 그랬었군요” 하며 웃고 즐긴다.

졸업한 아이들을 못 만나게 된 이유를 묻자, 아마도 도움받은 것이 있어서 선생님 앞에서 위축되는 걸 꺼리기 때문일 거라고 답한다. 학생들은 선생님의 경제적 지원을 빚진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본인은 도와줄 때부터 그 돈을 돌려받을 생각조차 없었는데, 학생은 무언가 부담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는 것이다. 아쉬운 것은 정년이 다가올수록 그 아이들이 그립고 한번 보고만 싶은데 그럴 수가 없는 거라고 한다.

“지금 생각해보면 제 탓입니다. 제가 잘못한 것이지요. 교회에 다니지는 않지만,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성경의 뜻이 이거였구나 하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한다. 누가 도움을 주었는지 전혀 모르게 했어야 했는데 하는 생각에 후회가 된다는 것이다. 들으면서 문득 숙연하고 가슴이 따뜻해졌는데 다음 이야기를 이어간다.

그와는 정반대로 학교 다닐 때는 말썽도 피우고 더러는 맞으며 혼나기도 했던 아이들은 자주 만나게 된다고 한다. 그런 아이들이 모임에도 자주 오고 더 당당하게 활기차게 다닌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빚진 게 없고, 선생님이 오히려 자기에게 빚졌다고 생각하는 게 아닌가 싶어요” 하면서 웃는다.

그러고는 가끔 신문지상에서 보게 되는 은사를 찾는 기사에 대해 언급한다. ‘수십년 전에 제 인생에 도움을 주신 선생님이 무척이나 그립습니다’라며 올라오는 기사도 사실은 수십년의 세월이 걸렸을 거라고 한다. 그 학생이 자존심과 위축됨을 다 벗어버리기까지 긴 세월이 필요했고, 고마움을 순수하게 받아들이는 그런 때가 아주 늦게라도 찾아온 거라는 것이다.

“남 이야기인데 그런 기사가 반갑고 고마울 때가 있습니다”라고 말끝이 잠긴다.

다음달에 스승의 날이 있다. 다가오는 스승의 날에는 그 옛날 잊힌 선생님, 고마웠던 선생님을 수소문해보자. 무슨 특별한 선물 보따리를 바라는 선생님이 있을까? 그저 “선생님, 잘 지내시지요” “그 옛날이 생각납니다” “감사합니다” 이런 한마디 말이면 충분하지 않을까? 아마도 깜짝 놀라며 기뻐하는 선생님의 목소리에 내가 더 행복해질 것이다. 작은 시간과 용기만 내보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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