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상호의 무모한도전] '한국 최고의 풀백' 신홍기, "지도자의 길, 준비는 끝났다"

정지훈 기자 2021. 4. 15. 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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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풋볼] 축구 선수를 시작해 프로로 가는 것은 '기적'에 가깝다는 말을 한다. 그만큼 축구 선수로 성공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는 말이고, 많은 축구 선수들이 도중에 선수 생활을 그만두고 빛을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인터풋볼'이 준비했다. 은퇴 이후 지도자, 에이전트 등으로 제2의 삶을 살고 있는 '축구인' 방상호가 평범하지만 그래서 특별한 축구 이야기를 전한다. 시작은 미약하나 끝은 창대하리라. [편집자주]

신홍기. 그의 또 다른 이름은 '왼쪽의 지배자'다. 1990년대 K-리그의 수많은 골잡이는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며 그라운드를 누비는 그의 뒷모습에서 '신홍기'라는 이름 석 자를 반드시 읽어야만 했다. 일격 필살의 날카로운 태클과 타의 추종을 불허했던 엄청난 활동량을 자랑하는 그의 기세 앞에 상대 공격수들을 고개를 떨궈야 했다.

1991년 세간의 기대 속에 울산 현대에 입단하며 프로 생활을 시작한 신홍기. 그러나 새로운 도전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포지션의 변화였다. 그 동안 공격수로 활약했던 그는 당시 울산의 차범근 감독의 권유에 따라 왼쪽 수비수로 보직을 바꿨다.

변화는 또 다른 기회를 만들었다. 입단 첫 해부터 총 39경기에 출전하며 울산의 간판수비수로 자리매김했고 면도날 같은 날카로운 태클과 마라톤 선수 못지 않은 엄청난 지구력을 자랑했던 그의 이름은 당시 K리그 공격수들 사이에서는 일명 '저승사자'로 통할 정도였다.

이후 신홍기는 탄탄대로를 달렸다. 1991년 태극마크를 가슴에 단 그는 점차 세계 무대를 노크하기 시작했다. 1993년에는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열린 세계 올스타전에 출전하기도 했다. 홍명보의 부상으로 대신 출전한 그는 비록 득점을 기록하지 못했지만, 세계적인 스타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그리고 신홍기는 그토록 꿈꾸던 월드컵 무대에 오른다. K리그에서의 꾸준한 활약상을 발판 삼아 그는 1994년 미국 월드컵을 준비하는 팀의 일원이 됐다. 하지만 스페인과의 첫 대결에서 자신의 실수로 선제골을 내주며 흔들리기 시작했고 그 뒤로 자책감과 후회 속에 한동안 괴로워했다.

시련은 계속 찾아왔다. 1996년 수원 삼성이 창단하는 과정에서 선수 수급을 위해 울산의 베스트 11이었던 신홍기를 지목했다. 이로 인해 그는 뜻하지 않게 소속팀 울산과 불화를 겪었다. 이후 극심한 슬럼프에 빠진 그는 1998년 프랑스월드컵 대표팀 명단에도 제외되는 등 끝없는 추락을 이어갔다.

벼랑 끝에서 1998년 수원 삼성에 입단한 신홍기. 이제는 한물갔다는 예상과 달리 그의 입단은 신흥 명문 수원의 전성시대를 알리는 전주곡이었다. 수원은 1998년 정규리그 우승을 시작으로 이듬해 수퍼컵, 대한화재컵, 아디다스코리아컵, 바이코리아컵, K리그까지 모든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는 전대미문의 사건을 일으킨다. 그리고 그 대열의 중심에는 수원의 캡틴 신홍기가 있었다. 그는 수원에서는 유일하게 2년 연속 주장을 맡으며 역대 최강 수원의 구심점 역할을 도맡았다.

1999년 수원 무적신화의 영광도 잠시. 신홍기는 2001시즌 치명적인 다리 부상을 입고 그라운드에 쓰러진다. 온몸의 피가 머리로 올라오고 다리가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K리그 개인 통산 336경기 출전에 35골 42도움. 화려했기에 더욱 아쉬웠던 그의 선수생활은 그 해를 끝으로 마침표를 찍었다. 이후 지도자의 길로 들어선 신홍기는 삼일공고 감독, 전북 현대 코치, 국가대표팀 코치를 거쳐 프로축구경기감독관을 역임했다.

