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은 헌신입니다

2021. 4. 15.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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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우리 아트센터 조현동 '봄날, 그 기억'전. 나우리 아트센터 제공

"예술의 전당에 한번이라도 가보신 분, 손 들어 주세요!"

문화 예술 강좌를 시작하는 첫 날 묻곤 했다. 놀랍게도 삼분의 일 정도가 손을 든다. 서초구에서 진행하는 강좌가 이 정도니 다른 지역은 짐작 가고도 남지. 예술의 전당이 예술의 집대성이라거나 랜드마크라거나 거창하게 여겨서가 아니다. 다만 대중적인 전시나 홍보도 잘 하고 있고 우면산 아래 갓 모양 건축과 미감 좋은 곳곳에 시설도 훌륭하니 그냥 놀러 가기에도 딱이란 말이지. 그런데도 이 예당을 한번도 안가본 사람들이 훨씬 더 많은 거다. (찔리지 마시라!)

물론 예술이 뭐길래! 전시회 안가고 공연 한 번 안봐도 행복하게 사는덴 아무 지장 없거든. 쇼핑도 하고 맛집도 가고 세상은 넓고 재미는 넘쳐라. 할 수도 있지. 하지만 우리는 좀 더 고차원적인 유희의 동물. 말초 신경뿐 아니라 내적 세계 또한 생의 유리알같은 기쁨과 깊음을 원한다. 마음에 주먹만한 구멍이 뚫려 있어 인간의 실존적 공허를 온 몸으로 느끼는 우리. 사람으로 막을 수 없고 사랑도 그 때 뿐.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두 손 꼭 잡아도 빈 데로 소중한 것이 자꾸 빠져나가는 날들이 있다. 그런 날 예술이 둑을 만든다. 결핍 된 사랑을 가만히 채우고 과잉 된 자아는 조용히 다독인다. 그림 앞에서 천천히 걷는 시간이 위로가 되고 속닥하게 웃는 우리가 힘이 되지.

봄바람 심술에 마음이 흔들한 날. 나우리 아트 센터에 들렀다. 서초구는 자칭 예술의 도시인데 예술의 전당에 묻어 가고 있다고 우스개 소릴 하곤 했지. 그런데 얼마전 교대역에 나우리 아트 갤러리가 있다는 걸 알았다. 예전에 살던 아파트 바로 앞이다. 뻔질나게 지나다니며 왜 몰랐을까 나의 무심이 원망스럽다가도 지금에서야 그 시간이 됐구나 한다. 공간이 부르는 시간, 인연이 닿는 시간. 늘 지나치던 빨간 벽돌 건물로 잰 걸음으로 들어갔다.

모든 예술이 융합 된 장을 펼치는 복합 문화 공간이다. 전시도 하지만 공연이나 강좌 등 퍼포먼스가 얼마든지 가능하도록 설계 되었다. 공간을 가로지르는 기나긴 책상과 의자들이 이 곳의 부흥을 짐작케 했다. 주로 전시와 대관 행사, 아카데미로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있었다. 좋은 일이다. 수익 구조로써의 갤러리는 쉽지 않을 것이므로 여러가지 복합 행사를 기획, 운영하며 시너지를 내고 있었다.

늘 이야기 하지만 공간은 헌신이다. 지금 있는 곳이 아름답다면 누군가의 애씀과 배려의 결과인 셈. 나는 다행히도 공간을 운영해 본 경험으로 그 감사를 일찍 깨달았고 바로 표현한다.

ㅡ이 공간, 너무 좋으네요. 이리 멋지게 건사하느라 힘드셨겠어요.

나우리 아트센터 이기원 대표의 눈빛이 끄덕이며 일렁인다.

ㅡ맞아요, 고생 좀 했지요...

조현동 작가의 '봄날, 그 기억展'이 열리고 있다. 봄의 서정이 다사로운 공간에 가득하다. 봄만큼 예술가들의 사랑을 받는 계절이 또 있을까. 사방에 꽃이 피고 나비가 난다. 어떤 몽환은 나를 태워 말처럼 달려 비로소 그림 앞에 내려 놓는다. 그림 속 자개 오브제의 신비 때문일까. 짧디 짧은 춘몽에 그만 아찔해진다. 그림의 채도와 구성이 여성미가 물씬한데 뜻밖에 작가는 중년의 신사다. 이럴 때 예술은 몹시 통쾌하게 전복 된다. 그림에 여성성 남성성이 어딨겠나. 세상을 향하는 시선이 존재할 뿐이지. 조현동 작가의 눈길은 깊고 다정하다. 아름다운 피상에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본질을 응시한다. 꽃 속으로, 봄 안으로 더 오래 더 깊이 들어간다. 나도 가만히 따라 가게 돼.

교대역에 이런 예술 공간이 있는 건 축복이다. 예술의 전당도 휘뚜루마뚜루 가기엔 멀다. 오다 가다 들러서 그림 볼 수 있는 곳이 최고지. 우리는 이런 공간을 아껴야 한다. 공간은 사랑을 먹고 자란다. 무관심으로 방치하면 우리 곁에 예술은 영영 추상적인 단어로 남을 것이다. 우리 마음 속 구멍도 북풍한파가 몰아칠 것이다. 봄햇살처럼 온기 가득한 나를 만들고 싶다면 잠시라도 그림 앞에 설 일이다. 봄날, 그 기억을 들여다 볼 일이다.

나우리 아트센터 조현동 '봄날, 그 기억'전. 나우리 아트센터 제공

임지영 우버객원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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