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서 범죄자가 된 라이더.. 이젠 아내가 밥 나른다

2021. 4. 15.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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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늙은 라이더의 죽음] 남편의 꿈을 이룰 수 있을까

[이나영 <셜록> 기자]
한국의 많은 청춘은 "닭을 튀겨 먹다가 찐 살"을 다시 "닭가슴살 먹어가며 다이어트" 한다. 운 좋게 취직하면 "늦은 시간까지 노동을 하고, 그 노동의 고통을 치맥으로 달"랜다.

그렇게 몸과 마음을 바쳐 일하다 해고당하거나 퇴직하면, 퇴직금에 대출을 얹어 치킨집을 차려 중년 이후의 삶을 모색한다.

농촌사회학자 정은정이 쓴 책 <대한민국 치킨전>에서 볼 수 있는 많은 한국인의 인생 경로다. 이젠 여기에 하나를 추가해도 어색하지 않을 듯하다.

'치킨집이 망하면 치킨을 배달하는 라이더가 된다. 우리는 배달의 민족이니까.'

누군가의 뻔한 인생 경로는, 서늘하고도 서글픈 느낌을 준다. 나이 쉰 넘어, 먹고 살겠다고 배달 라이더가 됐다가 길에서 죽은, 끝내 산재 처리도 안 된 주희재(가명) 씨의 삶이 그렇다. 주희재의 직업은 비밀이었고, 그가 이루고 싶었던 꿈은 휴대전화기 속에 꼭꼭 숨어 있었다.

그가 죽고 나서야 그의 삶과 꿈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셜록

1964년에 태어난 용띠 주희재 씨의 꿈은 요리사였다. 스위스 요리학교에 가고 싶었지만 현실이 허락하지 않았다. 대신 경주의 한 식당에서 일하며 음식 사업가를 꿈꿨다.

그의 첫 장사 아이템은 분식집. 경주에서의 경험을 살려 2004년 서울 동대문에서 야심차게 시작했다. 출발은 나쁘지 않았지만, 자릿세와 상납 등에 밀려 수입이 쪼그라 들었다.

신발을 팔아보고 액세서리 장사도 해봤지만, 망한 분식집만큼의 수익을 주지 않았다. 두 살 터울의 두 딸은 무섭게 자랐다. 살기 위해 서울 가산동 아파트를 팔고 경기도 성남 은행동, 장모님 집으로 들어갔다.

생활비까지 누군가에게 기댈 순 없었다. 은행 대출 1억 원의 이자도 내야했다. 아내와 고교생 두 딸, 자기 삶을 이어가려면 월 400~500만 원은 필요했다. 고등학교만 졸업한 50대 중년이 택할 수 있는 직업은 많지 않았다.

주희재 씨는 배달라이더를 택했다. 2017년 8월 13일, 배달 대행업체로 첫 출근을 했다. 아내 김정미(가명) 씨는 남편의 선택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위험한 일이어서 말리고 싶었다. 하지만 남편의 말 때문에 그 마음을 접었다.

"내 나이에 어디 갈 데도 없고, 나를 써줄 곳도 없어. 오래하지 않을 거야. 사업 밑천만 마련하고 그만 둘게."

라이더로 사업 자금을 마련하는 게 가능할까?

주 씨는 경기도 성남 은행동 집에서 노동현장인 정자동까지 가는 왕복 출퇴근 1시간을 아끼려 쪽방을 빌려 살았다. 하루 약 15시간 일하며, 50~60건을 배달했다. 죽도록 일해도 수입은 400~500만 원, 네 가족 생활비 정도였다. 이대로는 사업밑천을 벌 수 없다.

꽃이 피어 사람들이 산, 들, 공원으로 나가는 봄날은 라이더에겐 비수기다. 배달 대신 외식을 하는 사람이 많아서다. 2019년 4월, 주 씨는 ‘배달 콜’이 많은 서울 강남 진출을 선언했다.

성남 정자동이 동네 싸움터였다면, 서울 강남은 전쟁터였다. 아무리 콜이 많아도 지리에 익숙하지 못한 주 씨가 비집고 들어갈 틈은 좁았다. 다시 성남으로 철수.

먹고 살기 위해 싸움터와 전쟁터를 오간 주희재 씨의 직업은 사실 두 딸에겐 비밀이었다. 별일 아닐 수 있지만, 아버지에겐 일종의 자존심이었다.

쪽방에서 먹고 자며 배달하다 오랜만에 들어간 집. 반가웠는지 두 딸이 아버지 몸을 툭툭 치며 장난을 걸었다. 힘 자랑 하듯 세게 아버지 몸을 건드리기도 했다. 첫째 딸이 물었다.

"아빠 안 아파?"

"응, 안 아파."

"왜지? 아빠 뭐 운동했어? 갈비뼈가 튼튼해졌나?"