이제 새로운 도전을 준비하고 있는 신홍기다. 여러 경험을 통해 좋은 지도자가 되겠다고 결심한 신홍기를 방상호의 무모한 도전에서 만나봤다.

[신홍기 인터뷰]

-현재 근황은

작년까지 프로 축구 경기감독관 생활을 3년간 해오다. 현재는 지도자를 준비 중이다. K리그, 해외리그 여러 팀들의 경기를 지켜보며 공부하기도 하고 있다.

-프로축구경기 감독관 출신으로 VAR 어떻게 생각하는지

장단점이 있지만 개인적으로 반대 입장이다. 축구는 흐름이 있는 스포츠이다. 뛰는 운동이기 때문에 VAR 적용시에는 수 분간 선수들이 경기장에 서있어야 한다. 또한 심판도 자신들의 결정권에서 휘슬을 불기보다는 VAR 콜에 안에서 휘슬을 불게 된다는 것이다. 요즘에는 VAR에서도 오심이 나오기 때문에 차라리 개인적으로 소신 있게 경기 진행이 하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지도자를 준비 중이다

감독관을 하다 보디 지도자에 대한 공부도 많이 됐다. 3년 동안 K리그 전 구단 스타일을 파악하고 배웠다. 막연하게 지도자를 하겠다는 생각은 아니다. 정말 이제는 완벽하게 준비를 했다. 다시 현장에서 선수들과 함께 해보고 싶은 생각이 많이 들었다 몇 번에 오퍼가 있었지만 그때는 준비가 완벽하지 않았던 것 같다. 아직까지 감독 생활을 해보지 못해 준비 기간이 더 필요한 거 같았다 프로감독 뿐만이 아닌 기회가 된다면 고등학교, 대학교, K3, K4까지 넓은 시야로 팀을 찾아보고 있다.

-축구 철학과 스타일은

저는 경기감독관을 하면서 작년 대구FC를 잊을 수가 없다. 내가 생각하는 축구를 구사하는 팀이다. 감독이 된다면 대구FC처럼 팀 전체 인원이 90분 내내 지치지 않고 뛰는 팀을 만들 것이다. 기본적으로 선수들의 기량과 기술이 많이 발전해 있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원팀으로 함께 움직이게 하는 것이 감독에 역할인 거 같다. 체력적으로 강하게 팬들도 경기가 지더라고 정말 열심히 뛰는 팀이라는 생각이 들도록 만들 것이다.

-말씀을 들어보니 선수 생활 스타일과 닮아있다

맞다. 지도자들도 선수 때 스타일을 버리지는 않는다. 기술적으로 좋은 선수가 11명 경기를 뛸 수 있지만 강한 정신력과 투지를 갖고 있는 선수가 전부 있지는 않다. 지도자에 역할인 것 같다. 멘탈적인 부분부터 선수와 감독 간에 밀접한 교류가 있어야 한다.

-투지 이야기가 나와서 여쭤본다. 한일전 어떻게 보셨는지

갑작스럽게 한일전을 치른 것이 문제이긴 한 것 같다. 준비 기간이 상당히 부족했다. 나 또한 대표팀 코치 생활을 했다. 대표 선수는 말 그대로 나라를 대표하는 선수이다. 결과에 따라 국민들이 판단한다. 이번에는 준비가 안 된 선수들이 많이 선발된 것 같다. 투지라는 것도 몸 상태가 좋아야 보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선발되어야 될 선수가 안 보인 것도 있는 것 같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사이드 백이었다

축구에서 제일 중요한 포지션이라 생각한다. 사이드 백에서 전술이 이뤄지는 부분이 많다. 예전에는 축구를 제일 못하는 선수를 사이드 백에 세웠다 현재는 반대가 되었다. 공,수 모든 것을 할 줄 알아야 하며, 경기에 흐름이 사이드 백에 따라 변하기도 한다. 지도자를 하게 된다면 조금 더 신경이 쓰일 포지션이다.

- 마지막으로 신홍기를 기억하는 팬들에게

지금 지도자로서는 현장에 떠나있는지 오래됐습니다. 하루빨리 그라운드에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저 신홍기 기억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글=방상호(지스포츠에이전시 대표)

사진=방상호, 수원 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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