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비된 WTO 혁신하겠다..'개혁가'로 나선 첫 흑인·여성 사무총장 [시스루 피플]
[경향신문]
[시스루 피플]은 ‘See the world Through People’의 줄임말로, 인물을 통해 국제뉴스를 전하는 경향신문의 새 코너명입니다.
‘개선 불가능한 것을 개혁하다.’ 세계무역기구(WTO)의 첫 흑인·여성 사무총장 응고지 오콘조이웨알라(66)가 지난 2012년 나이지리아 재무장관 재직 경험을 풀어낸 책의 제목이다. 오콘조이웨알라는 빚더미에 빠진 국가재정, 분열된 국민여론, 부패한 공무원 등 수십년간 군사 정권이 남긴 유산을 청산하고 2013년 나이지리아를 아프리카 국내총생산(GDP) 1위국으로 만들었다. 그는 이번엔 사실상 기능이 마비된 WTO를 개혁해야 한다.
취임하자마자 오콘조이웨알라 사무총장은 첨예한 문제들에 직면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 이후 강화된 보호무역주의와 코로나19 대유행 속에 WTO를 이끌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당장 코로나19 백신 지식재산권 문제가 WTO의 과제로 떠올랐다. 지난해 10월 인도와 남아프리카공화국은 WTO에 백신에 대한 지식재산권 협정(TRIPS) 관련 조항의 일시적 면제를 요구했다. 전세계에 광범위한 백신 접종이 이뤄질 때까지 특허 문제없이 백신을 생산할 수 있도록 하자는 요구였다. 세계 약 80개국과 세계보건기구(WHO), 국경없는의사회 등이 찬성했지만 백신 개발에 성공한 미국과 유럽 등 서방국들은 반대하고 있다.
14일(현지시간) 백신 개발사, 각국 정부 관계자가 함께한 WTO 전화회의에서 오콘조이웨알라 사무총장은 코로나19 백신 지식재산권 면제를 위해 더 적극적으로 협상하자고 했다. WTO는 백신 문제를 두고 8차례나 회의를 가졌지만 여전히 돌파구를 찾지 못했다.
다만 이날 미국의 변화가 감지됐다. 회의에 참석한 캐서린 타이 미국 무역대표부(USTR) 대표는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사이의 백신 접종 불평등은 용납될 수 없다. 개도국의 입장을 더 많이 듣고 무역 규칙을 개혁해야 할 필요가 있는지 고려하겠다”면서 “산업계도 위기의 시대에 큰 용기와 희생을 발휘해야 한다”고 문제 해결 의지를 내비쳤다. 물론 미 상공회의소는 “지식재산권을 면제하면 중국 등 다른 나라가 미국의 노력을 가로챌 수 있다”며 여전히 반대편에 서있다.
오콘조이웨알라 사무총장은 WTO가 백신 공급 불공평 문제 해결을 위한 중심 역할을 해야 한다는 입장이 확고하다. 그는 “전 세계에서 백신이 7억회 접종됐는데 저소득 국가의 비중은 0.2%에 그친다”면서 “몇 주 또는 몇 달 안에 백신을 공평하게 공급하기 위한 후속 조처가 이행되길 기대한다”고 했다. 지난해 12월까지 글로벌백신연합인 가비(Gavi) 이사회 의장을 지낸 그는 백신 개발사들이 개도국의 제조업체들에 더 많은 라이선스를 부여하도록 합의점을 찾는 등 대화와 중재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로이터통신은 신임 사무총장의 강점으로 엘리트이면서도 자신과 다른 의견을 경청하고 겸손하다는 점을 꼽았다. 나이지리아 왕족 가문 출신인 그는 10대 때 내전을 겪은 후 미국으로 건너가 하버드대에서 개발경제학을 공부했다. 25년간 세계은행에서 근무했고 나이지리아에서는 두 번이나 재무장관을 맡았다. WTO 사무총장 결선투표를 앞두고 미국은 한국의 유명희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을 지지했고, 중국·유럽·아프리카는 오콘조엘라에 표를 줬다. 이제 그는 자신을 반대했던 미국을 설득해야 한다.
현재 기능이 정지된 WTO의 분쟁해결기구(DSB) 문제도 해결이 시급하다. DSB 상소위원은 WTO에 제소된 국가 간 무역분쟁의 최종심 판결을 내리는 재판관이다. 트럼프 정부 당시 미국의 반대로 상소위원이 1명만 남은 상황이어서 DSB 기능이 마비됐다. 오콘조이웨알라 사무총장은 상소위원 선임과 관련해 조 바이든 미국 정부와 긴밀한 협의를 이어가고 있다. 유럽연합(EU)과 미국 간 이견이 컸던 WTO 개혁 방안도 그의 중재로 접점을 찾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파스칼 라미 전 WTO 사무총장은 “미국·중국·EU 삼각지대의 중심에서 어떻게 중재를 하느냐가 성공의 열쇠”라면서 “WTO를 강대국의 비서가 아닌 균형축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오콘조이웨알라 사무총장은 신뢰 회복을 개혁의 시작점으로 꼽았다. 그는 취임 인터뷰에서 “세계 각국이 신뢰를 회복한다면 위기를 헤쳐갈 희망이 있다”면서 자신의 책 제목을 언급했다. “개선불가능한 것을 혁신하는 개혁가가 되겠다.”
이윤정 기자 yyj@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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