딸은 아버지 상의를 들췄다. 옷 안쪽에 딱딱한 라이더 보호장비가 보였다.

"이게 뭐야? 아빠 야구단 들어갔어?"

"아니… 아빠 라이더 일 해… 배달."

2018년 2월, 엄마도 말해주지 않은 아버지의 비밀이 그렇게 드러났다. 그제서야 딸은 50대인 아버지가 왜 갑자기 머리를 짧은 스포츠 스타일로 잘랐는지, 무릎 보호대가 달린 예쁘지도 않은 청바지를 왜 입는지, 모든 걸 알게 됐다.

가족에겐 비밀 직업이었지만, 주희재 씨는 라이더 업계에서 인정받는 노동자였다. 일을 시작한 지 몇 개월 만에 배달업체에서 팀장이 됐다. 정자동의 한 피자가게 팀장은 주 씨를 이렇게 기억했다.

"우리 가게는 밤 10시에 문을 닫는데, 주 팀장님은 새벽 2시까지 일했습니다. 배달 콜이 더는 없는 새벽까지 늘 거리를 지켰습니다. 열심히 하시니까, 저희도 주 팀장에게 배달을 자주 맡기곤 했습니다."

어떤 선택은 생과 사를 가른다.

ⓒ셜록

주 씨가 마지막으로 받은 콜은 정자동 파크뷰아파트에서 주문한 김밥. 2018년 6월 20일 오후 1시 7분, 배달을 마친 주 씨에겐 몇 개의 선택지가 있었다.

아파트 정문으로 나가면 길은 바로 정자동 식당가로 연결된다. 주 씨는 후문을 택했다. 왕복 12차선 도로와 연결된 곳. 잡월드사거리에서 우회전 하면 다소 먼길을 돌아 근무지에 도착한다. 좌회전 하면 새로운 식당가 판교, 유턴하면 다소 빨리 근무지에 닿는다.

주 씨는 좌회전 혹은 유턴을 택했는지 오토바이를 안쪽 차선으로 몰았다. 하지만 주 씨가 달리던 그 도로는 좌회전, 유턴 차선 쪽으로 붙는 게 금지된 곳이다. 그는 시선유도봉을 지나 안쪽 차선으로 붙었다. 그러다 승용차와 충돌해 지주막하출혈 등으로 사망했다.

그는 가고 싶다던 스위스 땅 한 번 밟지 못했다. 분식집이 망한 뒤 다시 한 번 음식점을 열겠다는 꿈도 이루지 못했다. 남이 주문한 밥만 곡예 하듯이 열심히 나르다 거리에서 삶의 마침표를 찍었다.

배달 노동자 주 씨는 죽어서 ‘범죄자’로 다시 태어났다. 주 씨의 산재를 심사하는 근로복지공단에 의해서 말이다. 아내 김정미가 신청한 산재에 대해 근로복지공단 산업재해보상위원회는 2018년 12월 이렇게 결정했다.

"고인의 사고는 고인의 도로교통법 위반의 범죄행위가 오로지 원인이 되어 발생한 사고로 업무상 재해로 볼 수 없다."

이런 판단의 근거가 된 게 “근로자의 고의·자해행위 또는 그것이 원인이 되어 발생한 부상·질병·장애 또는 사망은 업무상의 재해로 보지 아니한다”는 산업재해보상보험법 제37조 2항이다.

주희재 씨는 정말 범죄자일까. 물론, 주 씨가 시선유도봉까지 넘어 금지된 차선 변경을 한 건 잘못이다. 그는 도로교통법 제14조 제5항, 제48조를 위반했다. 이는 도로교통법에서 20만 원 이하의 벌금이나 구류, 과료에 처하는 수준이다. 범죄행위가 아닌 범칙행위로 규정돼 있다.

무엇보다 배달 라이더가 규정 속도, 차선, 신호 등 모든 교통법규를 지켜가며 식어버린 치킨, 피자, 하얀 지방이 낀 보쌈을 배달하면 플랫폼사업자-식당주인-주문자는 과연 만족할 수 있을까?

어쩌면 우린 라이더가 교통법규를 다 지키며 배달하면 모두가 분노하는 시스템을 만들어 놓고선 “왜 차선을 위반했느냐”고 죽은 사람에게 책임을 돌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내 김정미 씨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남편의 노동을 알아보기 위해 남편 휴대전화기에 저장된 동료 라이더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돌아오는 대답은 비슷했다.

"미안합니다."

"회사에서 협조하지 말라고 말을 들어서… 죄송합니다."

라이더들은 비대면 시대에 사람의 끼니를 연결해 주지만, 정작 본인들의 연결고리는 느슨하다. 각자 떨어져 거리에서 일하기 때문이다. 모여 친분을 나누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그들이 먹고사는 방식이다.

김 씨는 남편이 쓰던 휴대전화기에서 다른 비밀 하나를 발견했다. 붉은 떡볶이 소스가 담긴 비닐봉지와 ‘떡볶이 레시피’가 적힌 종이 사진. 그건 남편의 이루지 못한 꿈이었다.

"남편이 요리를 잘했거든요. 그 사람은 떡볶이 가게를 차리고 싶어 했던 거 같아요. 가족에게 라이더 일을 숨겼던 것처럼, 떡볶이 가게를 열겠다는 꿈도 혼자 끙끙대며 차린 뒤 말하려 했던 거 같아요."

남편의 휴대전화 사진앨범에는 가족이나 본인 사진이 거의 없었다. 가족과 떨어져 쪽방에 살며 밤낮 없이 밥을 날랐으니 어쪄면 당연한 일이다. 그의 전화기에선 배달을 수월하게, 빨리 완수하기 위한 지도만 왕창 나왔다.

근로감독관은 남편 사건을 살피러 나오지 않았고, 근로복지공단은 남편을 범죄자로 여겼으니, 아내 김 씨가 직접 나서기로 했다. 배달노동의 한 연결고리인 식당에 취업하기로 했다. 산재 처리가 안 됐으니, 두 딸과 함께 살길이 막막하기도 했다.

김정미 씨는 2019년 4월 국밥집에 취업했다. 아침 9시에 출근해 밤 10시께 퇴근한다. 김 씨는 하루 약 100개의 국밥을 나르고, 상을 치우고, 설거지를 한다. “배달의 민족 주문~”이란 알람이 울리면 요리된 음식을 포장하고 라이더를 기다린다. 라이더가 늦게 오면 국밥이 식을까봐 김 씨는 가슴을 졸인다.

오토바이 소리가 들리고, 헬맛을 쓴 라이더가 오면 반가움도 잠시. 김 씨는 이 말을 자기도 모르고 하고 만다.

"빨리 좀 부탁드립니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남편은 “빨리 부탁한다”는 말을 하루 몇 번, 평생 얼마나 많이 들었을까.

ⓒ셜록

살아있던 남편이 그랬듯이, 이젠 김 씨가 하루 10시간 넘게 노동을 한다. 안 하던 일을 해서일까, 너무 많은 일을 해서 그럴까. 김 씨의 무릎은 상했고, 허리 디스크는 두 개 파열됐다.

"허리랑 다리 주사 맞으면 한 달은 쉬어야 한다고 하더라구요. 그래야 무릎 연골이 좋아질 거라고요. 남편 산재가 됐으면 한 두어 달 쉴 수 있을 텐데… 그럴 수가 없잖아요."

그럴 수 없어서 노동을 이어가다, 이젠 계속 그러면 몸이 큰일 나는 상황이 됐다. 없이 사는 많은 사람은 그렇게 일한다. 몸이 아픈데 참으며 일하고, 그러다 악화되면 일을 그만두고, 몸이 좋아지면 돈이 떨어지고…

김 씨는 곧 식당일을 그만 두기로 했다. 김 씨에게 “몸이 회복되면 다시 식당으로 돌아올 거냐”고 물었다.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요. 일이 힘들더라도 급여가 더 많은 곳으로 가야만 해요. 지금 버는 돈으론 두 딸에게 해줄 게 없어요. 대학도 가야 하는데…."

단호한 김정미 씨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봤다. 김정미의 지금 일상에서 남편 주희재의 과거가 보였다. 반대로 남편 주희재의 과거를 떠올리면 지금 김정미의 고단함이 겹쳐 보인다. 다르면서도 같은 삶, 여간해선 멀어지지 않는 고단한 일상.

이 나라가 산재를 해줬다면, 저 굴레는 달라졌을 거다. 사회보험과 복지의 존재 이유는 그 고리를 끊는 데 있으니까. 하지만 국가는 그걸 끊어내지 못했고, 누군가는 열심히 일해도 언제나 가난하다.

바람대로 김정미 씨는 더 많은 급여를 주는 곳에서, 다치거나 죽지 않고 건강히 일할 수 있을까? 마지막으로 김 씨에게 꿈이 뭐냐고 물었다.

"아이들 별탈 없이 하고 싶은 거 할 수 있게 아프지 않고 돈 버는 일. 그리고 10년 뒤엔 나처럼 힘든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어요."

남편이 이루지 못한 꿈을 김 씨는 이룰 수 있을까. 위에 썼던 문장으로 기사를 끝내고 싶다.

누군가의 뻔한 인생은, 서늘하고도 서글픈 느낌을 준다. 부디 김정미 씨의 꿈이 이뤄지길. 이 서늘한 느낌이 신기루처럼 사라지길.

이 기사는 <프레시안>과 <셜록>의 제휴기사입니다

[이나영 <셜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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